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뭐?”
셋!
속으로 셋을 셈과 동시에 릭을 껴안고 커튼 아래로 데구르르 굴러 나갔다.
그에 맞추어 기다란 옷이 걸린 행거 바닥에 착 달라붙은 후 옷자락 사이로 슬쩍 바깥을 내다보았다.
“꺄아아악!”
“저, 저, 저게 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경악한 얼굴로 가게 저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하하! 하하하하!>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얼굴로 흰 천을 뒤집어쓰고 날아다니는 셀레나가 있었다.
“유령이다!”
<정-답!>
……어째 너무 즐거워 보이는데? 저러다가 따라 나오는 것까지 까먹지는 않겠지?
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쪽을 살펴보다가, 행거를 끌던 직원이 멈칫하는 사이 재빨리 다른 행거의 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굴러 이동한 끝에 가게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푸르르 내저어 먼지만 털어 내고, 릭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 지도에서 보았던 숲의 방향으로 내달렸다.
탈출 성공이다!
* * *
<아, 재밌었다. 이거 은근히 적성에 맞네.>
다행히 셀레나는 늦지 않게 합류했다.
나는 셀레나와 릭을 대동한 채 민간인 출입 금지 숲의 초입에 발을 들였다.
“맹수가 많이 나와서 그런가, 여기도 느낌이 썩 좋지는 않네.”
작게 중얼거리며 자박자박 걸음을 옮겼다.
숲 안쪽은 어둡고 축축한 탓에 음산한 분위기가 짙었다.
<여기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셀레나가 이쪽인가? 저쪽인가? 하는 말을 오십 번쯤 들었나.
우리는 마침내 최근에 흙이 한 번 뒤집힌 것처럼 부드러운 땅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아…….>
셀레나는 나직이 탄식했다. 릭은 달리 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나 고개를 무겁게 숙였고,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잡초가 무성하게 돋아난 땅바닥 중간.
최근 누군가 급히 뒤엎었던 것처럼 고슬고슬한 흙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여기가 맞나 보네.’
나는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짧게 묵념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길.’
셀레나가 옆에서 황당한 목소리를 냈다.
<……저기, 테리? 나 여기 있거든?>
“알아요. 하지만 그냥 이 정도는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담담히 대꾸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깐 고민했다.
‘자, 그럼 시신은 일단 찾은 것 같고.’
이것만으로는 아리에타 백작의 죄라는 걸 밝혀 낼 수 없으니, 그가 셀레나를 죽이고 강탈했다는 증거를 비롯해 관련 자료들도 전부 찾아야 할 텐데.
그런 자료를 아무 곳에나 뒀을 리도 없고,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괜한 경계만 잔뜩 살 것이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흐음.”
한동안 고민한 끝에,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반짝 불이 켜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은 궁지에 몰릴수록 깊이 사고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 특히 죄를 저지른 사람일수록 말이야.’
예전에 오블렌 저택에서 보았던, 자신을 ‘최고의 탐정’이라고 자칭하던 유령의 말.
그 말과 함께 여러 가지 생각들이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며 이리저리 맞추어졌다.
“흐흐.”
그 기억을 토대로 계획을 대강 구상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품에 안겨 있던 릭이 잘게 어깨를 떨었다.
<와, 악당 같은 웃음.>
“시끄러워.”
나는 릭의 놀림을 짤막하게 일축했다.
그나저나 저택으로 돌아가면 기사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일 핑계가 필요한데 말이지.
“아, 그게 있었지.”
아침에 미나가 내 머리를 묶어 주는 데 사용했던 분홍색 리본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한 손을 뒤로 뻗어 머리카락을 얌전히 고정하고 있던 리본을 풀어 냈다.
산발이 된 머리를 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적당한 나무를 발견하고는 그 가지에 리본을 묶어 두었다.
오블렌 저택에서 나무를 타던 경험이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음, 붕대로 감아 놓은 것 같군.’
미나가 묶어 주었던 것처럼 예쁜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단단히 묶어 둔 덕에 바람에 풀어질 일은 없어 보였다.
‘리본을 잃어버렸다고 하고 호위들을 데리고 오면 되겠다.’
바람에 날아갔던 게 우연히 저기 엉킨 것 같다고 둘러대면 문제없겠지?
만족스러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참이었다. 불현듯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까?”
“이미 죽여 놓고 뭘 이제 와서 ‘괜찮을까?’야. 발 빼긴 글렀으니 증거라도 확실하게 처리해야지.”
“서둘러. 에버딘 기사들이 시내를 헤집고 다니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빠져나간다.”
“끝까지 귀찮게 구네, 그 계집.”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나는 일순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었다가, 옆에서 흉흉한 기운이 일렁이는 것을 느끼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개새끼들이…….>
내 곁에 있던 셀레나가 이를 뿌득 갈며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주위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넘실거리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셀레나, 안 돼요!”
나는 간신히 주저앉지 않고 셀레나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그녀는 내 소리 죽인 외침에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다시 몸부림쳤다.
<이거 놔! 저 새끼들을……!>
“어차피 당신은 지금 저 사람들 못 죽여요! 그러니까……!”
크르르.
그때 등 뒤에서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렸다. 셀레나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
“……환장하겠네.”
나도 모르게 잇새로 중얼거림이 튀어 나갔다.
이게 바로 책으로만 배웠던 ‘진퇴양난’이라는 상황인가?
등 뒤쪽, 무성한 풀숲 사이로 거대한 몸집의 검은 늑대가 이를 드러낸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주춤거리며 뒷걸음치다가 말고 또다시 들려오는 인기척에 발을 멈춰야 했다.
하하. 앞은 늑대, 뒤는 살인범들이라니.
천방지축 우당퉁탕 테레지아 에버딘의 인생,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내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늑대와 살인범들은 착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떡하지. 앞? 뒤? 아니, 앞? 아니, 뒤?
<테리, 물러서. 얼른!>
그리고 굳어 있던 셀레나가 뒤늦게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순간, 늑대가 날렵하게 뛰어올랐다.
엄마! 죄송해요! 조금만 일찍 만나러 갈게요!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예상했던 고통은 닥치지 않았다.
할짝-
“응?”
무언가 축축한 소리가 들렸다. 놀라 눈을 반짝 뜨자 보인 것은…….
<이, 이, 이 미친 늑대가!>
내 품에 안긴 릭의 얼굴을 열렬히 핥으며 꼬리를 붕붕 흔드는 늑대였다.
“엥.”
나는 순간적으로 얼이 빠져 눈을 깜박였다.
그사이 이미 늑대의 침으로 흥건해진 릭이 질색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테, 윽. 테리! 뭐 하고 있습니까! 좀 말려 줘요!>
미안하지만 늑대 말은 할 줄 몰라…… 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 가정에 빠르게 입을 열었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릭, 내가 진짜 많이 사랑해. 알지? 진짜야.”
<……무, 뭐, 무, 무슨.>
작은 속삭임을 들은 릭이 늑대를 밀어내던 것도 잊고 버벅댔다.
나는 그의 반응을 신경 쓸 새도 없이 늑대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품에 안고 있던 릭을 한 손으로 들어 흔들었다.
“우리 멍멍이. 얘야? 얘가 좋아?”
“컹!”
<아니, 잠깐, 지금 당신.>
“그럼 이거 너 가져!”
<야!>
릭은 끝내 고상한 태도마저 내려놓고 빼액 소리를 질렀다.
미안, 릭. 나는 속으로 작게 사과하며 그를 던지듯 늑대의 품에 안겨 주었다.
정확히는 혓바닥을 길게 빼 물고 있는 입에.
“헥헥.”
늑대는 내가 릭을 안겨 주자 신이 나서 그를 물고 핥고 빨았다.
나는 늑대가 릭을 물어뜯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얼른 그 뒤로 숨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풀숲 너머로 사람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 찾았…… 응?”
“헉.”
크르르르르.
행복하게 릭의 머리통을 입에 물고 있던 늑대가 대번에 눈을 치켜뜨며 몸을 일으켰다.
숲을 꽤 헤매다가 온 듯, 짜증스럽게 입을 열던 사람들은 검고 커다란 늑대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들 중 가장 키가 큰 사내가 손만 뒤로 뻗어 동료를 툭 쳤다.
“아이 씨, 너, 너 검 있냐?”
“미쳤냐, 이런 잡일 하는 데 그걸 들고 오게.”
“젠장. 공작이 주기적으로 토벌한다더니 다 구라였어. 삽도 한 자루뿐인데, 이걸로 저 큰 놈을 어떻게…….”
“컹!”
바로 그때, 늑대가 숲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울더니 릭을 내팽개치고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이, 이, 일단 피해! 피해!”
그들은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기겁하며 달아났다.
나는 늑대가 그들을 쫓는 사이, 침과 흙 범벅이 되어 바닥에 나동그라진 릭의 뒤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릭은 바닥에 머리를 기댄 채 내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열없이 중얼거렸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