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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3) (13/124)

<13화>

* * *

정말로 미련 한 점 남지 않은 얼굴을 하던 거지 유령은, 놀랍게도 이렇게 덧붙였다.

‘뭐, 그래도 저 인형도 그렇고 네 비밀은 지켜 주마. 내가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해서 그리 오래 갈 비밀은 아닌 것 같다만. 넌 지켜보고 있으면 재밌을 것 같으니까.’

그는 킬킬 웃으며 내 머리를 엉망으로 쓰다듬고는 휘적휘적 방을 나가 버렸다.

릭을 보고 뭔가 중얼댄 것도 그렇고, 눈동자에 릭인 듯 보였던 소년의 그림자가 비쳤던 것도 그렇고.

예사 유령은 아닌 듯한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네.

아무튼, 나는 그 뒤로 도끼눈을 뜬 채 거지 유령과 다른 유령들의 동태를 주시했다. 그는 딱히 신뢰가 갈 법한 인상의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거지 유령은 언제나 그랬듯 저택의 이곳저곳에서 늘어져라 잠을 청할 뿐이었다.

그렇게 약 하루 간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끝내 인정했다.

저 유령은 정말로 나와 릭의 비밀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왜? 대체 왜지? 유령이 저럴 수도 있나?’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생각에 잠겼다.

거지 유령은 지금껏 내가 보아 온 그 어떤 유령보다도 유령답지 않았다.

본디 유령이란 어쩔 수 없이 삶을 갈망하는 존재다.

그런데 유령을 볼 수 있는 산 사람인 내가, 먼저 미련을 해소해 주겠다고 손을 내밀었는데도 필요 없다며 거절하는 경우는 정말, 내 기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상해…….’

설마 이게 책에서 봤던 ‘난 괜찮아’ 전술인가?

초연한 웃음을 띠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음으로써 상대방의 피를 말린다는 그……!

“아가씨, 집중하시지요.”

“앗, 넵.”

그때 돌연 불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눈을 깜박이고 자세를 바로 했다.

“크흠흠. 그럼 이어서 하겠습니다. 본디 에버딘 영지의 특산품이 무엇인지…….”

“몰라요!”

“……예에, 모르시겠지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바닥이 보인다지만, 본디 에버딘 영지의 특산품은 보석과 공예품이었습니다. 에버딘 가문의 상징이기도 한 흰가지나무를 본떠 만든 머리 장식이 특히 유명했지요.”

내 오전 교육을 담당하게 된 가네스 남작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체념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 갔다.

나는 그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늘어놓는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거기에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로는 그가 설명하는 것과 동떨어진 페이지를 보란 듯 팔락팔락 넘겼다.

“……그으래서…….”

남작은 예상대로 못마땅한 티를 풀풀 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반응이 좀 덜하네.’

쳇, 이것도 벌써 익숙해졌나.

남작이 보지 못하도록 손으로 얼굴을 교묘히 가린 채 입술을 비죽였다.

‘앞으로 아가씨의 오전 교육을 담당하게 된 빌리엄 가네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 오전 교육, 그러니까 에버딘 영지에 관한 수업을 맡은 빌리엄 가네스 남작은 에버딘 저택의 사람들처럼 저주를 받지도 않은, 굴리면 굴러갈 것 같은 동글동글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에버딘 가문의 가신이라는 그를 처음 소개받은 어제 오전.

나는 거지 유령의 동태를 살피느라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신경이 완전히 다른 곳에 쏠린 상태였다.

‘아가씨.’

‘네에.’

‘……제 말 듣고 계십니까?’

‘네에.’

‘제가 싫으십니까?’

‘네에.’

‘…….’

‘……핫.’

창밖을 힐끔거리며 거지 유령을 찾다가 갑자기 찾아든 침묵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진 얼굴의 가네스 남작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더니 의미심장한 눈으로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크흠. 오늘은 첫날이니 여기까지만 하지요.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일부러 말을 끊어 가며 강세를 주는 것을 보아 ‘내일은 달라져 있어야 할 것이다’라는 의미인 듯 보였다.

그는 방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그 틈새로 나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잖아?’

어제는 정말 의도하지 않았다지만, 그가 돌아간 후 생각해 보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이대로 남작이 나의 산만함과 멍청함을 공작에게 읍소해 준다면 나야 좋은 일이지.

힘내요, 남작 아저씨!

“……여기까지입니다.”

그때 남작이 심기 불편한 목소리를 내며 책을 덮었다.

나는 언제 딴청을 피웠냐는 듯 순식간에 책을 덮고는 활짝 웃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은 오늘 배운 것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계시는지 확인할 겁니다. 결과는 공작님께 전달 드릴 것이니 반드시 복습해 두십시오.”

“네!”

물론 안 할 거지만! 속으로만 그렇게 대답하며 환히 미소 지었다.

가네스 남작은 이젠 내가 웃는 모습만 봐도 싫은지 어깨를 부르르 떨고는 빠르게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오……. 내가 친한 척을 하면 할수록 싫어하나 본데?’

그렇다면 못된 어린이 테레지아 오블렌. 제가 또 가만히 있을 수 없죠.

그 생각이 들자마자 얼른 의자에서 내려와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자 곧 저택 앞에서 세바스찬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가네스 남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행여 남작이 마차에 올라탈까 봐 까치발을 들고 창문을 열어젖혔다.

숨을 깊게 들이켜고, 이어 커다랗게 목소리를 내려던 참이었다.

“……!”

갑자기 옆쪽에서 흉흉한 기운이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꿀꺽 삼키며 고개를 홱 돌렸다.

옆 방 발코니 난간에, 낯선 여자 유령이 걸터앉아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입이 절로 벌어졌다.

‘저, 저……!’

맞지! 릭이 말했던 그 악령! 아니, 악령에 가까운 유령!

키는 미나보다 조금 작고, 스물 초반으로 보이며, 무엇보다도 보통의 유령보다도 훨씬 강하게 느껴지는 흉흉한 기운.

그녀는 릭이 말했던 ‘악령에 가까운 유령’이 확실했다.

‘그런데 어딜 보는 거지?’

입을 벙긋거리던 것을 멈추고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엥?’

가네스 남작이 서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며 남작과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자는 아직 내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이를 빠득 갈며 살기등등하게 가네스 남작을 노려보았다.

<……죽여 버릴 거야.>

어, 음.

저건 좀 많이…… 무섭네요.

한순간 허공을 찢어발기듯 솟아오른 여자의 살기에 찔끔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 기척을 느낀 것인지 흠칫한 여자가 막을 새도 없이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 눈 마주쳤다.

“…….”

<…….>

“…….”

<너…….>

“와, 와아아! 세바스차안…… 할아버지이!”

일단 피하자.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저 멀리 있는 세바스찬에게 손을 붕붕 흔들었다.

“……할아버지?”

놀란 세바스찬이 입 모양으로 그리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곁에서 기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가네스 남작에게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세바스찬 할아버지! 저 수업 끝났으니까 저랑 놀아 주세요! 선생님도 안녕히 가세요! 숙제 잘…… 해 놓을…… 게요!”

아, 입꼬리 떨려. 마음에 없는 말을 하려니 힘들군.

나는 어딘지 멍한 얼굴의 세바스찬, 조금 전보다 한결 더 괴상해진 표정의 가네스 남작, 그리고 희한한 것을 보듯 나를 보는 여자 유령을 피해 뒷걸음질 치며 창문을 쾅 닫아 버렸다.

“후유.”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조금 창피하긴 하지만 어떻게 잘 넘긴 것 같군.

<얘.>

“으어엄마아아!”

직후 귓가에 들린 속삭임에 나는 문자 그대로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치는 내 팔을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붙들었다. 허공으로 기울어질 뻔했던 몸이 그대로 정지했다.

<……역시 만져지네. 어쩐지 네가 저택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다른 유령의 몸을 통과하는 걸 못 봤다 했어.>

그 말에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혹시라도 유령들과 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늘 경로가 겹치지 않게 돌아다녔는데 그걸 알아보다니. 대체 뭐 하는 유령이야?

여자의 어깨 너머로, 수업을 들을 때부터 이곳에 있었던 몇몇 유령이 하나둘 차례로 턱을 떨어트리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내 눈앞으로 제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웃었다.

<너, 우리가 보이는구나?>

……이쯤 되니 거지 유령의 살아생전 본업이 점쟁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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