<27화>
“왜 그래? 사실 다른 방법이라고 할 게 없잖아. 오늘 밤을 넘기면 죽는단 말이야, 그 애.”
<그건 나도 압니다. 느껴지는 게 있으니까요.>
“그럼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건데?”
나는 팔짱을 끼고서 릭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릭은 내 물음을 분명 들었을 텐데도 실제 곰 인형이라도 되는 양 꿈쩍하지 않았다.
“나랑 말 안 할 거야?”
<…….>
“자꾸 이러면 나 너랑 친구 안 한다.”
<친구 없다면서요. 소후작한테 첫 친구가 되자느니 어쩌느니 하더니 갑자기 웬 친구 취급이람. 허, 참네.>
뭐야, 왜 이상한 데서 삐지고 난리야. 조금 황당해졌다.
‘섬세하기가 검댕이 콧수염만 한 곰돌이 같으니.’
그렇지만 저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나는 릭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지. 잘 생각해 봐, 릭.”
<……뭐, 뭘요.>
“친구는 아무리 친해도 언제든 갈라설 수 있는 존재지? 맞지?”
<그건 그렇긴 한데…… 일단 얼굴 좀 저리 치워 봐요.>
릭은 솜뭉치 같은 손으로 내 얼굴을 밀어내려 했다.
나는 꿋꿋이 버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넌 내 거잖아. 친구는 선택에 따라 갈라설 수 있다지만 너한테는 선택권이 없어. 그러니까 네가 걔보다 나한테 더 중요한 거지!”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릭은 투덜거렸으나 조금 전과 목소리가 미묘하게 달랐다.
짜식, 풀렸군.
나는 다 안다는 듯 방글방글 웃었다. 그러자 릭이 끝내 한숨을 푹 쉬며 솜뭉치 같은 손으로 내 코끝을 툭 건드렸다.
<당신이 위험할 수도 있는 계획이잖습니까.>
이 말은 조금 의외였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위험할 수도 있는 거지, 위험한 건 아니잖아?”
<…….>
“아, 알았어. 안 다칠게. 절대 안 다칠게. 응?”
<…….>
“저기요오제말들리시나요오오.”
릭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침묵으로 시위한 끝에야 –대체 왜?- 토라진 태도를 갈무리했다.
릭이 완전히 마음을 풀었을 때쯤, 창밖에는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나갈 채비를 했다.
내 부탁을 받고 후작의 방 위치를 확인하러 갔던 셀레나가 돌아와 말했다.
<후작의 방은 소후작의 방 바로 앞이야.>
“좋아.”
움직이기 편하도록 펑퍼짐한 잠옷의 밑단을 대충 묶고, 머리카락도 대충 한 갈래로 땋아 내린 후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에게 들킬 염려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지.’
공작의 방은 내 방 바로 건너편에 있고, 이곳에서 소후작의 방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으니까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맞았다.
나는 곧 셀레나, 레일라와 결연하게 시선을 교환하고는 릭을 돌아보았다.
“다녀올게, 릭!”
릭은 침대 위에서 나인 척 이불을 덮어쓰고 있다가 그 말에 이불 밑으로 고개만 삐죽 내밀었다.
그가 마지못한 어조로 덧붙였다.
<……다치지 마십시오.>
“응!”
귀여운 녀석. 나는 릭을 향해 헤헤 웃어 주고는 창문을 조용히 열었다.
창턱에 기어올라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며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셋을 셈과 동시에 창밖의 굵은 나뭇가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곧장 나뭇가지를 양손으로 붙들며 숨을 죽이자 잠시간 파사삭 소리를 내며 흔들리던 나뭇잎들이 이내 잠잠해졌다.
‘후유.’
긴장한 탓인지 심장이 조금 콩닥거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는 나무에서 기어 내려왔다.
<테리, 저쪽에 경비병.>
셀레나와 레일라의 말에 따라 저택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과 기사들의 눈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나뭇가지 두 개를 꺾어 들고 수풀인 척 위장한 채 쇽쇽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제르비스의 방 창문 아래였다.
마침 창문 바로 옆으로 커다랗고 두꺼운 나무가 돋아나 있었다.
수월하게 나무를 타고 올라가 널찍한 창문 앞에 섰다. 창문은 조금 열린 채였다.
나는 그 즉시 셀레나와 레일라에게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이 비장한 눈빛을 하며 반대로 흩어졌다.
끼익-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고 창문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낮에 보았던 것과 다를 바 없이 드넓고 고요한 방.
인기척은 하나였다. 한쪽에 놓인 거대한 침대 위에 제르비스가 누워 있었다.
창백한 얼굴과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는 호흡.
나는 소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뒤늦게 내 기척을 감지한 악마가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아직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아서인지, 악마는 여전히 제르비스의 어깨에 들러붙은 채로 눈만 가늘게 좁히고 나를 관찰했다.
악령이 되기 직전이라는 것을 보여 주듯 붉은 기가 감도는 눈이 섬뜩했다.
‘레일라의 신님, 제게 힘을 주세요!’
나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숨을 깊이 들이쉰 후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꼈다.
“야, 괴물.”
흠칫.
악마가 한순간 몸을 파드득 떨었다. 곧이어 그르렁대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어떻게 인간이……!>
좋아, 역시 레일라가 말한 대로 사람 말을 알아듣는군.
나는 최대한 건들건들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래,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거야, 그치? 살아 있는 사람이 유령을 본다니 말도 안 되지. 그런데 그거 알아?”
<가, 가까이 오지 마라!>
“나는 너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있어.”
내가 악마의 말을 무시하고 침대 가까이 다가갈수록 악마의 주위로 일렁이는 흉흉한 기운이 강해졌다.
손끝이 조금 떨렸으나 주먹을 말아 쥐며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소멸시킬 수도 있지. 영원히, 다시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이 말에, 내내 제르비스의 어깨에 온몸을 붙이고 있다시피 했던 녀석이 한순간 움찔했다.
악마는 내 말에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기운을 끌어모아 몸통을 만들어 낸 후, 제르비스의 몸 위로 올라타 으르렁댔다.
그러자 제르비스가 힘겹게 신음을 흘렸다.
“으…….”
곧게 다물린 입술 틈으로 검붉은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입안의 살을 살짝 깨물며 악마를 노려보았다.
“그러니 마지막 기회야. 지금이라도 그 아이를 놓아주고 얌전히 사라질지, 아니면 내 손에 고통스럽게 소멸당할지. 셋 센다. 하나.”
시선을 힐긋 올려 침대 머리맡의 벽을 확인했다.
악마의 뒤쪽, 셀레나의 귀가 벽 위로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둘.”
내가 사라진 사실이 알려진 것인지 창문 밖으로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언뜻 들렸다.
나는 주홍색 불빛이 일렁이는 창밖에서 시선을 돌리며 마지막 숫자를 내뱉었다.
“-셋.”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악마가 제르비스의 몸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옆방에서 잠자코 기다리던 셀레나와 레일라가 튀어나왔다.
“잡아!”
나는 곧장 옆으로 몸을 굴리며 커다랗게 외쳤다.
목을 조르려는 듯 팔을 앞으로 뻗었던 악마가 내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더니 쾅!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혔다.
악마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두 사람의 모습에 처음에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레일라를 알아본 것인지 사납게 눈을 번뜩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너, 너! 너 때문이었던 것이냐!>
<어딜!>
레일라는 악마의 공격을 재빨리 피했다.
그사이 셀레나가 손을 뻗어 악마의 다리를 붙잡으려 했으나 속도가 워낙 빠른 탓에 악마는 그녀의 손 틈새로 빠져나갔다.
나는 셀레나와 레일라가 악마와 대치하는 사이 얼른 침대맡으로 달려가 제르비스의 몸을 끌어당겼다.
‘숨소리가 조금 나아졌어.’
코끝에 손가락을 대어 확인해 보니, 창백한 건 여전했지만 약간이나마 상태가 호전되었다.
나는 옷 소매로 소년의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 주었다.
<크윽!>
<컥……!>
그때였다. 등 뒤에서 심상치 않은 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등줄기에 꽂히는 섬찟한 감각에 반사적으로 몸을 휙 돌렸다.
몸을 돌리자 보이는 것은 방 저편에 엎어진 채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셀레나.
그리고 악마에게 손을 붙들린 채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레일라였다.
<이 자식, 무슨 힘이……!>
<하찮은 인간들 따위가! 잠시 어울려 준 것을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악마에게서 뻗어 나온 검붉은 기운이 레일라의 손에 아른거리는 희미한 푸른색의 불꽃을 꺼트렸다.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