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 *
-테리.
엄마?
문득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캄캄한 어둠 저편,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웃는 얼굴의 엄마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였다.
‘엄마!’
나도 모르게 입가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곧장 엄마에게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왜인지 발이 바닥에 뿌리내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
내가 어떻게 해서든 발걸음을 떼려고 용을 쓰는 사이, 엄마는 계속해서 뭔가를 말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뭐라고 하시는 거지?
-……게, 아가.
그때, 내내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일순 들려오며 엄마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엄마의 모습이 점차 흐려졌다.
‘엄마……?’
반짝.
엄마의 모습이 어둠에 잡아먹히는 것과 동시에, 눈꺼풀이 반짝 떠졌다.
나는 튕기듯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낯선 풍경. 익숙하지 않은 감촉의 침대. 협탁 위에 놓여 있는 곰 인형.
“꿈이네…….”
이곳이 에버딘 저택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괜히 심술이 돋았다.
입술을 삐죽이며 포근한 이불을 발로 툭 걷어찼다.
‘그래도 오랜만에 엄마 봤으니까.’
나는 꿈에서 봤던 엄마의 얼굴을 곱씹으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마음가짐을 되찾은 후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잠도 깨 버렸겠다, 앞으로 수업을 땡땡이치고 숨어 있을 곳이라도 찾아 놓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방문 밖으로 고개만 쏙 내밀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복도로 나왔다.
‘어둡군.’
지금이 정확히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복도는 새까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난 걱정 없지롱!
나는 주위를 떠돌아다니는 유령들의 푸르스름한 빛을 등불 삼아 복도를 자박자박 걸었다.
이따금 몇몇 유령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제 얼굴을 불쑥 들이밀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러운 몸놀림으로 걸음을 틀었다.
‘웬 거지 유령까지 있네. 빈 술병은 왜 들고 다니는 거람?’
아무튼, 어찌어찌 위기를 넘기고 본채의 계단까지 나온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낮에 저택까지 들어오는 길에 보았던 정원은 굉장히 광활해서 숨을 곳이 많을 것 같았다. 저택 안보다는 그쪽이 달빛이 비쳐 밝을 테고.
‘좋아. 정원부터 가 봐야지.’
그리 결심을 마치고서 막 계단 아래로 한 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툭.
“……!”
부지불식간에 등 뒤에서 소음이 들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파드득 어깨를 떨며 몸을 홱 돌렸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 푸르스름한 소년의 잔상이 보였던 것 같기도 한데, 너무 어두워서 잘못 본 것 같기도 하고.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전히 텅 빈 복도와 그 가운데 놓인…….
“……엥?”
저게 왜 여기 있지?
나는 종종종 걸음을 옮겨 복도의 끄트머리에 멈춰 섰다.
몸을 숙여 손을 뻗자, 복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곰 인형이 손에 잡혔다.
부드러운 감촉이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는 듯했다.
“뭐지……?”
나는 곰 인형을 양손으로 쥔 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러나 조금 스산하게 생겼을 뿐, 인형에서 이상한 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아까 눈 떴을 땐 분명 협탁 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착각했나?’
뭐, 막 자다 깬 상태였으니 착각했을 수도 있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리 납득하며 다시 방으로 돌아가 곰 인형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나는 이후 저택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유령들과 달빛에 의존해 열심히 수풀을 헤치고 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나뭇가지가 굵고, 나뭇잎이 풍성해 내 몸을 감추기 안성맞춤일 것 같은 나무를 발견했다.
좋아, 너로 정했다. 순순히 나의 은신처가 되어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뒤 나무 기둥을 붙잡았다. 그리고 막 시험 삼아 한 발을 기둥에 척 올리는 참이었다.
바스락!
또다시 등 뒤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히익, 소리를 내며 뒤를 홱 돌아보았다.
“또 뭐야?”
눈을 치뜬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등 뒤쪽 수풀에 나동그라진 곰 인형이 시야에 들어오자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유령 짓인가……?’
이쯤 되니 우연이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했다. 혹 어떤 장난기 많은 유령이 나를 겁주려고 이러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웃음소리 같은 것도 전혀 안 들렸는데.’
대체 뭐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수풀 위로 쓰러져 있는 곰 인형 앞에 멈춰 서 손을 뻗는 순간.
끼긱!
부지불식간에 곰 인형의 고개가 180도 돌아가더니 단추로 된 눈과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으아악!”
찰싹!
너무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손이 나갔다. 내 손바닥이 곰 인형의 뺨을 후려치자 반대로 돌아가 있던 목이 다시 원래 방향으로 돌아갔다.
“…….”
<…….>
“…….”
잠깐의 정적 후, 벌떡 몸을 일으킨 곰 인형으로부터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 * *
나는 난데없는 비명에 깨어난 사용인들이 하나둘 저택에 불을 밝히는 것을 보고는 허겁지겁 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미나는 내가 침대로 기어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쓴 직후 방으로 들어왔다.
잠시간 나를 살펴보던 그녀가 이내 의심을 거두었는지 방을 조심조심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숨을 죽이고 있다가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심장은 여전히 쿵쿵 크게 뛰고 있었다.
‘뭐야! 뭔데, 그거!’
그 곰 인형, 분명 움직이기도 하고 말도 했다. 심지어 목도 막 이렇게 이렇게 돌렸다고!
‘유령이 물건 안에 숨어 있을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 물건 자체를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그게 말이 돼?’
토미가 나와 말다툼을 한 후 물건 속으로 몇 번 숨어 들어간 적이 있기에, 유령이 사물 속에 몸을 숨길 수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물 안에 깃든 유령이, 해당 사물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건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사실이었다.
그건 유령이 사물을 밀어 떨어트리거나 집어 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치였으니까.
‘너무 놀라서 놓고 와 버렸는데.’
심장께에 손을 올리고 박동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고 침대에서 내려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내가 아까 오르려 했던 큰 나무가 한눈에 시야에 들어왔다.
‘……없네.’
그러나 하얀색 곰 인형은 그 주위에 없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쾅!
가 다시 닫았다.
‘하마터면 세상 하직할 뻔했네.’
이렇듯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잠시 입속으로 토미에게 배운 여러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
……곰 인형이 나를 보고 서 있었다.
<이봐요.>
게다가 말도 걸었다, 하핫.
나는 3초쯤 고민하다가 마음을 정리하고 손을 뻗었다.
곰 인형의 겨드랑이를 받쳐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와! 내 곰돌이가 돌아왔네! 혼자서 집도 찾아오고, 우리 곰돌이는 나를 닮아서 참 똑똑한가 봐!”
<아니, 저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집 찾아오느라 고생 많았어! 우리 이제 자러 가자!”
<이봐요!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당신 내 목소리 듣고 놀라는 거 다 봤다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인형을 무시한 채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곰 인형을 끌어안아 팔다리를 포박하고 등 뒤를 토닥여 주었다.
“자자, 코하자. 코오 자자.”
<…….>
“도로롱…….”
나는 눈을 감은 채 최선을 다해서 잠든 척을 했다. 그러자 품 안의 곰 인형이 팔다리의 버둥거림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됐나?’
눈을 떠 볼까 말까 고민하던 차였다. 유령답게 음산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당신, 자꾸 이러면…….>
“…….”
<저택의 유령들에게 당신이 유령을 볼 수 있다고 말할 겁니다.>
“이익.”
나는 결국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곰 인형을 내팽개치듯 앞에 앉히고 단추로 된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뭐야.”
<……말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백이 느껴지는데. 따로 수련이라도 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