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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21) (21/124)

<21화>

그렇게 희게 질린 얼굴로 서둘러 에버딘 저택을 벗어나는 가네스 남작의 뒤를, 미리 내 명을 받은 레딘과 미하일이 조용히 쫓았다.

그리고 불길한 낌새를 느낀 아리에타 백작이 비밀 장소로 향할 때 저택을 급습!

그가 없애려 했던, 셀레나가 모은 증거들과 이중장부 등의 물증을 고스란히 습득!

캬, 완벽하다, 완벽해.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우유를 기분 좋게 홀짝였다. 적당한 양의 꿀이 들어간 우유가 입안을 달게 적셨다.

「더 타 줄까?」

우유가 너무 맛있는 나머지 다리를 허공에서 동동 구르는 내 옆에서 공작이 물었다.

그는 이미 은색 티스푼을 한 손에 쥔 채 결연한 눈을 하고 있었다.

……꿀의 비율을 맞추는 게 저렇게까지 중요한 일인가? 나야 맛있으니 좋다만.

나는 흔쾌히 ‘한 잔 더!’를 외쳤다. 정확히는 외치려고 했다.

“좋…….”

「안 됩니다, 주인님. 아가씨께서는 벌써 꿀 우유를 세잔이나 드셨다고요. 워낙 마르셨으니 간식도 좋지만, 곧 저녁 식사 시간이니 제대로 된 밥부터 드시게 해야 합니다.」

그때 미나가 단호하게 그를 막아섰다. 막 티스푼을 꿀단지 안으로 집어넣던 공작이 움찔했다.

「……아, 그런가.」

안 돼! 당신이 설득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미나를 못 이긴단 말이야!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빈 잔을 끌어안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딱 한 잔만 더 마시면 안 돼요……?”

“……으음.”

“진짜 딱 한 잔만.”

“음…….”

“아니면 반 잔만!”

침음을 흘리던 공작은 끝내 내 눈빛 공격을 이기지 못한 듯 헛기침을 하며 미나를 돌아보았다.

“반 잔만 더 주면 안 될까.”

“……알겠습니다.”

아자! 해냈다!

나는 미나가 ‘조금만 더 드세요.’라고 적힌 종이를 내밀자마자 반색하며 공작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에 미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매우 신중한 손길로 잔에 꿀을 한 방울 한 방울 흘려 넣고 있는 공작에게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주인님, 서즈튼 경과 아르볼트 경께서는 아직도 지하에 계신 건가요?”

“그래. 멀쩡한 건 눈과 귀뿐이어도 좋다고 했으니 포를 뜨든 회를 치든 알아서 하고 있겠지.”

공작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아리에타 백작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조금 전과 달리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싸늘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그 태도 변화에 한 번, 대답의 내용에 두 번 놀라 커다란 쿠키를 와앙 베어 물다가 말고 굳어졌다.

아, 아니. 지금 사람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하고 계신 거지요들……?

입을 헤 벌린 채 그들을 바라보자, 뒤늦게 내가 옆에 있다는 걸 상기한 듯 공작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는 이내 따끈하게 데워진 우유를 잔에 가득 –미나가 눈감아 주었다- 채워 넣어 내게 건넸다.

「자.」

“감사합니다.”

나는 방긋 웃으며 잔을 받아 우유를 홀짝였다.

그래,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꿀 우유를 잘 타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지, 아암.

* * *

“오셨습니까, 주군.”

늦은 밤.

발레리안은 저녁 식사 후 꾸벅꾸벅 조는 테레지아를 미나에게 맡긴 후 지하로 내려왔다.

한참 전부터 이곳에 와 있던 미하일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그를 맞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에서 비릿한 혈 향이 풍겼다.

“백작은.”

“잠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워.”

발레리안은 한쪽에 놓여 있던 의자를 당겨 앉으며 무심히 말했다. 황금색 눈은 온기 한 점 없이 섬뜩했다.

미하일의 고갯짓을 받은 레딘이 감옥의 벽에 매달려 있던 아리에타 백작의 얼굴에 물을 촤악 끼얹었다.

“커흑, 컥! 콜록! 흐…….”

아리에타 백작은 상처에 물이 닿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정신을 차렸다.

깨어나자마자 제 앞에 앉은 공작을 발견한 그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머리도, 손목도, 발목도.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

하지만 그 기세만으로도 차마 알아보지 않을 수 없는, ‘발레리안 에버딘’의 모습.

몇 년 만에 눈으로 직접 접한 공작에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던 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린 아리에타 백작이 이를 뿌득 갈며 악을 썼다.

“오해십니다! 전부 빌리엄 가네스 그 더러운 작자가 저를 모함하려고-!”

“레딘.”

발레리안은 그의 발악을 들은 척조차 하지 않고 레딘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가 우악스럽게 백작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 으읍!”

「나는 자네의 개소리를 들어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내 할 말을 하러 온 것뿐이니 입은 다물어.」

아리에타 백작은 발레리안의 글을 읽어 내리는 동안 시시각각 코앞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아, 안 돼. 이대로 가다간 죽는다!’

그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려 거칠게 버둥댔지만,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가며 입을 짓누르는 레딘의 손 탓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발레리안은 여태 테레지아 앞에서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짓눌리는 듯 날 선 시선으로 아리에타 백작을 바라보았다.

「내가 정녕 몰랐다고 생각하나.」

“……!”

「난 영지를 위해서 너희를 내버려 두고 있던 것뿐이야. 주인 없는 영지보다는 허울뿐인 주인이라도 앉아 있는 편이 나을 테니까.」

발레리안은 사납게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의 이마에는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그러니 선을 넘지는 말지 그랬어, 백작.」

“…….”

「그랬다면 나는 계속 멍청이처럼 에버딘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그대들을 묵인해 줬을 텐데 말이야.」

그간 발레리안이 가신들의 횡령을 지적할 수 없었던 사정을 아는 미하일과 레딘은 조용히 침묵했다.

영지, 그리고 영지민들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발레리안은 문득 손수 이번 일을 계획한 테레지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공작님.’

그는 얼마 전까지, 테레지아가 조금이라도 더 아이다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아이다울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아왔으니, 미흡하더라도 할 수 있는 한 세상의 모진 일이라고는 모르게 보호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아이는 그늘이라고는 모르는 모습으로,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을 내밀고 말했다.

더는 참지 말라고.

‘저는 테레지아 에버딘이에요.’

자신은 테레지아 ‘에버딘’이라고.

‘……고맙다.’

그 말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또 가슴이 미어질 만큼 미안했다.

너도 어쩌면 죽지 못해 살아온 나날이었을 텐데.

그런 너를 이 저주받은 곳으로 끌어들인 나를 위해, 버팀목이 되어 주겠다며 기꺼이 웃는 너는…….

어떻게 그리 찬란하고 애처로운지.

「나는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더는 자네들을 참아 주지 않을 생각이네.」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테레지아는 주위의 풍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 아이의 바람막이가 되면 된다.

칼 같은 바람에 찢기고, 끝내는 넝마가 되어도 제 뒤에 테레지아가 있는 이상은 결코 쓰러질 수 없는 바람막이가.

“처리해.”

“예, 주군.”

할 말을 마친 발레리안은 테레지아의 자는 얼굴이라도 들여다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눈치를 보던 아리에타 백작은 발레리안이 떠나려 하자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으나, 레딘은 제 몸으로 공작의 뒷모습을 가리며 악귀처럼 웃었다.

“지금부터 당신이 죽였던 그 행정관의 심정을 직접 한번 체험해 보자고. 죽어서도 잊지 못할 만큼 짜릿한 경험일 테니까 말이야.”

* * *

약 일주일 후.

아리에타 백작은 셀레나 오웬 살해 혐의, 횡령, 협박, 배임 등등의 죄목을 한가득 단 채 지하 감옥에서 목이 잘렸다.

가네스 남작을 비롯한 일부 가신들 또한 살인 방조, 불법 도박 가담 등 죄질이 나빴지만, 백작의 협박을 받았음을 참작해 파면 후 노역형에 처했다.

그 외, 지극히 가벼운 죄만을 저질렀던 가신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공작은 그간 영지의 사정이 좋지 않았음을 감안하여, 다시 한번 같은 일을 저질렀다가는 목을 내놓겠다는 각서를 받은 후 그들을 원래의 업무로 복귀시키며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야말로 군더더기 없는 일 처리였으나, 나는 셀레나의 마음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그녀는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웃고는 고맙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속이 다 시원하네. 내 손으로 직접 죽이지 못한 건 아쉽지만, 뭐…… 그래도 딱 자기가 한 만큼 돌려받은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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