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말은 그렇게 해도 빼앗긴 그녀의 생은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마음 한구석이 조금 아렸다.
그 이후, 나는 행여 백작이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거든 한 대 때려 주려고 열심히 지하 감옥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미나와 기사들의 손에 뒷덜미가 달랑 들린 채 방으로 이송되기 일쑤였다.
아니, 다들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시는지? 착한 어린이 테레지아 에버딘은 정말이지 억울해서 못 살겠군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어 보아도 그들은 단합이라도 한 듯 단호했다.
그런 사소한 억울함 빼고는 그야말로 평화롭고 나른한 나날이었다.
아리에타 백작이 빼돌려 제 창고에 쌓아 둔 자금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백작과 함께 붙잡혔던 가네스 남작의 말에 따르자면, 횡령한 자금은 백작이 도박으로 대부분 날려 먹었다고 했다.
‘그 새끼 눈을 백금으로 갈아 버렸어야 했는데…….’
미나는 그 새끼 다시 살렸다가 죽이면 안 되나, 하며 나 몰래 혀를 찼다.
물론 다 들렸지만, 모른 척해 주자. 이건 절대 무서워서가 아니다.
아무튼, 이 일로 인해 본래 공작가가 보유하고 있어야 할 금액의 일부나마 채워졌다. 그 덕에 공작가는 조금이나마 더 사람이 사는 곳 같아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식단이었다.
「아가씨, 식사하세요.」
“네!”
신난다! 밥! 밥이다!
나는 미나가 식사하라는 종이를 내밀기도 전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나가 그런 내 모습에 잘게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보였지만 그쯤은 관대하게 넘어가 줄 수 있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식당으로 가시는군요. 좋은 아침 되세요, 아가씨.」
내 방에서 식당까지 가는 사이 마주치는 모든 사용인이 환한 웃음과 함께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내가 이번 사건에 어느 정도 일조했다는 –리본을 잃어버림으로써 셀레나의 시신을 발견하도록 유도했으니까- 사실을 알게 된 후,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공작이 먼저 양해를 구했고, 본인들도 영지를 무너트리지 않기 위해서는 옳다고 생각해서 행한 일이었겠지만 이런 삶이 힘겹지 않았을 리는 없었겠지.
에버딘 공작가의 힘을 빌려 오블렌 자작령을 꿀꺽할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라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인사에 화답해 준 후 식당으로 들어섰다. 공작은 오늘도 말끔한 차림새로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공작님!”
「좋은 아침, 테리.」
공작이 습관처럼 덧붙여 주는 저 이름 한 번이 왜 이렇게 듣기 좋은지 모르겠다.
나는 헤헤 웃으며 작지만 깨끗한 테이블 앞에 공작과 마주 보고 앉았다. 릭은 무릎에 올려 두었다.
곧 미나와 몇몇 사용인이 테이블 위로 음식을 차려 주었다.
일전에 먹었던 것보다 가짓수가 두 배는 늘어난 데다가, 고기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입을 헤 벌리고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스테이크 접시를 내려다보자니 공작이 웃으며 스푼을 들었다.
「먹자. 앞으로는 기다리지 말고 먹도록 하고.」
“네!”
그 말만을 기다렸지! 나는 방긋 웃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공작은 수프를 떠먹다가 말고 내게서 포크와 나이프를 가져가 30초 만에 스테이크를 깍뚝깍뚝 썰어 주었다.
나는 짧게 감사 인사를 한 후 포크로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하.’
너무 맛있다, 진짜…….
지나친 감동으로 인해 어깨와 다리가 들썩였다.
손에 쥔 포크를 위아래로 흔들며 꼴사납게 팔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자니 식당에 서 있던 사용인들과 공작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나는 속으로 주방장에게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열심히 스테이크를 씹었다.
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고 끓여 낸 크림 스튜, 스크램블드에그, 오동통한 소시지, 연어가 올라간 샐러드 등도 말끔히 해치웠다.
‘배불러.’
어느새 접시 위는 깨끗해져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접시를 보고 있자니 조금 민망했다.
공작은 진작 식사를 끝낸 상태였기에 사용인들은 조용하고 빠르게 테이블 위를 정리했다.
나는 그동안 물로 입을 헹구며 고민했다.
‘돈, 돈이라. 돈을 어디서 어떻게 벌어야 하지?’
횡령금을 일부 되찾아 급한 불은 껐다지만, 여전히 공작가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낙후된 시설도 보수하고, 후에 자작령을 사들여야 할 걸 생각하면 계속해서 수입이 나올 만한 구석을 만들어 둬야 할 텐데.
‘흠…….’
나는 고민하다가 시선을 힐긋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식당의 샹들리에 위에 고양이처럼 늘어져 있는 자루 모양 유령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이제 다들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걸 아는데.’
이참에 살아생전에 꿍쳐 둔 돈 좀 없냐고 물어보고 다닐까?
막 그렇게 생각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유령이 돌연 온몸을 바르르 떨더니 팍 튀어 올랐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운 생각! 무서운 기운! 무서워! 무서워! 끼야아악!>
끽끽대며 천장을 미친 듯이 돌던 유령은 그대로 벽을 통과해 도망쳐 버렸다.
“…….”
그 모습을 본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뭘 어쨌다고?
* * *
현재 오전 교육을 담당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점심을 먹기 전까지는 자유 시간이었다.
나는 미나에게 산책을 할 겸 저택을 돌아다니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열심히 유령들을 추궁하고 다녔다.
‘거기 예쁜아. 혹시 생전에 숨겨 둔 재산이나 보석, 금, 뭐 이런 거 없니? 어차피 죽어서 쓰지도 못하는 거, 내가 좋은 곳에…….’
나름 상냥하고 친절하게 묻는다고 물었는데 유령들은 나만 보면 바들바들 떨며 도망가기 바빴다.
<굳이 같이 다니며 보호할 필요도 없겠네. 난 간다. 셋이 좋은 시간 보내렴.>
“컹!”
약속을 지키겠다며 우릴 따라왔던 셀레나는 말릴 새도 없이 손을 흔들고는 사라져 버렸다. 검댕이만이 곁에서 신나게 꼬리를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나인들 이럴 줄 알았겠냐고.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주위를 살폈다.
보자, 보자. 어디 돈 좀 있어 보이는, 아니, 마음씨 착한 유령은 없나.
<얘!>
그때, 눈앞으로 반투명한 푸른색의 머리가 거꾸로 튀어나왔다.
순간 놀라 뒤로 물러나자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단발의 소녀가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너, 인상이 참 좋구나?>
……뭐지, 저 전형적 사기꾼 같은 말투는?
나는 경계심을 바짝 세우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읏차,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에서 내려와 바로 선 소녀가 나를 조르르 쫓아오며 말을 붙였다.
<내 이름은 레일라야. 그냥 레이라고 불러도 돼.>
“안 부를 건데…….”
<그보다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너 돈 필요하지?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번 들어 볼래?>
“안 들을 건데…….”
<나는 다른 세계에서 구마 사제로 일하다가 죽었어.>
“당신 내 말 안 듣…… 뭐?”
오만상을 찌푸리던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마 사제라면, 어떤 세계에서 ‘악령을 퇴치하는 신관’과 같은 말이라고 들었는데.
한데 레일라가 그런 사람이라고?
내가 놀람에 눈을 깜박이고 있자, 레일라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 움직임에 그녀가 입고 있던 검은색, 금색이 뒤섞인 로브가 사르르 흩날렸다.
기도하듯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맞댄 그녀가 싱긋 웃어 보였다.
<우리 세계에서는 ‘악마’라는 존재가 꽤 흔했기 때문에, 사제들에게 ‘세례’를 통해 악마를 퇴치할 능력을 주었지. 나도 그중 하나고.>
레일라는 손바닥이 보이게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눈을 감았다.
그녀가 잠시 정신을 집중하니 손바닥 위로 푸른 불꽃이 화악 피어났다.
<원래는 흰빛인데, 지금은 죽어 버려서 이런 색이네.>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던 레일라가 이내 힘을 거두었다.
<나는 ‘하우레스’라는 악마를 쫓다가 죽었어.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 보니 여기였는데, 내가 쫓던 악마도 내 앞에 있더라? 유령 상태이긴 하지만 그대로 두면 위험하니까, 붙잡아서 소멸시키려고 했더니 도망치더라고. 그래서 쫓아갔는데…….>
레일라는 돌연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놈이 인간한테 들러붙는 바람에 곤란하게 됐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