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그건 산책하다가…… 아, 맞다.”
그의 물음에 잊고 있던 의문이 반짝 떠올랐다.
나는 최대한 순수한 표정을 짓도록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공작님, 후계자가 필요해서 절 데리고 오신 게 아니에요? 미나는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하던데…….”
그래, 그것이 의아했다.
분명 에버딘 공작가는 대외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영지를 돌볼 후계자가 필요해 나를 데려온 것이 아니었나?
하루라도 빨리 실전 업무에 투입하기 위해, 종일 수업을 듣게 할 법도 한데 수업을 듣지 않아도 괜찮다니.
“……그건.”
공작은 내 질문에 당황했는지 순간 말문이 막힌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그는 퍽 복잡한 얼굴이었다. 좁혀진 미간, 그와 대조되게 아래로 내려간 눈꼬리의 조합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왜 저 얼굴을 보니 벌써 미안해지는 기분이지. 아직 사고는 치지도 못했건만.
잠시간의 침묵 끝에, 공작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게 물었다.
「수업이 듣고 싶은 거니?」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아니었지만, 사고를 치려면 어느 정도 하는 일이 있어야 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너무너무 듣고 싶어요! 저 잘할 수 있어요!”
「……그러면 세바스찬에게 교육을 담당할 이들을 다시 불러들이라고 일러두도록 하마. 네 의사를 먼저 물었어야 했는데, 내 멋대로 결정해서 미안하구나.」
“그으…… 아, 아니에요…….”
그 꾸밈 없는 사과에, 나는 또 한 번 어색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애써야 했다.
분명 목적을 달성했으니 뿌듯해야 함이 옳은데, 왜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 * *
“…….”
발레리안은 테레지아가 집무실을 나선 후,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뭉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주인님, 아무래도…… 테레지아 아가씨께서는 저희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게 지내신 모양입니다.’
어젯밤.
평소라면 결코 그처럼 늦은 시간에 주인을 방해하지 않았을 세바스찬이 어두운 얼굴로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발레리안 또한 의심은 하고 있었다.
고작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유령을 보고 무서워하기보다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웃는 모습이 어디 흔하던가.
그런데 세바스찬과 미나의 말까지 전해 듣고 나니 더 가관이었다.
‘재조사를 지시해 놓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현재 여력으로는 정확한 보고를 받기까지 시간이 소요될 테니까요. 우선 지난번 조사 자료라도 가져와 봤습니다.’
세바스찬은 테레지아가 이곳에 오기 전, 오블렌 자작저에 대해 가볍게 조사한 내용이 적혀 있는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 두며 깊이 허리를 굽혔다.
세바스찬이 돌아간 후, 발레리안은 어두컴컴한 집무실에서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를 잃은 후 지난 몇 년간,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아이’인 적이 없었을 아이를.
에버딘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후계자’라는, 가장 아이다울 수 없는 자리에 내던져도 되는가?
‘……아니.’
답은 ‘아니다’였다.
그간 자신만 보면 공포에 질려 달달 떠는 사람들의 모습에, 발레리안은 대외적으로 영지를 돌보는 업무를 가신들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세월은 바위마저 짓이겨 놓는다고 하던가.
분명 충신이었을 가신들은 어느새 공작가로 전해져야 할 재산을 교묘히 빼돌리고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 보고를 전할 때야 무구한 태도를 보였다고 하나, 발레리안은 그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하나 그들마저 없으면 외부와의 소통 창구가 완전히 사라지는 탓에, 그간은 모른 척 묵인해 주었다지만…….
‘원래대로라면 후계자를 들이자마자 최대한 빠르게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발레리안은 한 손으로 머리를 헝클며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되면 주위에서 그 아이를 가만히 둘 리가 없으니…….’
당분간은.
적어도 한 달 정도는, 테레지아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발레리안의 생각이었다.
‘세바스찬, 가네스 남작에게 연락해. 당분간 수업은 보류이니 찾아오지 않아도 좋다고.’
* * *
나는 공작과의 만남에서 성공적으로 사고 칠 기회를 되찾고 릭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악령에 관해 아까 미처 듣지 못했던 답을 재촉했다.
<……알았으니 그 손 좀 놔 봐요.>
“싫어. 이대로 말해.”
<당신은 내가 곰 인형이라는 자각이 없는 겁니까? 목이 졸려 봤자 숨이 막히거나 하지 않는데요.>
영리한 자식. 나는 릭의 목에 매인 붉은 리본의 끝을 각각 양손으로 움켜쥐고 그를 노려보다가 쳇, 하고 혀를 차며 손을 놓았다.
둥그런 손으로 리본을 툭툭 가다듬은 릭이 입을 열었다.
<꽤 젊은 여자로 보였습니다. 키는…… 이쯤 되어 보였고. 나이는 스물 초반 즈음?>
릭은 뭉툭한 손을 들어 허공을 손짓해 보이며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이 미나의 키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높이인 것을 확인하고 물었다.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는? 무슨 특이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어?”
<사용인들을 열정적으로 괴롭히더군요. 계단을 내려갈 때 발을 걸려고 하던지, 높은 곳에서 물건을 떨어트리려고 하던지. 이곳의 사람들은 사실상 죽은 게 아니라 모습이 지워졌을 뿐인 산 사람이니까요.>
“……위험한데.”
<뭐가 말입니까?>
나는 릭의 질문을 무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죽어 ‘유령’이라는 존재가 되면, 십에 구 할은 살아생전의 성격에 ‘장난기’라는 특성이 더해진다.
이미 죽어서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몸이 되었음을 애통해하는 그들 나름의 한풀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 장난이 더는 ‘장난’이 아니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유령, 분명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심란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사용인들을 필사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강한 유령.
그 정도로 악착같이 인간을 괴롭히려 한다는 건 무언가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인간을 해치는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하루빨리 악령이 되고자 하는 것일 확률이 높았다.
악령이 되면 산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있고, 또 잘하면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
‘사용인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고.’
모습이 지워졌을 뿐, 여전히 살아 있는 에버딘 저택의 사람들.
한순간, 공작과 세바스찬, 미나, 기사들을 비롯해 저택을 지나며 마주쳤던 이들의 얼굴이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이 씨.”
<왜 그럽니까?>
내내 아무 말이 없다가 대뜸 욕지거리를 중얼거리자 릭이 놀란 듯 물었다.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를 침대 머리맡에 앉혀 놓았다. 그리고 자세를 바꾸어 반듯이 누웠다.
<테리?>
릭이 재차 나를 불렀다. 나는 양손을 모아 배꼽 위에 얹은 채 비장하게 눈을 빛냈다.
“잡아야겠어, 그 유령.”
그래. 이건 그러니까, 내가 사고를 칠 수 있게 발판을 마련해 준 데에 대한 사소한 호의일 뿐이다.
그리고 온전히 살아 있는 사람인 내가 저택에 들어왔으니 그 유령은 나 또한 노릴 터.
이건 어찌 보면 내게 닥칠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뿐이었다. 그래, 정말 그뿐이고 말고.
<……뭐라고요?>
한편 릭은 내 말에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만약 그에게도 표정이라고 할 게 있었다면 필시 오만상을 구기고 있을 게 뻔해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이따가 깨어 있으려면 나 지금 자야 해.”
<이봐요, 지금 제정신입니까? 당신이 무슨 수로…….>
“그러니까 밤에 나 좀 깨워 줘. 알았지? 믿는다.”
<아니, 잠깐…….>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얼른 입을 닫아 버렸다.
그 이후로 릭은 잔소리와 만류에 가까운 몇 마디를 더 종알거렸지만, 내가 끝까지 대꾸하지 않자 곧 잠잠해졌다.
* * *
좋아, 작전 개시다!
나는 릭의 마지못한 부름에 자정 가까운 시간이 되어 눈을 반짝 떴다.
그리고 릭을 양팔로 껴안은 채 –다소 반항이 있었지만 어쨌든-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방을 벗어났다.
어두컴컴한 복도로 나오자 이따금 유령들이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발뒤꿈치를 든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릭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 여자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어디래? 다른 유령들한테 더 들은 거 없어?”
<내가 대답할 것 같습니까?>
“어허, 이노옴. 누님 명령에 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