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6) (16/124)

<16화>

「상업지구?」

“네!”

「거긴 갑자기 왜?」

공작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놀러 가려고요!”라고 대답했겠지만…….

계획이 조금 바뀌어서 말이지요.

나는 곧장 양손을 배꼽 위로 다소곳이 모았다. 그리고 더없이 의연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자고로 한 가문의 후계자라면 응당 영지민들의 실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훌륭한 후계자가 될 거니까요.”

“……음?”

“……네?”

공작과 미나가 순간 당황했는지 종이와 펜을 집어 드는 것조차 잊고 제각기 의아한 신음을 흘리는 것이 들렸다.

그래, 나도 안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수업이고 뭐고 열의를 보이지 않던 아이가 갑자기 이러니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나는 자작에게서 오블렌 영지를 통째로 빼앗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에버딘 공작가의 이름이 꼭 필요했다.

‘자작령이 내 거, 자작령이 내 거.’

볼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속으로 그리 되뇌며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한 척 꿋꿋이 얌전한 태도를 유지했다.

나는 부끄럽지 않다, 나는 부끄럽지 않, 크윽.

다행히 공작은 내가 수치에 함몰되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 마음 가는 대로 하렴.」

“감사합니다!”

「다만 혼자는 안 돼. 미나와 호위 기사 두 사람을 대동하고 가거라.」

그리 적힌 종이를 내미는 공작의 얼굴은 전에 없이 단호했다. 이 문제에서만큼은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마음이 엿보였다.

스읍. 그러면 또 저 세 사람을 따돌릴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군.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좋아요!”

* * *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후, 공작은 나를 안아 든 채 기사단 숙소로 향했다.

“혼자 걸을 수 있는데…….”

당연하다는 듯 팔을 벌리는 공작의 모습에 당황해 그리 어물거리자, 공작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결국 눈싸움에서 패배한 나는 얌전히 그의 팔에 앉아 기사단으로 이동하는 –이동되는- 중이었다.

“너무 가벼운데.”

공작은 기사단 숙소의 입구에 들어서던 중 짧게 중얼거렸다.

제 딴에는 내게 들리지 않을 거라 여기고 하는 말이겠지만 애석하게도 가까이 있었던 탓에 더 잘 들렸다.

‘내가 뭐가 가볍다고.’

키는 좀 작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무겁지 않나.

나는 옷소매에 가려진 손목을 흘깃 일별하고는 입을 삐죽였다.

“주군?”

공작가 기사단의 실내 연무장. 공작은 그곳에 도착해서야 나를 땅에 내려놓았다.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개중에는 놀라 목검을 떨어트리는 기사도 있었다. 저런.

그때였다. 돌연 파드득 어깨를 떤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제대로 해라! 조금이라도 틈이 보여서는 안 돼!”

“거기! 간격 맞춰!”

뭘 하는 걸까, 싶어 고개를 기울이고 바라보다가 무의식중에 입이 벌어졌다.

……저게 뭐람.

“……뭐 하나?”

어이가 없는 것은 공작도 마찬가지인지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수많은 기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 탓에 공작과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한 사람뿐인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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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단장, 미하일 서즈튼이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였다.

“예, 주군! 저번의 일을 교훈 삼아, 아가씨가 방문하셨을 때를 대비해 미리 연습해 두었습니다!”

“나는 그러니까 왜, 라고 물은 것 같은데.”

“앗. 저, 저희는 아가씨께서 이런 몰골의 사람이 여럿 몰려 있으면 두려워하실 것 같아서…….”

단장은 그제야 공작과 내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았는지 횡설수설했다.

그의 뒤로 도열해 있는 기사들이 우리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저마다 머리와 손을 움찔거리자 말끔했던 줄은 금세 흐트러졌다.

‘저러니까 더 이상한데?’

나는 흡사 단체로 춤이라도 추는 것 같은 기사들의 모습에 찰나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 웃어 버렸다.

저게 다 내가 자신들을 무서워할까 봐 나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간질거렸다.

“안녕하세요!”

나는 푸슬푸슬 웃는 얼굴로 일부러 평소보다 더 씩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배꼽 위에 양손을 모아 얹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테레지아…… 에버딘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이름을 내뱉고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에버딘이라는 성을 발음한 뒤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테레지아 에버딘, 테레지아 에버딘.

썩 나쁜 어감은 아니었다. 부끄러움인지 뭔지 모를 마음으로 볼이 미미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다들 왜 이렇게 조용하담?

나는 의아해져 슬쩍 몸을 바로 했다.

그러자 내 옆에 서 있던 공작도, 앞에 쪼로록 늘어져 있던 기사들도.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혼자 너무 앞서갔나?’

역시 건방졌나? 지나치게 열정적인 태도였나?

헉, 혹시 공작가의 위세를 빌려서 자작령을 꿀꺽하겠다는 계획을 눈치채고 이러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불안으로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기사들은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더니 허겁지겁 내 앞으로 몰려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는 둥 야단을 떨었다.

“안녕하십니까, 테레지아 아가씨! 저는 부단장 레딘 아르볼트……!”

“부단장님, 아가씨께는 저희 목소리가 안 들리잖습니까.”

“아 참, 그렇지. 종이, 내 종이 어디 갔지?”

“펜! 누가 펜 좀 찾아 줘!”

“그거 내 건데!”

틈 없이 와르르 쏟아지는 말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다행히 눈이 핑그르르 돌아가기 전에 공작이 내 앞을 가로막고 으름장을 놓았다.

“애 놀라면 어쩌려고. 조용히들 해.”

“헙.”

수십의 기사들이 동시에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그쳤다. 그제야 주변이 고요해졌다.

작게 한숨을 쉰 공작이 뒤늦게 이곳에 방문한 용건을 꺼내 들었다.

“내일 테리가 상업지구에 나가 보겠다고 하는데, 호위 둘을 붙여 주려고 한다. 자원할 사람 있나.”

내심 궁금해서 공작의 뒤에서 얼굴을 반쪽만 내밀고 기사들을 흘긋 훔쳐봤다.

그러자 모든 기사의 손이 허공으로 번뜩 치솟았다.

“저요, 제가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를!”

“아가씨의 목마가 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아, 아니. 목마 같은 거 필요 없는데.

혼란을 잠재운 것은 공작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겠다며 혀를 차더니 곧장 손을 뻗어 두 사람을 지목했다.

“미하일, 레딘. 두 사람이 다녀와라. 단장과 부단장이 부재하게 되니 내일 오후 훈련은 내가 맡는다.”

“안 돼!”

단장과 부단장을 제외한 기사들에게서 절망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희낙락한 얼굴의 미하일, 레딘은 제각기 손에 종이를 쥐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단장인 미하일 서즈튼입니다. 성심으로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부단장 레딘 아르볼트입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테레지아, 어이쿠, 에버딘이, 아휴, 에요…….”

나는 그들의 뒤편에서 네 발로 바닥을 다그닥 다그닥 기어 다니며 이히힝 울부짖는 기사들에게 정신이 팔려 띄엄띄엄 화답해 주었다.

그런 인사에도 미하일과 레딘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뭐야, 여기 역시 이상해.

* * *

다음 날 오후.

나는 오전 수업을 마친 후 미하일과 레딘, 미나와 함께 에버딘 저택을 나섰다.

사실 릭과 셀레나도 함께였지만, 저 사람들은 그걸 모르겠지.

‘너 이 새끼 목 딱 닦고 기다려라. 아주 채를 썰어서…….’

오전 내내 가네스 남작의 목을 조르려는 셀레나를 말리느라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피곤한 기분이 되어 저택의 문을 나섰다.

다행히도 그 기분은 사람들로 복작이는 거리를 보자마자 다시 피어났다.

‘사람이다!’

나는 사람, 더 정확히는 산 사람들의 기척에 활짝 웃음 지었다.

오블렌 저택에 있을 때도 저택 밖을 나가 본 적은 많지 않았던 터라, 이렇듯 사람이 많은 곳에 나서면 언제나 기분이 들떴다. 나도 모르게 미나의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빨리 가요, 빨리!”

미나는 어딘지 심란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그녀가 머리에 얹고 있던 작은 모자가 가벼이 흔들렸다.

‘피곤한가?’

어딘지 미묘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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