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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5) (5/124)

<5화>

“이 고오오얀 놈! 내가 이피아 앞으로 남겨 둔 유산을 빼돌려 투기로 날려 먹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네놈이 숨겨 둔 금괴를……!”

“그, 그만! 그만!”

자작은 저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다급하게 고함쳤다.

그가 내 입을 틀어막으려 하기 직전, 언제 미친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였냐는 듯 표정을 싹 바꾸며 혀를 쏙 내밀고 귀엽게 웃었다.

“……라고 하시는 것까지밖에 못 들었어요!”

그리고 멍청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자작에게 눈을 부릅떠 주었다.

너. 금괴. 내가 어디 있는지 다 안다. 잘해라.

“……!”

자작은 내 시선에 담긴 뜻을 용케 알아들었는지 새하얀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내가 금괴의 위치를 알고 있다 한들, 자작의 눈을 피해 저택 깊숙한 곳에 자리한 금고에 든 것을 몰래 꺼내 오기는 어려웠다.

다만 내 말로 인해 금괴의 존재를 알게 된 사용인, 혹은 이 소문을 알게 될 도둑들에게 자작의 금괴는 아주 탐나는 먹잇감이겠지.

아마 자작은 한동안 금괴 걱정에 제대로 잠을 못 잘 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카를로타가 남편이 자신도 모르게 도박할 재산을 꿍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하게 만들 수도 있고 말이지.

‘그동안은 굳이 상종하고 싶지 않아서 내버려 뒀는데, 이젠 사정이 다르잖아?’

그 세기의 사랑, 언제까지 가는지 한번 보자고.

나는 반나절 묵은 한이 쑥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상큼하게 몸을 돌렸다.

“가요!”

에버딘 공작가의 노인은 어째서인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에 한 발을 올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노인이 나를 따라 마차에 탔다.

곧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고는 커다랗게 외쳤다.

“아빠! 엄마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꼭이요-!”

마지막까지 자작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기분 좋게 웃고는 창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러느라 내 맞은편에 앉은 노인이 마치 유령에 홀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지만.

* * *

이곳, 크렘위든 제국이 있는 대륙은 서쪽과 가까울수록 따뜻해졌고, 동쪽과 가까울수록 추워졌다.

그중에서도 에버딘 공작령은 제국의 동부에 둥근 마름모처럼,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세로로 세워 놓은 고구마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인해 에버딘 공작령은 제국의 다른 지역보다 평균 기온이 낮은 편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공작가의 집사인 세바스찬이 급하게 수선한 듯 품이 넉넉한 외투를 건네주었다.

「가급적 새로 맞춰 드리고 싶었는데, 저희 공작령의 사정이 그다지 좋지 못한 탓에 당장 아가씨 체형에 맞을 만한 외투가 이것뿐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갈한 필체로 유려한 글을 써 낸 세바스찬이 내게 종이를 내밀었다. 그는 굉장히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은데.’

나는 속으로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자작가에 있는 내내 한 번도 질 좋은 옷이라고 할 것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하녀들이 내놓는 로렌스의 헌 옷을 몰래 가져와, 원래 입던 옷에 교묘하게 덧대어서 입거나 했지.

‘그마저도 유령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누더기나 다름없었을 테지만.’

그에 반해 세바스찬이 내민 외투는 품이 좀 크고 엉성해 보이긴 했으나, 누군가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들어 무척이나 깨끗하고 따뜻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내 건강을 염려하여 급하게 외투를 수선했다는 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감기에 안 걸리려면 이런 거라도 입어야지, 뭐.”

나는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새침하게 외투를 받아 들었다.

자작이 나를 에버딘 저택으로 입양 보내겠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파양을 당하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공작가 사람들에게 밉보여야 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칭얼거리며 떼를 쓰고, 공부는커녕 놀고먹기만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흉내 내면 그들은 곧 내가 후계자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할 것이다.

얘를 정말 공작가 후계자로 모셔야 한다고? 이러다가는 안 그래도 어둡던 미래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등등.

그럴 때쯤에 아까 오블렌 자작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고를 하나 거하게 쳐 주면?

끝이다, 끝. 더 볼 것도 없다.

내가 돌아가면 오블렌 자작은 아마도 있는 성질 없는 성질을 다 부릴 테지만, 뭐 어쩌겠는가. 당사자인 공작가에서 나를 거절하겠다는데.

게다가 그때쯤이면 카를로타의 분노도 조금은 사그라들어 있을 테고. 음, 완벽하군.

나는 그대로 에버딘에서 내쫓겨 오블렌 저택의 내 방으로 돌아가는 상상까지 끝마치고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미안해요, 세바스찬.’

속으로 그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 뒤, 더없이 까칠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외투에 팔을 끼워 넣,

“?”

엉켰다.

“엥.”

소매 구멍을 찾지 못하고 외투에 팔을 반만 낀 채 허우적대자 세바스찬이 황급히 웃음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재밌냐, 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자 점잖게 깃펜을 집어 든 세바스찬이 종이에 할 말을 적어 보여 주었다.

「아가씨, 제가 도와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

아이 씨.

“……도와주세요.”

팔이 꺾인 인형 같은 내 꼴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 세바스찬이 어깨를 떨며 웃더니 순식간에 외투를 제대로 입혀 주고는 단추까지 톡톡톡 채워 주었다.

나와는 달리 빠르고 정확한 손길을 황망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자 그는 이제 감출 생각도 안 하고 웃고 있었다.

그래, 나한테는 자기 얼굴이 안 보인다 이거지? 그런데 다 보이거든요?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

나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졸음 탓이었다. 절대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 * *

그렇게 며칠 여를 더 달린 끝에 에버딘 공작령, 그 중앙에 자리 잡은 영주 저택에 도착했다.

「도착한 모양입니다. 제가 잡아 드릴 테니 조심해서 내리시지요.」

“혼자서도 내릴 수 있어요.”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세바스찬에게서 고개를 홱 돌리며 홀로 마차에서 내려섰다.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가 나를 따라 땅을 밟았다.

그가 마부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는 사이,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저택의 위용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버딘 저택은 정말 크고, 아름답고, 또…….

‘와, 유령 진짜 많아…….’

유령 소굴이었다.

이것도 저주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저 큰 저택 전체에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 기운이 저기 저택 주변을 날아다니는 유령들 때문인지, 아니면 유령이 된 에버딘 저택의 사람들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결국 둘 다 유령이라는 것은 같으니까. 물론 에버딘 저택의 사람들은 완전히 유령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알겠다.’

저 정도면 분위기가 폐가보다 더하지 않은가.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유령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지만, 이렇듯 유령이 일정 수 이상 모여 있으면 산 사람은 기이한 불쾌함과 공포를 느낀다.

나야 유령을 볼 수 있으니 그 원인을 안다지만, 그렇다고 딱히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다.

‘조심해야지.’

나는 허공에서 깔깔대며 돌아다니는 유령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부릅떴다.

난 지금 아주 버릇없고 오만한 어린애다. 유령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게 연신 되뇌며 세바스찬의 뒤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공작의 집무실까지 올라가는 내내 마주친 유령만 해도 열 손가락이 부족했다.

나는 손가락을 몰래 하나둘 접어 보다가 끝내 수를 세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공작가 사람들한테는 유령이 안 보이는 것 같네.’

내 앞에 선 세바스찬은 몇몇 유령이 신기하다며 우리 주변을 돌고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듯 보였다.

수많은 유령.

반만 유령인 에버딘 저택의 사람들.

그중에서 홀로 산 사람인 테레지아 오블렌.

‘대단한 저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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