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나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기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물이건 인간이건 간에 유령이 산 사람에게 ‘들러붙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보통 정신력이 약한 사람들은 유령에게 취약하다.
유령이 사람에게 들러붙으면,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는 죽기까지 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것은 유령이 그 사람의 생명력과 기력을 모기처럼 빼앗아 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유령은 악령이 된다.
한숨을 푹푹 쉬던 레일라는 어느새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오블렌 자작령을 사들이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고 했지?>
앗, 소문났나. 이런 젠장.
<네가 당장 사업을 벌인다고 한들, 제국 내에서 에버딘 공작가의 이미지가 바닥을 찍고 있으니 힘들 거야.>
부정하고 싶었으나 레일라의 말은 안타깝게도 사실이었다.
귀족들마저 ‘에버딘’이라는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뒤로는 ‘유령 공작가’라고 부르며 조롱하는데 오죽할까.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내게 그녀가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고위 귀족과 연을 터놓는다면 투자를 받기도 쉽고, 그 과정이 조금 더 수월해지지 않겠어?>
사제라고 하더니, 사실은 본성이 상인에 더 가깝다고 하더라도 믿을 정도로 능숙한 화술이었다.
미심쩍음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내게 그녀가 미끼를 흔들듯 곱게 눈을 접으며 말했다.
<하우레스가 도망친 곳은 아메트리스 후작령, 그리고 들러붙은 사람은 제르비스 아메트리스 소후작이야.>
* * *
‘제르비스 아메트리스라…….’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오후. 나는 라바디에 자작 부인의 춤 교습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메트리스 후작령은 에버딘 공작가와 맞닿아 있는 곳이다.
‘정계에서 나름 유명한 가문이지요. 약 반년 전, 현 후작의 외동아들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앓기 시작한 뒤부터는 수도에서 내려와 아들의 정양과 치료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언뜻 듣긴 했습니다만…….’
세바스찬에게 도서관에서 찾은 지도를 내밀며 아메트리스 후작가에 관해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길래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나 싶었지만, 그는 별일 아니라며 나를 홀까지 데려다주고 사라졌다.
아무튼, 소후작이 반년 전부터 앓기 시작했다면, 레일라가 악마를 놓쳤다고 말한 시기의 바로 직후부터였다.
그처럼 시기가 딱 들어맞으니 달리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내 힘은 상대를 속에서부터 부서트리는 것에 가까워서, 잘못 건드렸다가는 제르비스 그 아이마저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거고.>
레일라는 시범을 보여 주겠다며 자루 모양 유령의 꼬리를 뿅 하고 없앴다가 그 유령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내 자루 모양 유령이 씩씩대며 사라지자 레일라는 머쓱하게 매무새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셀레나라는 유령 있지? 그 유령의 힘이면 충분할 거야. 너희는 그 악마를 어떻게든 아이에게서 떨어트려 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내가 곧장 소멸시킬 테니까.>
나무랄 데 없는 제안이었다.
다만 그렇게 악마를 처리하고 나서 아메트리스 후작가에 무어라 설명할지가 문제긴 하다. 그건 좀 더 고민해 봐야겠네.
“공녀님, 집중하셔야지요.”
“앗, 네!”
그때 라바디에 자작 부인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곳은 에버딘 저택의 연회장이었다.
비록 사용하지 않은 지 십 년이 훌쩍 넘은 탓에 곳곳에서 낡은 티가 났지만 춤 연습을 할 만큼 바닥이 매끄러운 곳은 이곳뿐이었다.
라바디에 자작 부인은 손뼉을 짝짝 치며 박자를 맞춰 주었다.
“네, 좋아요. 지금 그 자세 그대로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몸을 돌리세요.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나는 그녀의 말에 맞추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우아하게 턴.
콰당!
“아야야.”
자작 부인을 향해 몸을 틀려는 순간, 몸의 균형이 삽시간에 무너지더니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자작 부인이 놀라 내게 다가왔다.
“세상에, 공녀님. 괜찮으세요?”
“괘, 괜찮아요…….”
습, 이걸로 벌써 세 번째군.
나는 쓰라린 엉덩이를 슬슬 쓰다듬으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춤에는 재능이 없나.’
라바디에 자작 부인은 이제 측은하기까지 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다리조차 없는 올챙이를 보는 눈빛이랄까.
나를 동정하지 마세요…….
<저 간단한 걸 왜 못 하는지. 쯧쯧.>
그래도 곰 인형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거든?
내가 한쪽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릭을 째려볼 때였다.
내내 닫혀 있던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공작과 세바스찬이 들어왔다.
라바디에 자작 부인은 그들의 모습에 작게 딸꾹질을 시작했다.
“공, 공작님을 뵙습니다. 수업 시간은 아직 조금 남았는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그녀는 급하게 숨을 참으며 허리를 숙였다. 공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인사에 수긍해 주고는 종이를 내밀었다.
「업무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테리가 수업을 듣는 모습도 한번 보고 싶어 들렀네. 혹 곤란한가?」
“그, 그럴 리가요.”
이 저택의 주인이 후계자의 수업을 참관하겠다는데,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엉덩이를 슬슬 쓰다듬던 나는 공작을 향해 반가이 웃어 보였다.
“공작님!”
「그래, 테리. 잘하고 있었니? 수업은 어때?」
“음.”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이리저리 굴리자 공작이 작게 웃었다.
왜 웃으시는지? 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춤 못 춘다고 안 했는데요? 거참 이상한 사람일세.내가 속으로 마구 반박하며 입을 삐죽이는 사이, 신기한 눈길로 나와 공작을 번갈아 보던 라바디에 자작 부인이 돌연 손뼉을 짝 맞부딪치며 웃었다.
“두 분의 사이가 참 좋아 보이네요. 그러고 보니 공녀님께서 데뷔탕트를 치르시면 공작님과 춤을 출 일이 많을 텐데, 미리 연습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뭐라고요! 방금 제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다. 그러나 나보다도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공작의 눈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호오.’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또 처음 보네. 혹시 춤을 잘 못 추나?
일전에 출입 금지 숲에서 돌아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다정하거나, 차분하거나, 잔잔한 얼굴이던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문득 심술이 샘솟았다.
나는 공작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냉큼 자작 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요! 저 공작님이랑 춤추고 싶어요!”
“아가씨께서 공작님을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좋습니다.”
라바디에 자작 부인은 싱긋 웃더니 한쪽에서 피아노를 치던 자작가의 하인을 물러나게 하고 본인이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나는 어쩐지 조금 멍해 보이는 얼굴의 공작을 향해 예법에 따라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고는 손을 척 내밀었다.
“한 곡 추실까요, 멋진 안경을 쓰신 신사분?”
“풉. 크흠, 큼.”
내 말에 공작의 뒤에 서 있던 세바스찬이 다급히 숨을 들이켜더니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세바스찬 할아버지, 제가 꼭 돈 많이 벌어서 건강하게 해 드릴게요……. 그때까지 살아남으셔야 해요. 아자!’
나는 짠한 눈으로 세바스찬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를 향해 작게 주먹을 쥐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기꺼이.」
이어 공작이 한숨처럼 자그마한 미소를 띠며 내 손을 잡았다.
공작은 저택의 다른 이들 중에서도 유독 장신이었다. 그런 그와 춤을 추려니 예법대로 한 손을 허리에 얹고, 다른 한 손을 어깨에 얹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양손을 맞잡은 채 반주에 맞추어 발을 움직였다.
라바디에 자작 부인의 연주는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다만 우리의 스텝은 그렇지 못했다.
탁! 턱! 탁!
내 스텝이 한 번 어긋나면 공작의 스텝이 한 번 엉켰다.
반대로 내 스텝이 엉키면 공작의 발등이 아슬아슬하게 내 발뒤꿈치를 피해 갔다.
뭐라고 해야 하나……. 둘 다 못 추는 건 확실한데 그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어떻게 모양새는 흉내 내고 있다고나 할까.
이 정도면 기행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