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아이고.”
그래도 춤은 어찌어찌 이어지네, 라고 생각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몸이 휘청였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중에 허공으로 솟구치듯 몸이 쑤욱 떠올랐다.
놀라 눈을 뜨자 나는 어느새 공작의 팔 위에 안착해 있었다.
“또 넘어지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그는 한숨을 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안경 너머로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였다.
뭐, 뭐야? 내가 넘어졌던 걸 어떻게 알지? 설마 다 봤나?
나는 행여 공작이 내가 춤을 못 춘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후계자 자격을 박탈할까 두려워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공작은 별다른 말 없이 나를 팔에 앉힌 채 자작 부인의 연주에 맞추어 연회장을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자작 부인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으나 연주를 멈추지는 않았다.
공작은 이제 스텝조차 제대로 밟지 않고 그저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몸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오르골의 장식 인형인 줄 알겠다.
‘따뜻하네.’
나는 공작의 어깨를 짚고 있다가 새삼 그 사실을 깨닫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바스락대는 소리가 나며 옷 너머로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다.
유령처럼 싸늘한 몸이 아닌.
산 ‘사람’의 따스한 온기가.
‘저주…….’
유령과 사람.
그 간극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히 모르티아 일족의 저주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모르티아 일족의 수장이 죽는 순간 공작에게 내렸다는 저주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에버딘, 너희를 저주한다!
너희는 하늘이 내린 신성한 임무를 방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핏빛으로 드높은 명예는 땅에 처박힐 것이고,
사방에 가득하던 황금빛 재물은 모조리 부스러질 것이며,
종국에는 동경 가득하던 시선에 공포와 경멸만이 가득하게 될지니.
너희 죄인들은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리라!’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저주의 내용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았다.
따지고 보면 에버딘 공작가의 이 모든 불행은 모르티아 일족의 저주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명예도, 재물도, ‘인간’이라는 위치도 전부 잃었으니까.
‘테리, 저주라는 건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단다.’
그때, 문득 언젠가 엄마가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가족 소풍에서 동화책을 읽어 준다고 약속해 놓고, 급한 일이 생겼다며 사라져 버린 오블렌 자작 때문에 토라져 있던 어느 날.
홀로 햇살을 등지고 저주에 걸린 왕의 이야기를 읽어 주던 엄마는 작게 웃음 지었다.
‘저주라는 건 결국 상대에게 열쇠와 자물쇠를 동시에 걸어 두는 것과 같아. 열쇠만 찾아낸다면 자물쇠는 금방 풀 수 있지. 너는 똑똑하니까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내 이마에 짧게 입 맞춰 주었다.
그 당시의 나는 그저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 까르르 웃고 넘어갔다.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블렌 자작이 숨겨 왔던 본성을 드러내며 나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 뒤로는 머릿속에서 지우다시피 했던 시절의 일이었다.
아무튼 지금 내 앞에는, 본인의 잘못도 아닌 일로 인해 저주를 받은 에버딘 공작, 그리고 에버딘 저택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냥 두고만 보기에는, 이미 이 사람들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았다.
‘……도와주고 싶다.’
처음에는 실바람처럼 작게.
‘도와주고 싶어.’
그다음에는 한낮의 태양처럼 선명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이 다정한 사람들이 아프거나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진심이었으니까.
‘자물쇠와 열쇠를 동시에 걸어 둔다는 건, 자물쇠와 열쇠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소리이려나.’
그렇다면, 어쩌면.
이건 저주의 내용 그 자체가 해법이라는 말 아닐까?
번개처럼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 갔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인간으로서의 죽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금전과 명예라면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어.’
나는 에버딘 공작가를 부흥시켜 오블렌 자작령을 사들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공작가의 부흥은 곧 사회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저주의 내용이 실현되지 않게 만든다면, ‘저주’ 자체가 없던 일이 되지 않을까?
‘좋아, 할 수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실마리라도 찾아낸 듯해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공작의 어깨를 팡팡 쳐 이만 내려 달라는 뜻을 전했다.
공작은 곧장 나를 내려 주었다. 주의 깊게 우리를 살피던 라바디에 자작 부인이 유려하게 연주를 마무리했다.
“공작님.”
나는 바닥에 내려선 채 공작을 올려다보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그 부름에 곧장 몸을 숙여 한쪽 무릎을 꿇고는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왜 그러니, 테리.」
다정히 나를 바라보는 눈을 또렷이 응시하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 친구 만들고 싶어요!”
「……응?」
공작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잠시 내 말을 이해하려 노력하듯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앗, 바로 대답이 안 돌아오네.
나는 얼른 그의 옷소매를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저도 또래 친구 만들고 싶어요. 미나도, 세바스찬도 다 친구 있댔는데, 나만 친구 없어…….”
“아.”
내 말에 공작이 짤막한 탄식을 흘렸다. 그가 눈썹을 누그러트리고 펜을 움직였다.
「내가 미처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했구나. 미안해, 테리.」
“아뇨, 사과하실 일은 아니구요. 그냥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말이었어요.”
툭하면 자책하는 버릇도 이젠 그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사과만 하는 공작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가 혹여 ‘저주’에 관한 것도 자신의 탓으로 돌릴까 두려워 일부러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단단히 못 박아 두었다.
그에 잠시 침묵하던 공작이 이내 설핏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겠니? 다과회를 열어도 좋고…….」
“저 사실 친구 하고 싶은 애 있어요!”
“뭐?”
“예?”
공작과 세바스찬의 입에서 나란히 물음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꽤 컸던지라 나도 모르게 눈이 크게 떠졌다.
한순간 벙찐 얼굴로 가만히 있던 공작은 곧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펜을 휘갈겼다.
「누굴 말하는 거니, 테리?」
이 순간을 기다렸다.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또박또박 이름을 읊었다.
“제르비스 아메트리스! 저 그 애가 좋아요!”
“쿨럭.”
적잖이 놀랐는지 공작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음, 그럴 수 있지. 나조차도 반나절 전까지는 전혀 생각 안 하고 있었는걸.
하지만 낮에 세바스찬의 설명도 들었고,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니 아메트리스 후작령은 에버딘 공작령과 남쪽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남부는 바다와 맞닿아 있는 데다가, 해산물과 향신료 등 특산품의 거래가 특히나 활발한 곳이다.
한마디로 아메트리스 후작령은 무역의 요충지로 향하는 입구와 다름없다고 할 수 있지!
미래에 그런 곳의 주인이 될 아이와 친해져서 나쁠 것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있는 힘껏 친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판에 이런 기회가 생기다니.
하늘이 돕는구나!
나는 에버딘 공작령의 대로에 황금으로 길을 깔아 놓는 상상을 하며 흐흐흐 웃었다.
한편, 한동안 갈피 없이 흔들리는 눈을 하던 공작은 이내 무언가 결심한 얼굴을 했다.
「테리. 하지만 소후작은 지금 몸이 좋지 않아.」
“그러니까요! 얼른 나아서 맨날 같이 놀자고 얘기해 주고 와야지. 엄마가 이웃이랑은 친하게 지내야 한댔어요.”
「……그래, 알았다. 대신 같이 가도록 하자. 널 옆 영지까지 혼자 보낼 수는 없어. 이해할 수 있지, 테리?」
“네!”
신난다!
기다려라, 하우레스인지 뭔지 하는 악마! 곧 박살 내 주지! 나 말고 셀레나가!
* * *
발레리안은 테레지아의 춤 교습이 끝난 후, 땀을 씻어 내야 한다는 미나의 말에 따라 아이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테레지아는 귀엽게 손을 흔들고는 미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탁.
“세바스찬.”
“예, 주인님.”
발레리안은 아이에게 손을 마주 흔들어 주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싸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것은 뒤에 선 세바스찬도 마찬가지였다.
발레리안은 전에 없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테리가 아메트리스 소후작과 안면이 있는 사이이던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 제게 아메트리스 후작가에 관해 물어보셨던 것만 보아도 그간 접점이 없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 분명 그럴 텐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