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9) (19/124)

<19화>

“그으…….”

<변명하지 마요. 더 비참하니까.>

“으응…….”

<…….>

“…….”

<그렇다고 진짜 아무 말도 안 하는 겁니까? 허, 참.>

뭐 어쩌라고!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한숨을 삼키며 눈에서 힘을 풀었다.

손을 뻗어 릭을 들어 올리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이거 놔요!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미안.”

나는 릭의 겨드랑이를 받쳐 그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고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진짜 미안해, 릭. 앞으로는 이런 상황이 와도 너를 아무한테도 뺏기지 않을게. 나만 믿어. 너는 내 거니까.”

<뭐, 뭐…….>

“그쵸, 셀레나?”

나는 고개를 돌려 셀레나에게 마구 눈짓했다. 뭐 해요, 빨리 동조해 달란 말이야!

<어, 그, 그렇지. 응. 테리의 곰돌이지…….>

셀레나는 어쩐지 묘한 얼굴로 나와 릭을 번갈아 보더니 선선히 수긍했다.

그사이 릭은 정말 곰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뻣뻣이 굳어 있었다.

뭐지?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의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릭? 미…….”

<……됐습니다. 그만해요.>

“앗. 화 풀렸어?”

<그러게요, 풀렸네요. 대체 왜지……?>

릭 본인도 스스로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으나, 어쨌든 화가 풀렸다니 다행인 일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웃으려던 참이었다.

바스락대는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진다 싶더니 풀잎을 온몸에 덕지덕지 붙인 늑대가 우리를 향해 펄쩍 뛰어올랐다.

“으악!”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늑대는 놀라 뒤로 나동그라지는 내 뺨과 품에 안긴 릭의 얼굴을 정신없이 핥았다.

아니, 릭이야 그렇다 쳐도 나는 왜?

“으풉, 자, 잠시만.”

“컹!”

“그래, 그래. 착하지.”

한동안 격렬하게 나와 릭을 반기던 늑대는 이내 얌전하게 땅에 주저앉더니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일련의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던 셀레나는 참 희한한 애들이라며 작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본 우리는 서둘러 숲을 빠져나왔다.

“헥헥.”

얘는 왜 따라오는지 모르겠지만.

나름 귀여운데 그냥 키우면 안 되나? 아, 공작가에 그럴 여력이 없으려나?

* * *

와그작.

세바스찬의 보고를 듣던 발레리안의 손에서 깃펜이 그대로 우그러졌다.

그 바람에 검은 잉크가 흰 장갑을 온통 물들였으나 그는 무섭도록 얼굴을 굳힐 뿐이었다.

“뭐, 라고 했나, 지금.”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선 세바스찬이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테레지아 아가씨께서…… 사라지셨다는, 보고입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혹시, 정말이지 혹시 싶어 단장과 부단장을 보내 두지 않았던가.

혹여 황제의 비틀린 심기가 아이에게까지 미칠까 봐 미나까지 붙여 두었다.

그런데, 뭐? 사라져?

“제기랄.”

발레리안은 나직이 욕설을 씹어 뱉었다. 전장에서나 느껴질 법한 사나운 살기가 그의 주위로 일렁였다.

세바스찬은 발레리안의 살기를 처음 느껴 본 것이 아님에도 목덜미에 식은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끼고는 침음을 삼켰다.

안경을 벗어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친 그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사단 전원 집합시켜.”

그의 눈은 전장에서 사람의 목을 베어 넘길 때처럼 완벽하게 돌아 버리기 직전이었다.

* * *

나는 릭과 셀레나, 그리고 검댕이 –이름을 붙여 줬다– 와 함께 숲을 벗어났다.

울창한 숲을 빠져나와 시내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저 앞쪽에서 비명처럼 나를 부르며 다가오는 미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가씨!”

앗, 다행히 금방 찾았다!

반색하며 미나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그대로 와락 끌어안겼다.

“어? 미나?”

당황스러움에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거렸다. 졸지에 미나와 내 사이에서 납작하게 짓눌린 릭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미나는 평소와 달리, 내가 허우적대는데도 곧장 떨어지지 않고 외려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흙과 먼지로 엉망이 된 오른쪽 어깨 부근의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정말, 정말 걱정했…… 흐으윽.”

어…….

미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나를 끌어안은 채 펑펑 울었다.

숲속에서 살인범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맹세코 지금이 더 당황스러웠다.

어, 어떡하지. 나는 뻣뻣이 굳은 채로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사이 미나와 마찬가지로 엉망으로 흐트러진 모습의 기사들이 허겁지겁 우리 주위로 모여들었다.

“아가씨! 찾았다!”

“아, 진짜 진짜 다행입니다…….”

기사들은 미나처럼 울지는 않았지만, 저마다 숨을 헐떡이며 안도로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저들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선명히 보이는지라 정말이지 당혹스러웠다.

나는 그렇게 반쯤 얼떨떨한 상태로 미나의 손을 잡고, 기사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채 저택으로 돌아갔다.

“컹!”

검댕이는 잔뜩 신이 난 듯 내 곁에서 꼬리를 붕붕 흔들고 있었다.

아까 기사들이 검댕이를 향해 검을 뽑아 들려 하기에 나는 대번에 기겁하며 그들을 말렸다.

「아가씨, 하지만…….」

‘검댕아! 대답!’

‘컹!’

‘아이, 대답도 잘하네! 이것 보세요! 똑똑한 아이라니까요?’

……그냥 짖어 본 거 아닐까요?

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 처음에는.

하지만 그들은 곧 물 만난 강아지처럼 꼬리를 붕붕 흔들며 나를 따라오는 검댕이의 모습에 해괴한 얼굴을 하고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참 다행인 일이었다.

에버딘 저택과 상업지구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노을이 비치는 저택의 정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세바스찬을 비롯한 공작가의 사용인 전부가.

사람들의 가장 앞에서 초조한 얼굴로 왔다 갔다 하던 공작이 이쪽의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그가 눈을 크게 떴다.

“테리!”

공작은 처절하다시피 절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눈 깜짝할 새 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나를 끌어안으려는 듯 양손을 뻗었다가 움찔하며 부자연스럽게 움직임을 멈췄다.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한 그가 이내 천천히 팔을 거둬들였다.

그 대신 내내 왼손에 쥐고 있던 것처럼 구깃구깃한 종이를 내보였다.

「걱정했잖니.」

“아.”

그것을 본 나는 짤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이리저리 번진 잉크가, 식은땀에 젖어 엉망으로 구겨진 종이가.

지금 공작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것 같아서.

‘진짜…….’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미나를 다시 만난 순간부터 내내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정말, 진심으로, 나를 걱정했던 거다.

나는 처음 에버딘 저택에 도착한 순간, 아니 그 이전부터 이곳을 떠날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는데도.

“……죄송해요.”

지금 이렇게 손에 식은땀을 쥐게 만든 것도, 또 이전까지 못되게 굴었던 것도. 전부 다.

나는 고개를 떨구며 속으로만 그렇게 덧붙였다.

공작은 고개를 푹 숙인 내 정수리를 심란하게 내려다보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푸스스 웃음을 흩뿌렸다.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아씨, 또 기분 이상하네.

왜인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입을 열었다.

“공작님.”

불쑥 튀어나온 부름에 황금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나는 또렷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저는 테레지아 에버딘이에요.”

“…….”

“그러니까 더는 참지 마시고, 하고 싶은 대로 하셔도 괜찮아요.”

이제는 에버딘의 사람인 내가 있으니까.

믿었던 가신들의 배신이든, 황제의 악의이든 간에.

나는 당신이 더는 부당한 일들을 참아 내야 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

내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은 듯, 공작의 눈이 놀란 듯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역시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니까. 나는 설핏 웃음을 흘리며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왜인지 파도치듯 흔들리던 눈으로 날 보던 그는, 이윽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띠며 내 손을 맞잡아 왔다.

“……고맙다.”

언뜻 혼잣말처럼도 들리는 속삭임이 허공으로 부스스 흩어졌다.

처음으로 장갑 없이 맞잡은 손은, 머리 위로 드리운 노을의 색처럼 따스했다.

* * *

“찾았나?”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가네스 남작은 몸에 익은 습관대로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 그것이…….”

“찾았다, 아니다. 둘 중 하나로 대답하면 될 것을. 왜 혓바닥이 길지, 빌리엄?”

아리에타 백작은 책상 너머에서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가네스 남작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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