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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2) (12/124)

<12화>

<……가장 최근에 들은 말로는 동쪽 별채에서 보았다더군요. 아니, 그보다 그 말투는 또 뭡니까?>

릭은 이제 포기한 듯 선선히 답했다.

좋아, 좋은 태도야. 나는 만족스럽게 투지를 다지며 동쪽 별채로 향했다.

에버딘 저택은 중앙의 본채와 그 옆으로 살짝 꺾여 있는 동쪽, 서쪽 별채가 전체적인 뼈대를 이루고 있는 구조였다.

그동안의 내 행동반경은 서쪽 별채 주변이었기 때문에 동쪽 별채는 처음이었다.

혹여 잠들지 않은 사용인과 마주칠까 조심하며 동쪽 별채로 들어섰다. 본채와 별다를 것 없이 이곳도 유령 소굴이었다.

주변을 유유히 떠다니는 유령들을 피해 동쪽 별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1층에도 없고, 2층에도 없고. 3층도 절반쯤 뒤졌으나 릭은 이곳에 없다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어디 숨은 거지.’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려는 유령이 숨을 만한 곳이라.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3층의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는 바로 그 고민 탓에, 모퉁이 너머로 튀어나온 그림자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콰당!

“아야야.”

<아이쿠.>

엉덩방아를 찧으며 거하게 넘어졌다. 그 바람에 내 품을 벗어난 릭 또한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아파! 반사적으로 얼얼한 코를 문지르다가 이내 벼락을 맞은 듯 굳어졌다.

‘잠깐, 나…….’

지금 누구랑 부딪힌 거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기름칠 안 한 문처럼 뻣뻣한 고개를 끼기긱 들어 올렸다.

“어?”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인영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얼떨떨한 목소리를 흘려 버렸다.

텁.

한 박자 늦게 코를 문지르던 손으로 입을 막아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유령, 거지 노인은 잠시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뒤늦게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끌어안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으아아…… 으붑!”

<조용히 해요! 이러다가 저택 사람들한테 들켜도 괜찮습니까?>

그의 비명에 놀라 벌어지던 내 입이 릭의 손 –솜뭉치– 으로 인해 막혔다.

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그런데 너 방금 움직이지 않았니?

<이, 이, 인형이이이.>

아니나 다를까, 릭을 손가락질하며 더듬대던 거지 유령은 이내 술병을 끌어안은 채 가련하게 눈을 휘릭 뒤집으며 기절해 버렸다.

* * *

나와 릭은 기절해 버린 거지 유령을 가운데 두고 우왕좌왕하다가 급한 대로 그의 발목을 부여잡고 근처의 비어 있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어차피 유령은 들어올 수 있지 않습니까?>

“일단 당장 근처에 다른 유령은 없던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사람이라도 막아야지.”

나는 그렇게 답하고는 방을 한 바퀴 돌며 혹여 숨어 있는 유령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릭은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더니 입을 헤 벌린 채 기절한 거지 유령의 코를 건드려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이대로 뒀다간 저택의 모든 유령이 당신이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텐데요.>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뭔가 억울해져서 그를 째릿 노려봤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네 탓이 더 크거든? 저 사람은 나를 보고는 놀란 거지만, 너를 보고는 기절한 거잖아.”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어떻게 할 거야! 너 때문이잖아! 애초에 같은 유령이면서 왜 다른 유령들 앞에서는 입을 닫고 있던 건데!”

<저도 이렇게 사물을 제 몸처럼 움직이는 유령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은 아니까요. 괜히 시달리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어떻게 할 겁니까?>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마…….”

<그러죠, 뭐.>

나는 거지 유령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은 채 머리를 싸맸다. 그리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걸 어쩐다.’

릭이 틈만 나면 내 협박을 무시했던 것처럼, 유령에게 어지간한 협박은 먹히지 않는다. 이미 죽어 없어진 몸인지라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어련할까.

그런 그들을 협박하거나 설득할 방법은 두 가지.

하나. 유령의 본래 몸, 그러니까 시체를 훼손하겠다고 위협하기.

……그러나 이건 도의상 꺼림칙하기도 하고, 당사자에게 원한을 살 가능성이 만만이었으므로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둘.

유령이 가진 ‘미련’을 매개로 거래하기.

“으으.”

이 방법은 되도록 쓰고 싶지 않았는데.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유령은 저마다 생에 대한 진득한 미련이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블렌 저택에서는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제 미련을 해결해 달라 우기는 유령들이 왕왕 있었다.

그때는 토미를 비롯한 몇몇 힘 센 유령이 나를 보호해 준 덕에 큰일은 나지 않았지만, 이곳은 나 혼자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으니 별수 있나.’

고민 끝에 한숨을 푹푹 삼키고는 손을 뻗어 거지 유령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이봐요, 아저씨. 일어나 봐요. 이러다가 해 뜨겠네.”

<으, 으으…….>

역시. 뺨을 때리는 건 소용이 없을지 몰라도 이 방법은 잘 먹힌다니까.

나는 그의 눈꺼풀이 움찔대기 시작할 즈음 손을 놓았다.

<이게 무슨…… 꺄아아악!>

파르르 경련하며 몸을 일으키던 유령은 나와 릭을 보자마자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그가 또다시 바닥에 벌렁 드러눕기 전에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옷소매를 잡아챘다.

<어, 어떻게……!>

그는 내가 제 옷소매를 쥔 것을 보고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나는 손을 놓으며 체념 어린 어조로 말했다.

“네에, 맞아요. 보이고, 들리고, 만질 수도 있어요.”

<그럴 리가 없는…….>

“있네요. 아무튼.”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뱉는 중얼거림을 빠르게 잘라 내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곧장 입을 열었다.

“당신의 미련은 뭔가요?”

<뭐?>

“미리 말해 두지만, 누구를 죽여 달라거나, 다치게 해 달라거나 하는 건 안 돼요. 대신 그것 말고는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요.”

<아니, 잠…….>

거지 유령이 무어라 입을 달싹였으나 일부러 그에게 틈을 주지 않고 다다다 말을 내뱉었다.

“그 대신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건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요. 이 곰 인형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 아, 내가 여기를 떠나고 나서는 뭐 상관없긴 한데.”

<지금 말 다 했습니까?>

릭이 곧장 발끈했으나 나는 애써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거지 유령과 시선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허? 아까는 내가 잘못 봤나 했는데. 이것 좀 봐라?>

거지 유령은 돌연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며 릭의 앞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릭은 움찔 뒤로 물러나려다가 거지 유령이 풍기는 묘한 기세에 압도된 것인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거지 유령은 눈을 이리저리 굴려 릭을 빤히 쳐다보더니 서늘한 비소를 지었다.

<감히 ……을 삿되게 이용했으니 자멸할 것은 뻔하군. 애꿎은 영혼 하나만 불쌍하게 됐어.>

그가 무어라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소리가 너무 작아 군데군데 잘 들리지 않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한편, 나는 묘한 안광이 서린 그의 눈동자에 무언가 아른거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소년의 그림자?’

저 앞에 있는 건 분명…….

‘릭?’

내가 의아함을 느끼던 순간, 거지 유령이 고개를 휘휘 젓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자세로 술병을 움켜쥔 –저 정도면 한 몸이 아닐까 싶은데–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그보다 여길 떠나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이 집안의 후계자로 온 것이잖느냐.>

“으음.”

뭐, 어차피 그의 미련을 해소해 주기 위해 함께 지내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알게 될 테니까.

“그건 맞는데, 곧 돌아갈 거예요.”

<왜?>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니까.”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말은 덤덤하게 흘러나왔다.

그 말에 문득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속으로 요 며칠 다소 해이해졌던 마음을 다잡고는 스스로 되뇌었다.

그래, 여긴 내 집이 아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토미와 유령들, 그리고 엄마의 흔적과 추억이 남아 있는 오블렌 저택이지 이곳이 아니니까.

‘마음 굳게 먹자.’

앞으로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풀어지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며 굳게 눈을 빛냈다.

<그런데 말이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거지 유령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난 미련이 없는데?>

“……네?”

저건 또 뭔 소리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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