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내 우리는 소후작의 방 앞에 다다랐다.
후작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고는 손을 들어 짧게 노크했다.
똑똑.
“제리, 아비다. 들어가마.”
그리 말한 후작이 문을 열었다. 흰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방 한쪽 벽을 전부 채우고 있는 유리창이었다. 그 너머로 시리도록 푸른 호수와 초록빛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커다란 유리창의 앞, 멍한 얼굴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한순간 입 밖으로 탄식을 내뱉을 뻔했다. 나는 무의식중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아이…….>
릭이 안타까운 침음을 흘렸다. 후작이 소년에게 다가가며 말을 붙였다.
“제리. 에버딘 공녀가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며 찾아왔단다.”
내내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소년이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에는 그야말로 불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을 한 표범의 머리통이 붙어 있었다.
몸통도 없이 머리만 덩그러니 남아 소년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소름이 돋았다.
“……유령?”
소년, 제르비스는 내 곁에 선 공작의 모습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작과 꼭 닮은 붉은색의 눈 아래에는 눈 그늘이 퀭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후작이 아들의 말에 흘끔 공작을 돌아보았다. 공작은 작게 한숨을 삼키고는 펜과 종이를 들었다.
「발레리안 에버딘이네. 소후작은 갓난아기 때 이후로 나를 본 적이 없으니 아마 기억에 없을 줄로 알아.」
잠시간 고개를 갸웃하던 제르비스가 이내 이해했다는 듯 흐리게 중얼거렸다.
“아, 아빠 친구…….”
“누가 친구야, 친구는. 난 저딴 친구 둔 적 없다.”
후작은 제르비스의 말에 발끈하며 반박했다. 그러자 공작은 저가 더 질색하는 얼굴로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제야 제르비스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묘하게 생기 없는 시선이 정면으로 맞닿았다.
<저대로면 얼마 못 살 것 같은데요.>
품 안의 릭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속으로만 동조했다.
‘생각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저 하우레스라는 악마의 힘이 생각보다 더 강한 듯했다.
이제 반년여를 앓았다길래 아직은 상태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제르비스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하고 왜소한 외양이었다.
그와 반대로 그의 어깨에 붙어 있는 악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심상치 않았다.
인간을 살라 먹는다는 악마라 그런지 셀레나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보다도 흉흉한 분위기였다.
‘할 수…… 있겠지?’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러나 곧 고개를 휘휘 내저어 불안을 떨쳐 내고 눈을 부릅떴다.
아냐,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야 해! 아자!
나는 속으로 심기일전하고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제르비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내가 제 코앞까지 다가가는 내내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앞에 멈춰서 환히 웃으며 손을 척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나는 테레지아 에버딘이라고 해. 너는 이름이 뭐야?”
방글방글 웃으며 묻는 얼굴을 소년의 눈이 탐색하듯 샅샅이 훑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제르비스.”
짧은 답이었지만 그래도 답이라는 게 돌아왔다는 게 어딘가. 나는 더더욱 밝게 미소 지었다.
“이름 예쁘다. 혹시 친구 있어?”
“……아니.”
“그러면 나랑 친구 하자! 나도 친구가 없거든!”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것치고는 말이 좀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릭이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자기도 친구 없으면서 웬 훈수람. 에베베.
“왜 하필 나랑?”
제르비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의구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앗, 저렇게 물어보면 또 할 말이 없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나는 고민 끝에 손가락을 꼽으며 답을 뱉었다.
“일단 우리 아빠 친구 아들이고, 집도 바로 옆이고, 그리고 잘생겼잖아!”
“쿨럭.”
<뭐라고요?>
등 뒤로 공작이 헛숨을 토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릭이 어딘지 사나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갑자기 왜 저래?’
나름대로 가장 의심받지 않을 만한 이유만 골라 말한 건데.
게다가 제르비스가 잘생긴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후작을 빼닮은 붉은 눈과 옅은 갈색 머리카락. 아파서, 라는 이유가 크겠지만 밀가루처럼 깨끗하고 하얀 피부. 선이 고운 이목구비.
얘도 크면 공작만큼은 아니어도 꽤 미인이 되겠군 싶었다.
그보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나는 상념을 지우며 눈앞의 소년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
제르비스의 붉은 눈은 열 살 아이답지 않게 유난히 깊어 보였다.
색소가 옅은 갈색 속눈썹 아래로 비치는 눈이 내 속을 들여다보려는 듯 물끄러미 시선을 맞춰 왔다.
나는 다른 의도라고는 티끌도 없는 것처럼 짐짓 순진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제르비스가 무어라 대답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차였다.
그의 눈이 한순간 크게 뜨였다.
“쿨럭!”
퍽!
제르비스는 돌연 손을 뻗어 나를 거칠게 밀쳐 냈다.
그가 허리를 굽히고 크게 콜록거렸다. 작은 입에서 튀어나온 검붉은 피가 바닥을 투두둑 물들였다.
“제리!”
“테리!”
후작과 공작이 동시에 대경하며 우리에게 달려왔다.
후작은 바닥으로 무너지는 제르비스의 몸을 붙들고, 공작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이는 내 몸을 받쳤다.
“주치의! 주치의는 어딨나! 당장 불러와!”
“예, 예, 주인님!”
“주치의를 불러와라!”
후작의 절박한 고함에 집사와 사용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움직였다.
“제리, 정신 차려 보거라. 아가!”
그 잠깐 사이 제르비스는 조금 전보다도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이 되어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것인지 눈꺼풀은 미동도 없이 닫힌 채였다.
그사이, 당황하며 나를 붙잡았던 공작이 후작을 연신 살피며 글을 휘갈겨 썼다.
「우리는 밖에서 기다리겠네. 필요하다면 공작가의 주치의도 불러 줄 테니 언제든 말하고.」
“……감사, 합니다.”
후작은 공작이 내민 종이를 내려다보며 잠시 멍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꽉 막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작은 그 직후 곧장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공작에게 안겨 방을 나가는 내내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악마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정확히는 뗄 수 없었다.
‘미, 미친…….’
절로 입이 벌어졌다.
제르비스의 목덜미에 이를 박은 악마의 머리가 작게 꿈틀거리며 점차 커지는 것이 보였다.
‘얼마 안 남았다.’
이건 직감이었다.
저 악마는 빠르면 오늘 밤, 아무리 늦어도 내일 안으로 악령이 될 거다.
그리고 제르비스는, 목숨을 잃겠지.
내 예상보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나는 후작가의 주치의가 방 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가고, 흰 방문이 닫히는 모습까지 똑똑히 눈에 담으며 이를 악물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시선을 마주했던 소년의 모습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 * *
“이러다가 제르비스가 죽겠어. 못해도 오늘 밤 안에는 저 괴물을 끝장내야 해.”
나는 후작가에서 배정된 방에 혼자 남게 되자마자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셀레나와 레일라 또한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라가 말했다.
<그러면 작전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소후작의 방에 들어가서, 테리 네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걸 미끼로 악마를 소후작에게서 떨어트려 놓고, 셀레나는 숨어 있다가 악마가 떨어지는 순간 붙잡는다.>
“그리고 마무리는 레일라.”
<좋아.>
우리는 제각기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레일라처럼 무언가를 소멸시키거나 하는 능력은 없다.
하지만 악마는 그 사실을 모르니, 잘만 도발하면 높은 확률로 나를 향해 달려들 것이다.
“좋아요. 이 작전은 타이밍이 중요해요.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소후작을 포함해서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맡겨 둬.>
그로부터 얼마 후, 후작이 보낸 하녀로부터 제르비스가 급한 고비를 넘기고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기준에서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죽기 직전이 되면 사람이 오히려 갑자기 건강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했던가?
지금 제르비스는 딱 그 상태였다. 죽기 직전.
‘다른 걸 다 떠나서라도, 공작 친구의 아들이기도 하니까. 죽게 내버려 두기는 조금…… 그렇지.’
한편 릭은 의외로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이 작전을 탐탁지 않아 했다.
나는 릭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의자에 앉아 그와 마주 보았다.
원래는 안고 있었는데, 팔다리를 마구 휘적거리며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다 내길래 별수 없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