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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4) (14/124)

<14화>

* * *

<내 이름은 셀레나야.>

악령에 가까운 여자 유령. 셀레나는 뜻밖에도 차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나는 원래 아리에타 백작의 밑에서 일하던 행정관이었어.>

‘아리에타 백작…….’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다. 에버딘 공작가의 가신 중 가장 오래된 가문이 아리에타 백작가라고 세바스찬이 말했었지.

나를 중심으로 침대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유령들 사이에서 그녀가 털어놓은 사실은 퍽 충격적이었다.

<에버딘 공작가의 사정은 현재 굉장히 좋지 않지. 그래도 본래라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야 해. 공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광산의 수가 꽤 되니까.>

그 말에 유난히 조촐해 보이던 식단, 미나가 입은 하녀복에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던 기운 자국, 견장과 장식이 다 떨어진 기사들의 제복 등이 떠올라 조금 의아해졌다.

셀레나는 내 의문에 답하듯 말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아리에타 백작이 관리하는 백금 광산의 규모가 가장 커. 공작가에서는 채굴량이 점점 줄다가 2년 전부터는 아예 바닥을 보인다고 알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

“……설마.”

<그래. 그건 다 거짓말이야. 채굴량이 바닥을 보이기는커녕 아직 넉넉하다고 해도 될 정도니까.>

“허.”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입 밖으로 헛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황제의 심술 때문에 안 그래도 억울할 사람들한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드나? 더군다나 그게 자기가 충성을 맹세한 주인인데?

자작 일가의 심술 때문에 오블렌 저택에서 열심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찾아 헤매던 시절을 떠올리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채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똥물에 절여서 빨랫방망이로 두들겨 펼쳐도 모자란 놈…….”

셀레나는 내 말에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더니 –아니, 왜?- 이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이를 빠득 갈았다.

<아무리 봐도 장부가 이상한 것 같아서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그걸 가네스 남작한테 들켰지 뭐야. 그는 아리에타 백작의 수하 같은 존재라서, 곧장 백작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나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셀레나는 분노 어린 숨을 고르더니 음울하게 말을 맺었다.

<죽었지.>

“…….”

나를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유령들은 잠시 숙연해져 입을 다물었다.

셀레나는 곧 고개를 휘휘 젓고는 얼굴에 어려 있던 침울함을 털어 버렸다. 그녀는 곧이어 퍽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부탁할게. 내 시체를 찾아서 아리에타 백작에게 복수하는 걸 도와줘. 그렇게 되면 공작가의 재정 상태도 지금보다 나아질 테니, 후계자인 네가 손해 보는 일은 아니잖아.>

그래, 결국엔 이렇게 되는구나.

나는 심란한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손가락을 두 개 폈다.

“안타깝지만 나는 두 가지 때문에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요. 우선, 누군가를 죽여 달라는 부탁은 애초에 나한테 논외라는 점. 그리고 둘.”

손가락 너머의 셀레나와 시선을 맞추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곧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까 이 거래는 나한테 이익이 될 수 없어요.”

만약 여기서 내가 셀레나의 부탁을 받아들였다가는, 에버딘 저택의 다른 유령들 또한 거래를 빙자해 내게 제 한을 풀어 달라 벌떼처럼 몰려들 것이 뻔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척하며 공작가에서 쫓겨나려 했던 계획에 지대한 차질이 생기게 된다. 그럴 순 없었다.

<그런…….>

셀레나는 거절의 말을 듣고는 실망스럽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심상찮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나는 그녀의 기운에 눌리지 않기 위해 배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떴다.

처음에 팔을 붙들렸을 때야 예상치 못한 일에 놀라 굳었다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칼자루를 쥔 쪽은 나다, 이 말이야!

대화를 나누는 내내 의자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릭이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테리.>

“응?”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뭘 더 숨겨’라고 얼굴에 써 놓은 듯 보이는 릭이 자박자박 걸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유령들은 뒤집어졌다.

<히야아악!>

<미, 미, 미, 미친! 억울하게 죽은 곰의 유령이다!>

<유령 살려! 유령 살려!>

유령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비명을 지르거나 눈을 뒤집고 기절했다. 셀레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턱이 떨어질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쟤는 뭐야……? 뭔데 저 안에서 움직여……?>

그러거나 말거나 릭은 태연했다. 이내 멈춰선 그가 솜뭉치 같은 손으로 내 무릎을 툭툭 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당신, 그렇게까지 오블렌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응? 그야…….”

지금의 상황과는 약간 동떨어진 질문이었지만, 이것은 릭이 내게 내내 답을 구했던 질문이었다. 그래서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단추로 된 눈과 시선을 맞춘 채 조금 머뭇거리다가 작게 답했다.

“그야…… 내 편이 되어 줬던 사람들과의 흔적은 전부 거기에 있으니까.”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 주었던 엄마와의 추억과 초상화도, 엄마가 돌아가신 후 혼자가 된 나를 위로해 주고 곁에 있어 준 유령들도.

내게 소중한 것들은 전부 그 저택에 있었다.

그러니까…….

<정 그러면 공작가의 이름으로 자작령을 사들이면 되지 않습니까?>

“어?”

그 순간,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들렸다.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릭을 바라보았다.

릭은 곰 인형답지 않게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산 사람처럼 보여서 잠시 말을 잃은 사이, 그가 어딘가 익숙한 태도로 말을 늘어놓았다.

<지금이야 허울뿐인 공작가라지만, 본래대로라면 자작가의 사람들은 감히 공작가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오블렌 자작가의 재력이 유달리 뛰어나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야 그렇지……?”

<그러니 차라리 가신들의 죄를 밝히고, 그 일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을 초석으로 공작가를 일으켜 세우십시오. 그리고 오블렌 영지를 통째로 사들이는 겁니다. 공작가의 이름을 빌리면 자작가도 어쩔 수 없을 테지요.>

천잰데?

2. 테레지아 에버딘

천잰데?

나는 무의식중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나와 대조되게 릭은 어마어마한 말을 해 놓고도 태연히 리본을 가다듬을 뿐이었다.

쟤는 천재인가? 천재였던 것인가? 천재 곰돌이였던 거야?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릭이 제안한 방법은 무작정 저택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해결책이었다.

예전에 오블렌 저택에서 책을 통해 영지의 매매라던가 하는 것들을 배웠던 기억은 났으나, 그것을 이런 식으로 ‘권력’과 엮어서 응용할 수 있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나는 평생 권력 같은 거랑 연이 없을 줄 알았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허울뿐이나마 에버딘 ‘공녀’라고 불리는 위치에 있었다.

공작가의 위세를 이용해서 엄마와의 흔적과 유령들이 남아 있는 저택도, 초상화도. 더불어 엄마의 무덤이 있는 오블렌령을 전부 사들이면, 그러면…….

다시는 자작에게 그 거지 같은 협박을 들을 일도 없다!

“너 4살밖에 안 됐는데 똑똑하구나…….”

<별말씀을.>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잇새로 감동 어린 목소리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릭은 어째서인지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로 말을 받았다.

‘혹시 기억을 잃기 전에 이런 일을 했던 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권력을 이용할 생각을 하는 것 보니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생각에 잠겨 릭을 바라보는데, 곁에서 입을 헤 벌린 채 우리의 대화를 듣던 셀레나가 반색하며 끼어들었다.

<곰 인형인지 유령인지, 너 말 잘했다!>

<……‘곰 인형’이 아니라 릭입니다만.>

<릭이건 빅이건, 아무튼! 굳이 백작을 죽여 주지 않아도 돼. 다만 내 죽음과 그의 죄를 밝혀 줘. 그러면 나도 굳이 사람들을 해쳐 악령이 될 필요가 없고, 그는 영지 법에 따라 저절로 사형이 확정될 테니까.>

셀레나는 이것이 꽤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는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동조하지 않고 눈만 가늘게 떴다.

내가 걱정하는 건 이번뿐 아니라 앞으로 유령들에게 시달릴지도 모르는 내 미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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