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가네스 남작, 빌리엄 가네스는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깊이 숙인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저 개자식.’
‘이번에 자네 쪽에서 올린 보고서. 조금 이상하더군.’
단 한 번이었다.
아픈 아내의 약값이 모자라, 딱 한 번 공작가로 보내야 할 돈에 손을 댔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공작이 전쟁터를 전전하는 사이 에버딘령은 점차 쇠락하고 있었다.
광산이 바닥났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나, 영지를 제대로 돌볼 주인이 없으니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빌리엄 가네스가 공작가의 세수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알아낸 아리에타 백작은 그것을 목줄로 잡고 그에게 온갖 더러운 일들의 뒤처리를 맡겼다.
사실은 아리에타 백작이 저지른 비리의 규모가 가장 크며, 그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몇몇 가신들을 같은 식으로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강제로 아리에타 백작의 명을 따르는 동안 그가 저지른 죄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태였고, 그것은 고스란히 백작의 무기가 되었다.
‘우리의 죄는 이미 용서받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닐세. 그러니 다 함께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잠자코 내 말에 따르는 것이 좋을 거야.’
아리에타 백작은 가신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같은 존재였고, 이미 공작가를 배신한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여 반강제로 아리에타 백작과 함께한 지 몇 년.
세금 횡령, 불법 도박 등의 일에만 손을 대던 아리에타 백작은 기어코 영지민까지 죽였다.
‘진짜 죽일 줄은 몰랐다고……!’
빌리엄은 슬슬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덜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으나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어쨌든 자신이 아리에타 백작에게 ‘행정관 하나가 가신들의 비리를 캐고 있다’라고 알렸기 때문에 그 여자가 죽은 것이 아닌가.
혹 자신이 지은 죄가 공작의 귀에 들어갈까 봐. 그래서 목숨을 잃게 될까 봐.
결국 자신도 저자와 다를 바 없는 살인자였다.
눈을 질끈 감은 빌리엄 가네스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는데…….”
“자네는 대체 날 어디까지 실망하게 할 생각인지…….”
“그 행정관의 시신을 찾아오려 보냈던 수하들이 숲에서 에버딘 공녀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뭐?”
내내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아리에타 백작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직후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버럭 소리쳤다.
“제정신인가! 대체 아랫것들 간수를 어떻게 했길래 그딴 어린애의 눈 하나 못 피하고 그 사달을 내!”
애초에 숲으로 사람을 보낸 것이 아리에타 백작의 명령 때문이었건만.
속에서 울분이 치밀었지만 가네스 남작은 최대한 감정을 죽이며 무감하게 말을 이었다.
“……내일 오전에 공녀의 수업이 있으니, 제가 공작가의 동태를 한번 살펴보지요. 그때까지는 숲에 사람을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 * *
다음 날이었다.
빌리엄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며 테레지아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인사를 하는 척하며 재빠르게 테레지아의 얼굴을 살핀 그는 내심 안도했다.
‘딱히 시체를 발견한 아이의 얼굴 같지는 않군.’
저 나이대의 어린아이가 숲에서 시체를 발견했다면 저렇게 평온하고 즐거워 보이는 얼굴일 리가 없었다.
‘……역시 보지 못한 건가?’
빌리엄은 긴가민가하다가 슬그머니 말문을 뗐다.
“어제 숲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앗, 그게, 잠깐 길을 잃어버려서……. 그래도 늑대 친구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어요!”
테레지아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방긋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빌리엄 가네스는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테레지아는 아무것도 못 본 듯하니,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 여유롭게 행정관의 시신을 처리하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그는 한결 풀어진 얼굴로 책을 펼쳤다.
“그럼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물론 테레지아의 수업 태도는 오늘도 가관이었다.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책장을 아무렇게나 팔랑이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예 책을 덮고 자신을 구경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빌리엄은 이제 테레지아의 불량한 태도에 심히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무던하게 수업을 끝마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과제는-”
“그런데요,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뚱한 표정이던 테레지아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빌리엄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말씀하시지요.”
“‘횡령’이라는 게 뭐예요?”
“……예?”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테레지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의 앞까지 도도도 달려왔다.
까치발을 한 아이가 굉장히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한 손으로 입 모양을 숨기며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요, 제가 며칠 전에 공작님 집무실에 과자를 먹으러 갔거든요? 그런데 테이블 위에 있던 서류에 ‘횡령 정황 포착’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
“그런데 여기 있는 책을 찾아봐도 그런 말은 없고, 제가 몰래 서류를 본 거니까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기도 그래서…….”
테레지아는 발뒤꿈치를 내리며 시무룩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말에, 정신이 아찔할 만큼 큰 충격에 사로잡혔던 빌리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셨습니까. 다른 사람의 서류를 멋대로 훔쳐보는 것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짓입니다.”
“잘못했어요…….”
“횡령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에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알았다가는 크게 혼이 나실 테니, 그때까지 절대로 입을 여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테레지아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빌리엄은 다음에 뵙겠다는 말을 남기고 허둥지둥 방을 빠져나왔다.
에버딘 저택을 벗어나 아리에타 백작저까지 어떤 정신으로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공포에 질려 백작의 집무실로 뛰어들었다.
“백작님!”
“……빌리엄? 자네 이게 대체 무슨 무례인가!”
느긋하게 의자에 늘어져 있던 아리에타 백작이 놀라 역정을 내었지만 빌리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고, 공작이, 공작이 횡령 정황을 잡은 모양입니다! 공녀가 공작의 집무실에서 관련 보고서를 보았답니다!”
“……!”
다급한 목소리에 아리에타 백작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는 지금껏 가신들의 약점을 잡고 흔들어 왔던 자답게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어 제게 매달리는 빌리엄을 내버려 둔 채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증거를, 증거를 없애야 한다.’
공작이 어떻게 가신들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선은 제가 쥐고 있던 증거들부터 없애는 것이 문제였다.
과거라면 모르겠으나 지금의 공작가에게는 정보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아마 정황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증거까지는 찾아내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공작가에서 이곳에 들이닥치기 전까지만 증거를 모두 없애면……!
“……악! 이게 무슨!”
“아, 아무리 공작가라고 해도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그때 멀리서 사용인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창밖을 내다보니 에버딘 공작가의 상징인 흰가지나무가 그려진 깃발들이 수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가네스 남작의 보고만 고려하자면 에버딘 기사단이 이렇게 빨리 들이닥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현실이었다. 가네스 남작이 에버딘 저택을 떠나자마자 기사단이 그 뒤를 밟았음이 명확했다.
아리에타 백작의 표정에 절망과 분노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안 돼……!”
그는 마지막까지도 발악하듯 증거들을 숨겨 놓은 방을 향해 뛰었다.
방 안으로 뛰어들어 바닥에 숨겨진 비밀 문을 열고, 그 안에 있던 금고 속 서류들을 벽난로에 집어 던지려는 순간.
“잡았다, 쥐새끼.”
아리에타 백작이 듣지 못한 목소리와 함께, 그는 뒷덜미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그대로 혼절했다.
* * *
‘아가씨! 찾았습니다, 증거!’
다행히도 가네스 남작과 아리에타 백작은 예상대로 움직여 주었다.
‘공작이 당신들의 횡령 사실을 알고 있다’라는 말을 흘렸을 때, 남작은 내가 어린애라는 사실 때문인지 내 말이 거짓말일 거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