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 *
“…….”
내 손가락…….
나는 테이블 아래로 열 손가락을 소중히 깍지 낀 채 몰래 공작을 흘겨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가 눈을 들어 나를 살폈다.
“머, 먹어요! 먹고 있어요.”
그가 곁에 놓아둔 종이와 펜을 집어 들기 전에 얼른 말하고 포크를 쥐었다.
그제야 공작 또한 멈췄던 스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짜 뭐지, 여기……?’
정말로 입적 첫날에, 씻지도 않고 –공작이 온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눈곱을 떼고 세수는 했지만– 방에서 식사하고 있다니.
사실 이 사람들 다 내가 일부러 떼쓰는 걸 알고 이러는 거 아냐?
‘에이, 설마.’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고개를 휘휘 내저어 불길한 상상을 떨쳐 냈다.
그래, 아직 아침이잖아? 밥 먹고 기운을 차려서 오후를 노려 보는 거야. 시간은 많으니까.
마음을 가다듬고서 먹기 좋게 썰려 있는 생선 한 조각을 포크로 콕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생선은 진짜 오랜만에 먹어 보네.’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응시했다.
애초에 오블렌 저택에서는 매번 자작 일가나 사용인들이 남긴 음식, 로렌스의 간식 등을 훔쳐 먹고 지낸 탓에 테이블 앞에 앉아 본 것 자체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은 귀족가 치고는 가짓수가 적은 편이었다. 아니, 오히려 단출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소박했다.
하지만 외려 그렇기에 음식 하나하나에 들어간 정성과 시간이 엿보였다. 없는 사정에도 솜씨 좋게 차려 낸 음식들이 식욕을 자극했다.
‘후추다!’
개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것은 후추였다. 반색하며 후추통을 집어 들고 내 앞에 놓인 수프 그릇에 탈탈 털어 넣었다.
“……?”
공작은 크림수프의 표면이 후추로 새까맣게 뒤덮이도록 열심히 손을 흔드는 나를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음?’
……먹고 싶나?
잠시 고민하다가 의자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그의 수프 그릇에도 후추를 탈탈 털어 넣어 주었다.
어차피 곧 쫓겨날 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행을 베풀자는 마음에서였다.
나는 마지막 후추 한 알까지 탈탈 털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공작은 어딘지 할 말이 많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곧 스푼으로 후추탕, 아니, 수프를 떴다.
후추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지. 좋은 사람이로군.
그가 수프를 떠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공작님.”
공작이 빈 스푼을 내려놓고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처음 보았을 때부터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안경을 쓸 정도로 눈이 안 좋으신 거예요?”
안경 너머로 보이는 공작의 눈은 옆쪽에서 보았을 때와 크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안경을 쓰면 보통 실제 눈보다 작아 보인다고들 하던데 말이지.
“아.”
공작은 내 물음에 나직이 탄식 같은 소리를 흘리더니 장갑 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엄지와 검지로 안경을 잡아 벗었다.
“와.”
나는 다음 순간 정말로, 정말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자마자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아야 하긴 했지만.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도 있나?’
하지만 어떻게 저 얼굴을 보고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있어!
안경을 벗기 전에도 대단한 미인이었던 공작은, 안경을 벗고 나니 그야말로 한 떨기 꽃 같은 미모를 자랑했다.
눈매 자체는 무심하고 서늘했으나 전체적인 인상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청초했다.
그 불가능한 두 가지가 공존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미 인간이 아닌 듯한 미모인 거다.
대애박.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테이블 밑에서 슬며시 양 엄지를 추켜세웠다.
한편 공작은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대신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다.
「테리도 알고 있겠지만, 내 모습은 보통 사람들에겐 전혀 보이지 않아. 그래서 나와 대화를 할 때면 내가 무얼 보고 있는지, 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며 쩔쩔매는 사람들이 많더구나. 그래서 쓰고 있는 것이지 시력이 나쁜 것은 아니야. 장갑을 끼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란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입을 작게 벌렸다. 미처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아니…….’
전쟁귀라면서요?
명색이 전쟁귀라는 사람이 이렇게 아름답고 순진하고 배려심마저 넘쳐도 되는 걸까요?
‘허어어.’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에버딘 공작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 전부 마음속에서 압수.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머릿속에 담겨 있던 흉흉한 소문들을 모조리 지웠다.
내가 그 소문들을 도로 주워 담게 된 것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 * *
공작은 식사를 마친 후 기사단의 훈련 시간이라며 사라졌다.
나는 공작과의 식사가 끝나자 빈 그릇을 치우기 위해 트롤리를 밀고 들어오는 미나에게 물었다.
“미나. 저는 이제 뭘 하면 되나요?”
공부? 교양?
그도 아니면 예절 학습?
무엇을 하든 간에 최선을 다해 망쳐 주지!
굳게 다짐하며 눈을 빛냈다. 그러나 이어진 말로 인해 그 다짐은 곧장 와스스 흩어졌다.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된답니다.」
“……넹?”
뭔 소리래요?
미나가 건넨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웃었다.
「원래는 오전에 에버딘 영지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학습하시고, 오후에는 간단하게 예절 학습을 받으실 예정이었습니다만…….」
그래요, 그거! 그거 말이야!
「공작님께서 당분간은 아가씨가 저택에 적응하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라며 교사들을 모두 돌려보내셨답니다.」
뭔 말이야, 저게!
나는 먹던 사탕을 뺏긴 아이 같은 기분이 되어 흔들리는 눈으로 미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저 완전 멀쩡한데요? 잠도 잘 잤고, 완전 적응 끝났는데요?”
「어머나, 대단하셔라. 그렇지만 당분간은 좀 쉬셔도 괜찮답니다. 아, 심심하시면 기사단의 아침 훈련이라도 구경하러 가시면 어때요? 산책도 할 겸이요!」
아냐! 사고 칠 거야! 사고 치게 해 줘!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나는 천진하게 손바닥을 맞부딪쳐 가며 웃을 뿐이었다.
결국 나는 릭을 들고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왔다. 뜻밖의 강적을 만난 탓인지 머리가 멍했다.
목적을 잃고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중 릭이 물었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물어봐도 됩니까?>
“아니. 물어보지 마.”
<당신, 왜 쫓겨나지 못해서 안달인 사람처럼 구는 겁니까?>
이 자식이. 물어보지 말라니까.
걸음을 멈추고 눈에 힘을 주어 릭을 노려보았다. 물론 그는 언제나 그렇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벌써 저 반응에 익숙해지고 있다니, 분하다.
나는 짐짓 사납게 툴툴거리며 답했다.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 가지고.”
<그래서 이유가 뭡니까?>
“알면 다쳐. 그보다 이제 해도 중천에 떴겠다, 어제 그 악령 얘기 좀 해 봐.”
<악령이 아니라 악령에 가까운…….>
“아, 알았다고! 악령인지 유령인지 암튼 걔 얘기 좀 해 봐! 네가 자고 일어나면 말해 준다며!”
나는 정원을 떠돌아다니는 유령들의 눈을 피해 신경질적으로 윽박질렀다.
그에 끝내 거하게 한숨을 삼킨 릭이 입을 열려던 차였다.
“으아아아아아!”
깜짝이야!
부지불식간에 허공을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에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놀란 것은 릭 또한 마찬가지인지 한순간 내 손을 붙잡았던 그가 이내 파드득 놀라며 떨어졌다.
“뭔 소리야, 이게? 공작가에서 말 말고 다른 짐승도 키워?”
<……그건 아니고. 11시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알게 될 겁니다.>
뭐야, 대체.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릭이 가리킨 쪽으로 저벅저벅 걸었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걸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불현듯 저 앞에 수많은 유령이 등을 보이고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이상하게 어제보다 유령이 적어 보이더라니. 다들 여기 있었군.’
그런데 왜 하필 여기 모여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