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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0) (10/124)

<10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 유령들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캬, 오늘도 살벌하구먼.>

오늘도 어김없이 빈 술병을 쥐고 있는 거지 노인.

<내가 있던 곳에서도 저 정도로 구르는 애들은 흔치 않았는데. 저걸 맨날 하면서도 살아 있다니, 다들 괴물이야, 괴물.>

왜인지 신관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의 긴 로브를 걸친 단발의 소녀.

<미친 것들, 저러다가 빠진 힘줄 모아서 바이올린을 한번 켜 봐야 정신을 차리지…….>

마지막으로 눈그늘이 거멓게 내려앉은, 빼빼 마른 멸치 같은 남자 한 명이 차례로 말을 내뱉었다.

그 셋과 몇몇 유령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부푼 주머니를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유령 중에서도 인간의 형태를 유지할 힘조차 없을 만큼 특히 약한 개체인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몸을 투과한 광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말을 잃었다.

“허어억.”

“흐, 허억.”

“크으윽.”

황토색 모래로 이루어진 야외 연무장 한가운데에, 마치 트럼프 카드를 세워서 집을 짓듯 인간으로 이루어진 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탑의 꼭대기에 오만한 폭군처럼 걸터앉아 있는 사람.

그는 바로 발레리안 에버딘이었다.

‘뭐야, 저게……?’

은테 안경과 장갑을 벗고, 단추를 두엇 푼 흰 셔츠에 바지 차림인 그는 아침에 보았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공작, 발레리안 에버딘이 그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서늘하다 못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하일 서즈튼.”

그러자 그의 왼쪽 아래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남자가 새빨간 얼굴로 답했다.

“예, 주군!”

“레딘 아르볼트.”

“예으엑, 주군!”

이번에는 공작의 오른쪽 아래에 서 있던 남자가 답했다.

공작은 그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앉아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의 훈련으로는 부족했나?”

“아닙, 아닙니다!”

“한데 단원은 물론 단장과 부단장이라는 놈들까지 어떻게 여전히 검 세 번을 받아 내질 못하나. 능력이 모자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머리가 모자란 건가? 칩거 중이라고 해서 훈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시정하겠습니다아악!”

단장과 부단장은 억울함 가득한 눈으로 으아아 고함을 내질렀다.

넋을 놓고 있다가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황스러움에 무심코 인간의 탑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재차 입을 벌렸다.

저건 또 뭐야.

“끄으허윽.”

인간의 탑 바로 앞. 연무장 바닥에 수많은 기사가 엎드린 채로 꼬리 잡기를 하듯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발은 제각기 뒷사람의 어깨 위로 올리고, 손가락은 바닥에.

빨갛다 못해 푸르죽죽한 얼굴의 그들은 각자 두 손가락만으로 부들거리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사람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공작은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에도 한 점 흔들림 없이 얼음장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원망스럽나, 단장?”

“예, 그렇씀다아!”

미하일 서즈튼이라는 남자가 눈만 굴려 제 어깨에 걸터앉은 공작을 희번덕 노려보았다.

한없이 진심에 가까운 그 외침에, 공작은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려 비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면 상대해 줄 테니 훈련 끝나고 덤벼라. 훈련 재개한다. 하나에 우리는, 둘에 돌대가리다. 하나.”

“우리느은!”

“둘.”

“돌대가리이이익.”

“제대로 안 하면 다섯씩 늘린다. 다시 하나.”

“우리느으으은!”

수많은 기사가 발레리안의 말에 맞춰 팔과 무릎을 굽혔다 펴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의식중에 손에서 힘이 빠졌다.

툭.

<아, 흙 묻었네.>

솜뭉치라 통각은 없는지, 바닥을 구른 릭은 그저 리본에 흙이 묻지 않았냐며 투덜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눈앞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때, 릭이 떨어지며 난 소리를 감지했는지 레딘 아르볼트라고 불린 남자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무릎을 펴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웬, 애갸아악.”

“애?”

공작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직후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가 흠칫 놀라더니 작게 입을 벌렸다.

“……테리?”

그 목소리를 들은 단장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예? 누구…… 아이쿠!”

우당탕!

다음 순간. 공작이 기사들로 이루어진 탑의 꼭대기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 반동으로 인해 위태롭게 자세를 유지하던 기사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무너지며 저마다 짤막한 신음을 뱉었다.

옴마야, 떨어진다!

나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공작에 한순간 기겁해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나 예상했던 쾅, 하는 소리나 윽, 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내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아니, 잠깐. 땅에서 떨어져?

“엥.”

깜짝 놀라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그러자 어느새 나를 양팔로 안아 든 공작이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여기……. 그보다 지금은 펜이 없는데.”

공작은 난처한 듯 낮게 중얼거리고는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늘 청초하다고만 생각했던 얼굴인데, 아까도 그렇고 그가 이렇듯 미간을 찡그릴 때면 무서우리만치 성질 더러워 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내가 그 차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사이, 제각기 바닥을 뒹굴며 어딘지 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기사들 쪽에서 돌연 폭발하듯 소란이 일었다.

“그, 그, 그!”

“저, 저, 저……!”

뭐라는겨.

기사들은 저마다 입을 벌린 채 이쪽을 손가락질하며 더듬댔다.

그 소란에 몸을 돌린 공작이 대번에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지금 어디다 손가락질을 해. 미쳤나?”

“죄, 죄송합니다!”

그 말에 황급히 손가락을 주먹 안으로 말아 넣은 기사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작게 한숨을 삼킨 공작이 나를 힐긋 일별하더니 단장을 향해 턱을 까딱했다.

“난 우선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으니 나머지 훈련은 그대가 마무리해. 물론 내일 나와서 확인할 테니 허투루 할 생각은 마라.”

“예? 헉, 아니, 예!”

순간 당황함을 내비쳤던 단장은 곧장 태도를 바꾸어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그 동작이 어찌나 격했는지 그의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휙 올라갔다가 휙 내려앉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공작은 그 말만 남기고는 저택으로 돌아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어어. 나는 당황해서 공작의 어깨 너머를 보며 손을 휘저었다.

“잠깐만요! 저기 인형……!”

“음?”

그가 곧장 움직임을 멈추더니 아까 내가 서 있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발을 멈춘 공작이 한쪽 팔에 나를 앉히고 –이게 되네?- 반대쪽 손으로 릭을 집어 들었다.

나는 릭을 돌려 달라는 의미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제 손에 들린 곰 인형에 잠시간 시선을 고정한 채 의뭉스러운 얼굴을 했다.

“뭔가 느낌이…… 묘한데.”

혼잣말에 가까운 그 중얼거림에 놀라 흠칫 어깨를 떨었다.

뭐, 뭐야. 검을 잘 다루면 이런 것도 막 느낄 수 있는 거야?

“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어깨를 떠는 움직임 덕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공작은 곧 선선히 릭을 돌려주었다.

나는 혹여 그가 릭의 존재를 눈치챘을까 두려워 일부러 평범한 곰 인형인 양 그를 내 품에 안고 방긋 웃었다.

* * *

공작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를 안은 채 곧장 제 집무실로 향했다.

그는 나를 소파에 내려 두고, 책상에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어 허벅지 위에 종이를 올린 공작이 급하게 무언가를 적었다.

「보기 좋지 않을 테니, 네게 연무장 근처로는 가지 말라고 미리 말을 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내 실수야.」

그가 재빠르게 적어 내린 첫마디는 사과였다.

‘엥?’

왜 사과를 하지? 보기 좋지 않다는 건 또 무슨 뜻이고?

잠시 고개를 기울이고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던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 내 눈에는 기사들의 모습이 안 보이니까?’

공작의 오해와 다르게 나는 기사들의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유령의 것처럼 반투명하게 푸르스름한 모습일지라도.

그러나 공작가에서 쫓겨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구태여 오해를 정정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나는 릭을 끌어안고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공작은 작게 숨을 삼키고는 물었다.

「그건 그렇고,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니? 저택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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