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알면 빨리 이실직고해. 너 뭐야? 유령 맞아? 왜 거기 들어가 있는 건데? 나는 왜 따라다닌 거고? 거짓말했다간 눈을 떼 버릴 줄 알아.”
일부러 틈을 주지 않고 다다다 질문을 내뱉었다. 거기에 짤막하고도 무시무시한 협박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는 정체를 모르는 적을 만나면 우선 쉼 없이 말을 붙여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라는 어느 전술 책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책에 나온 전술들은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었나 보다.
곰 인형은 내 기대와 달리 제 목에 매인 붉은 리본을 차분하게 고쳐 묶더니 –세상에- 입을 열었다.
<우선 제 이름은 ‘릭’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마도…… 유령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라니? 그럼 네가 무슨 곰 인형의 정령 같은 거겠니?
의심스럽게 미간을 좁히자 곰 인형이 그것을 눈치챈 듯 덧붙였다.
<제겐 곰 인형 속에 들어오기 전의 기억이 없습니다.>
“……뭐?”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그저 제 이름이 ‘릭’이었다는 것만 기억이 나고, 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째서 이 곰 인형 안에 갇혀 있는 것인지 등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갇혔다고? 네 의지로 숨은 게 아니라?”
<예. 다른 유령들처럼 여기서 나가 보려고도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고요.>
곰 인형, 아니, 릭은 말을 맺으며 정말로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니 추가적인 협박을 시도해 보기도 애매해졌다.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릭을 훑어보다가, 우선 미처 해소되지 않은 의문부터 마저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물었다.
“그나저나 너 다른 질문에는 아직 대답 안 했어. 애초에 나는 왜 따라온 거야?”
내 물음에 아, 하고 탄식한 릭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최근 악령에 가까운 유령 하나가 저택에 들어와서요.>
악령?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밤에 밖을 돌아다니려고 하지 뭡니까. 사람 된 도리로 어떻게 그걸 보고만 있습니까? 적당히 겁을 주어 방으로 돌아가게 할 생각이었지요.>
악령이라는 말에 잠시 정신이 팔렸다가, 뒤늦게 그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구겼다.
뭐? 어린애?
“너 몇 살이야?”
상당히 꼰대 같은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릭은 나보다 더 어이가 없는 얼굴로 말했다.
<기억이 없다고 말하자마자 나이를 묻는 건 무슨 뜻입니까?>
아, 맞다.
“……그럼 여기서 지낸 지는 얼마나 됐는데?”
<글쎄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4년이 조금 넘은 것 같군요.>
“뭐야. 그럼 내가 누나잖아!”
<그래서 기억을 잃기 전의 나이를 알 수 없으니, 혹시 싶어 말은 놓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입니까?>
“…….”
나는 차분하게 제 할 말을 꼬박꼬박 다 하는 릭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그래, 쟤 말대로 지금 나는 쟤한테 존대를 듣고 있지. 하지만 말투랑 태도랑 늘 일맥상통하는 건 아니잖아? 저 태도가 어딜 봐서 누나를 대하는 태도냐고!
한동안 ‘나 할 말 많소’라는 눈으로 릭을 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삼키며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난 쟤보다 어른이니까 이런 쓸데없는 감정 소모는 하지 않겠어. 암, 그렇고말고.
“그보다 자세히 좀 얘기해 봐. 여기 악령이 있다고?”
악령.
세상이 온통 선한 사람으로만 가득 찬 것이 아니듯,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도 통칭 ‘악령’이라는 존재가 있다.
악령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에게 위험한 존재였다.
자신보다 약한 유령을 잡아먹어 힘과 몸집을 키우고, 그 힘을 바탕으로 산 사람의 목숨을 빼앗거나 그 몸을 차지하려 하니까.
일반적으로 유령이 악령이 되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하나, 살아 있을 적의 분노와 한을 버리지 못하고 산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반복했을 경우.
그리고 둘.
‘사실 이게 제일 위험한데.’
유령이 산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경우다.
‘설마 두 번째는 아니겠지.’
나는 긴장된 눈으로 릭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신사적인 어조로 친절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언제 악령이라고 했습니까? 악령에 가까운 유령이라고 했지. 그보다 어린이가 이 시간까지 깨어 있으면 못씁니다. 일단 잠부터 자요.>
……쟤 진짜 나랑 해 보자는 건가?
* * *
아무리 들볶아도 릭은 완고했다. 목의 리본을 꽉 묶어 버리겠다는 위협에도 꿈쩍 안 하니 어쩔 도리가 있나.
결국 나는 입을 삐죽 내민 채로 잠을 청했다. 불만스럽게 몸을 눕힌 것과는 별개로 이번에는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잤다.
“하암.”
못된 어린이 흉내 내기의 첫날이 밝았습니다. 테레지아 오블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세요.
나는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 몸을 쭉 늘였다.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식사를 구하거나, 로렌스의 간식을 훔쳐 먹으려면 늘 이 시간에 일어나야 했기에 정신은 명료했다.
침대에 앉은 채 위로, 옆으로, 앞으로 팔을 쭈우욱 늘리며 하품을 하는데 미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상냥하게 웃으며 펜을 들었다.
「어머.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가씨? 이제 씻고 식당으로 가실까요?」
좋아, 지금부터다.
나는 미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뒤로 발랑 드러누웠다.
“아니요!”
“……네?”
예상한 대로, 미나가 당황한 듯 종이에 할 말을 적는 것도 잊은 채 반문하는 것이 들렸다.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미나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자세로 사악하게 미소 지으며 발을 버둥거렸다.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 일어나기가 싫은데에. 그냥 안 씻고 여기서 밥 먹으면 안 돼요? 네?”
<와, 대박.>
저놈이?
나는 드러누운 자세로 눈만 굴려 협탁 위에 앉은 릭을 째려보았다. 내 시선을 느끼고는 얼른 입을 다무는 모양새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래, 네가 이 누님의 깊은 시름을 어떻게 알겠니. 자존심과 존엄성을 모두 내려놓는 이 초연함을 보고 배우려무나.
속으로 릭을 향해 안타까움을 전하고는 슬쩍 시선을 내려 미나를 훔쳐봤다.
지금쯤이면 오블렌 저택의 하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질린 얼굴로 날 보고 있겠지! 좋아, 난 준비됐어!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아가씨이…….”
이상함을 감지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들어도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던 미나의 눈이 심상치 않게 일렁였다.
그건 분명 눈물이었다.
나는 대번에 기겁하며 벌떡 일어났다. 뭐야, 왜 울어!
‘너무 심했나.’
아이 씨. 죄책감에 속으로 나 자신을 욕하며 황급히 미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미나, 미나? 미안해요! 그냥 장난이었어요! 씻고 양치도 할게요! 밥도 식당 가서 먹을게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그 눈물 좀 어떻게 해 봐요…….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울지 말라는 말은 일말의 이성으로 삼켰다. 지금의 나는 미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상태니까.
그런데 그때. 물기로 일렁이는 눈의 미나가 돌연 활짝 웃었다. 빠른 손길로 무언가를 적어 내린 그녀가 손에 쥔 종이를 잘 보이게 들었다.
「아니에요, 아가씨! 그러면 주인님께도 아가씨 방에서 함께 식사하실 거냐고 여쭤보고 올게요!」
“네?”
「쉬고 계세요!」
“아니, 잠깐, 미나!”
한 박자 늦게 정신이 들어 미나를 붙잡기 위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옷자락은 놀리듯 내 손 틈을 벗어나 문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아니, 뭐가 저렇게 빨라?
어안이 벙벙해서 그 자리에 굳어 있는데 뒤에서 풉 하고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리는 진짜 진짜 일어나기 싫은데에.>
“하지 마라.”
<알았어요. 단념할게요.>
머리카락 아래로 발갛게 달아오른 귀를 감추며 릭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나를 놀리던 그는 내 시선을 피해서 벽을 보고 앉아 버렸다.
그제야 생각이라는 것을 할 여유가 생겼다.
나는 당최 알 수 없는 말을 뱉고는 방을 벗어난 미나를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공작이 말려 주겠지.’
명색이 후계자라는 애가, 입적 첫날에 예의고 격식이고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방에서 식사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그걸 받아 주지는 않겠지. 바로 혼낸다는 데 내 손가락도 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