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발레리안은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제르비스 아메트리스! 저 그 애가 좋아요!’
그리 말하는 테레지아의 눈은 무언가를 기대하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이가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좋았다. 가지고 싶어 하는 것도 좋았다.
발레리안은 테레지아가 지금껏 그러지 못했던 만큼 원하는 것을 마음껏 욕심내는 삶을 살았으면 했다.
그걸 위해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생판 처음 보는 또래의 ‘남자’ 아이란다.
이는 부모로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인은 알지 못했지만, 어느덧 그의 눈빛은 전장 건너편의 적을 노려볼 때만큼이나 살벌해져 있었다.
발레리안의 등 뒤에 선 세바스찬은 조용히, 하지만 그만큼의 의구심과 못마땅함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다시 조사하겠습니다.”
“그러는 편이 좋겠어.”
“맡겨 주십시오.”
두 사람은 누가 주종 아니랄까 봐 꼭 닮은 눈빛으로 삐딱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스산하게 웃었다.
그러던 중 발레리안의 표정이 문득 어두워졌다.
“그보다 하필이면.”
하고많은 가문 중에 하필이면 아메트리스 가문이라니.
‘……5년 만인가.’
그로서는 칩거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나서는 외출.
전장에서조차 느껴 본 적 없는 두려움이 가슴 속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느낌에, 그는 결국 도망치듯 눈을 감아 버렸다.
* * *
그로부터 약 일주일 후.
나와 공작은 아메트리스 후작령으로 향했다. 릭과 셀레나, 레일라도 함께였다.
우리가 탄 마차는 점심 무렵 아메트리스 저택 앞에 도착했다.
공작이 먼저 마차에서 내려서 나를 안아 내려 주었다.
“헉…….”
공작과 내가 마차에서 내려서자마자 주위에서 다급하게 숨 들이켜는 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지.
나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아메트리스 저택은 에버딘 저택만큼 커다랗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에버딘 저택과 달리 평범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덕인지 포근한 느낌이 강했다.
저택 앞에 도열해 있던 사용인들은 우리를 보며 희게 질린 얼굴로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나름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라 그런지 드러내 놓고 경멸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시선을 움직여 저택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갈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지닌, 청년과 중년의 경계에 선 듯 보이는 남자가 작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후작이구나.’
그것은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권력자 특유의 분위기와 고급스러운 의복.
후작은 멍하니 공작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힐긋 시선을 돌려 공작을 올려다보자 그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 복잡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후작이었다.
“……오랜, 만입니다. 공작님.”
아메트리스 후작은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려 한 것 같으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는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이 당혹이나 두려움 등이 아닌,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의아해졌다.
‘뭐지?’
이 두 사람…… 뭔가 반응이 심상찮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공작이 천천히, 느릿하게 펜을 든 손을 움직였다.
「간만이네, 아메트리스 후작.」
“……하실 말씀은 그것뿐입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달리 원하는 인사말이라도 있나.」
“하.”
후작이 돌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한 손으로 제 앞머리를 쓸어넘기더니 날카롭게 웃었다.
“……됐습니다. 들어가시죠.”
그 웃음을 기준으로 후작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그는 공작을 짧게 노려보더니 몸을 홱 돌려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뭔데?
당황으로 눈동자를 떠는 내 손을 공작이 조용히 쥐어 왔다.
「들어가자, 테리.」
“앗, 그으, 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섣불리 입을 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공작과 손을 맞잡은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에버딘 저택만큼은 아니지만, 아메트리스 저택 내부에도 유령이 몇 있었다.
내가 이 기묘한 분위기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머리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수군거리는 유령들의 속삭임 덕분이었다.
<5년 만이네, 저 꼬마.>
<쟤가 어른 된 지 벌써 15년이나 지났는데 새삼 꼬마는 무슨 꼬마?>
<그나저나 우리 제론은 안됐네. 명색이 하나뿐인 친구라는 놈이 5년 만에 연락을 해 와서 기껏 신나게 준비하더니, 와서 하는 말이 정작 ‘후작’이라니. 떼잉, 쯧.>
<맞아, 맞아.>
‘뭐?’
나는 그들의 수다를 듣다가 놀라 딸꾹질을 할 뻔했다.
‘둘이 친구였어? 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령들의 이야기로 단편적으로나마 유추해 보자니, 아무래도 두 사람은 공작이 저주로 인해 칩거에 들어가기 전까지 친구였던 것 같다.
하지만 공작이 5년 전 칩거에 들어간 이후로는 달리 연락을 주고받지 않다가, 오늘에서야 다시 보게 된 것 같고.
다름 아닌 내 말 한마디로 인해서.
‘왐마야…….’
나는 릭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슬그머니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두 사람이 이런 관계였다는 걸 알았으면 당연히 다른 곳을 찾아봤겠지…….’
하기야, 그 누가 유서 깊은 도서관에 ‘에버딘 공작과 아메트리스 후작이 싸웠다’라는, 일기 같은 내용의 책을 가져다 놓았겠는가.
아무래도 얼마 전 세바스찬이 내게 말하지 않고 삼켰던 것이 이런 상황이었나 보다.
나는 식당에 도착하고,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법한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줄곧 반성의 의미로 입술을 말아 물고 있어야 했다.
후작은 식전주로 나온 와인 잔을 집어 들더니 비아냥거렸다.
“드시지요. 고귀하신 고오옹작님의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말꼬리를 늘인 그가 심술궂은 얼굴로 와인을 쭈욱 들이켰다. 그가 공작을 향해 빈 잔을 까딱였다.
“잔이 비어서 건배는 못 하겠군요. 넓으신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와, 인성.’
나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저 사람, 비아냥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
그때 내내 조용하던 공작이 제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후작을 따라 하듯 곧장 쭉 들이키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빈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
“하.”
후작은 제 비아냥에도 잠잠하기만 한 공작의 모습에 나직이 이를 갈았다.
아, 안 돼. 이 이상 분위기가 험악해졌다가는 내 황금 동아줄이!
나는 이러다가 쫓겨나기라도 하면 어쩌지 싶어 황급히 내 앞에 놓인 잔 –포도 주스가 담긴– 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잔을 높이 들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저, 저도 할래요! 후작님의 멋진 구레나룻과 제 곰 인형의 리본에 건배!”
“예?”
“음?”
<뭐요?>
후작, 공작, 릭이 차례로 어이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한 번에 잔을 비웠다.
‘볼 아파.’
잔에 담긴 주스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가까스로 주스를 입안에 가득 머금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볼이 붕어처럼 빵빵해지며 아렸다.
“크흡.”
나를 보는 후작의 입꼬리가 심상찮게 움찔거렸다. 공작은 또다시 희한한 것을 보는 듯한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릭은, 뭐…… 안 봐도 알겠군.
나는 간신히 볼 안에 든 주스를 목구멍으로 꼴깍 넘기고는 활짝 웃었다.
“저녁에는 저랑 건배해 주세요, 후작님! 네? 꼭이요!”
“흠, 크흠. 공녀께서 그렇게 원하신다면야.”
다행히 후작의 기분은 아까보다 한결 나아 보였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어휴.’
그래도 어떻게 급한 불은 막은 것 같지?
나는 짧은 소강상태에 깊이 안도하며 포크를 들었다.
* * *
식사를 마친 후, 후작은 나와 공작을 아메트리스 소후작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 아이가 몸이 좋질 않아서……. 말을 걸었을 때 반응이 곧장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후작은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아들이 아프다는 이유로 수도의 부름을 전부 무시하고 반년이나 영지에 박혀 있다는 사람답게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셀레나, 레일라.’
나는 공작과 후작의 곁에서 우리를 따라오는 셀레나와 레일라에게 힐끔 눈짓했다. 그들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는 복도 한쪽에 멈춰 섰다.
셀레나는 악령에 가까울 만큼 강한 유령이고, 레일라는 악마의 천적이나 다름없다.
아메트리스 소후작에게 붙어 있는 악마가 그들을 발견하고 돌발 행동을 저지를까 걱정이 되는 탓에, 우선은 내가 먼저 소후작의 상태를 확인하기로 했다.
“이 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