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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5) (15/124)

<15화>

그러자 내 눈치를 보던 셀레나가 황급히 덧붙였다.

<만약 네가 나를 도와주면, 다른 유령들이 너한테 들러붙지 못하도록 지켜주겠다고 약속해. 죽은 자들의 땅에 걸고 맹세할게.>

뭐라고?

그 말에 입이 딱 다물렸다. 그와 대조되게 눈은 놀란 심정을 대변하듯 동그랗게 커졌다.

죽은 자들의 땅.

가는 방법도, 갈 수 있는 조건도 불명인 땅.

마침내 안식을 찾고 다음 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마지막 집’.

유령이 그곳에 대고 한 맹세는 돌이킬 수 없다.

죽은 자들의 땅을 다스리는 왕, 하데스에게 신벌을 받아 소멸하게 된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 말이 언제, 어디서부터 퍼져나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오블렌 저택의 유령들이 하는 말을 들었을 뿐이고.

하지만 죽은 자들의 땅이라는 이름의 무게는 그만큼 무거웠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셀레나를 살폈다. 그녀는 뚜렷한 인간의 형상을 유지한 채로 이 저택의 어느 유령보다도 강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저런 조건이라면…….’

완전 괜찮잖아?

* * *

<내가 죽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위에서 흙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으니까, 아마 내 시체는 에버딘령 내에 있을 거야.>

셀레나는 내가 그녀와의 거래를 승낙한 후 자신이 죽었을 당시의 기억을 최대한 끌어내어 말해 주었다.

나는 가네스 남작이 숙제를 위해 두고 간 교본을 뒤적거려 에버딘령의 전도가 그려져 있는 책을 찾아냈다.

“어디 보자.”

침대에 배를 대고 엎드리며 책을 펼쳤다. 그러자 릭과 셀레나가 각각 내 양옆으로 와 비슷한 자세로 엎드렸다.

<곰돌아, 그렇게 작아서는 책이 보이긴 하니? 내가 들어 줄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그리고 헛소리 작작 하고 지도나 보십시오.>

<사납기로는 나보다 네가 더하다, 얘.>

셀레나가 장난스럽게 꺼낸 말을 릭이 곧장 쳐냈다. 그녀는 입을 비죽이고는 나를 따라 책을 들여다보았다.

어제 이후로 둘은 계속 저 상태였다. 셀레나는 내 목표를 바꿔 준 릭을 퍽 기껍게 여겼지만, 릭은 셀레나를 포함한 모든 유령을 질색했다. 귀찮다나 뭐라나.

‘자기도 유령이면서 내외하긴.’

천재인데 섬세하고 까탈스럽기까지 한 곰돌이 같으니.

하지만 또 곰돌이라고 하면 싫어할 테니까 이 말은 속으로만 해야지.

“아, 그런데 말이야.”

지도에 표시된 에버딘 저택을 바라보다가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릭을 돌아보며 심각하게 물었다.

“공작은…… 아리에타 백작 같은 사람들이 공작가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칩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보고서만 보잖아.”

눈치가 영 없는 건 아닌 것 같긴 했는데…….

일전에 공작가의 위세로 자작령을 사자는 의견을 낸 것도 그렇고, 이런 방면에서 내 생각보다 릭의 생각이 정확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질문을 던진 것인데, 의외로 릭이 내놓은 답은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간 보아 온 모습으로 생각하면, 모르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만?”

<저주 때문에 대외적인 활동을 가신들에게 맡겨 놓은 상황인데, 그들을 쳐내면 당장 제대로 영지를 돌볼 방법이 없습니다. 새로 관리인을 임명하는 과정에도 대리인이 필요하니…….>

“아, 그렇구나.”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당장 눈앞의 문제뿐이 아닌, 그 이후의 상황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가볍게 감탄했다.

아무래도 가신들을 쳐내고 나면, 그 이후에 정상적으로 영지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겠군.

하지만 지금은 ‘사람’인 내가 있으니 문제없음이다!

‘후후. 기다려라, 자작.’

셀레나의 말에 따르면 가신들이 그간 횡령했던 돈이 작은 영지 하나는 거뜬히 살 수 있을 정도랬으니까, 오블렌 자작이 땅을 치고 우는 모습도 곧 볼 수 있겠군.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을 뽑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 완전히 썩은 가신들만 쳐내고 나머지는 살릴 수 있을지 봐야 했다.

그나저나 완전히는 아니어도 비슷하게 추론했잖아? 역시 난 천재라니까.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머리를 휘휘 저어 상념을 털어 내고는 책장을 넘겼다.

일단 셀레나의 시신을 찾는 게 먼저!

“흙, 흙이라. 이 근처에서 제일 가능성이 큰 곳이…….”

지도 위로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다가 이내 한 곳에서 손을 멈췄다. 릭과 셀레나의 시선도 한 곳에 못 박혔다.

에버딘 저택을 중심으로 둥글게 퍼져 있는 상업지구.

그 곁에 작은 글씨로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라고 적혀 있는 숲이 하나 있었다.

“출입 금지?”

민간인 출입 금지라니. 대체 왜?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미나가 들어왔다.

릭은 곧장 팔에서 힘을 풀며 실 끊어진 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애쓴다…….’

미나는 내 모습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후후 웃었다.

「저녁 드세요, 아가씨. 곰돌이 친구랑 같이 공부하고 계셨나 보네요.」

<……이젠 저 사람까지.>

‘곰돌이’라는 말에 또다시 발끈했던 릭은 이내 아이고, 하이고 하는 한숨을 내뱉으며 체념했다.

나는 눈짓으로 셀레나에게 이곳에 있으라는 신호를 보낸 후, 릭을 껴안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요, 미나.”

「네, 말씀하세요, 아가씨.」

“시내 옆쪽에 있는 숲에는 왜 들어가면 안 돼요? 민간인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던데.”

그러자 미나는 더없이 상냥하게, 하지만 사람의 말문을 틀어막는 미소를 지으며 답을 돌려주었다.

「공작님께서 기사단과 함께 주기적으로 토벌을 하시는데도 이따금 맹수가 나오는 숲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두셨지요. 호기심이 일더라도 절대, 절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아, 그랬구나. 알려 줘서 고마워요, 미나.”

「별말씀을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꼬리를 늘이며 답했다. 그러나 웃는 얼굴과 달리 머릿속은 답답한 상태였다.

‘씁. 곤란하네.’

미나가 모르게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셀레나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면 숲에 한 번은 가 보아야 할 것 같은데, 민간인은 출입을 금지한다니. 이걸 어찌해야 하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는 사이 식당 앞에 도착했다.

미나가 열어 준 문 사이로 머리를 쏙 들이밀자 미리 식탁 앞에 앉아 있던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저녁이에요, 공작님!”

「좋은 저녁, 테리.」

공작은 반듯한 글씨로 답했다.

그의 맞은편에 가서 앉자 어쩐지 저번보다 한결 큰 크기의 후추통과 여러 음식이 차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따뜻하고 정갈해 보이는 소박한 식사. 공작과 나는 오델리아 신에게 짤막한 감사 인사를 드린 후 스푼을 쥐었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녹진한 흰 빵과 양송이 수프, 촉촉하게 구운 치킨 스테이크, 레몬 드레싱이 뿌려진 샐러드였다.

아우, 셔. 건강한 맛이군.

나는 입안에서 느껴지는 상큼한 레몬 향에 부르르 떨다가 샐러드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공작은 막 치킨 스테이크를 써는 중이었다.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마음을 굳히고는 슬그머니 운을 띄웠다.

“공작님. 있죠…….”

그때 공작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의 접시에 놓인 치킨 스테이크는 일정한 크기로 썰려 있었다.

그는 그 접시를 내 앞에 놓인,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스테이크 접시와 바꿔 놓고서 펜을 들었다.

「그래. 왜 그러니.」

“어…….”

나는 하려던 말조차 잊고 내 접시와 그의 접시를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그러자 그가 덤덤히 답했다.

「명색이 부모인데 달리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어 미안하구나. 이런 것이라도 하게 해 주렴.」

“어, 그으.”

「물론 부담스럽다면 편하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이것 또한 진심이야.」

“아아뇨, 괜찮아요…….”

또다, 이 기분.

어김없이 술렁이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치킨 스테이크를 입안 가득 우물거렸다.

공작은 나를 잠시 지켜보더니 내가 고기를 목으로 넘기고 나서야 펜을 들었다.

「그래서 하려던 말은 뭐니, 테리?」

“아, 그거요.”

그 물음을 듣고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나는 미나가 건네준 물로 입안을 가볍게 헹구고 활짝 웃었다.

“저 상업지구에 가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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