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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4) (4/124)

<4화>

발레리안은 제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대한 자조와 테레지아 오블렌이라는 아이에 대한 연민을 짧게 내비쳤다가 곧 갈무리했다.

이런 괴물 소굴에서 살아가야 할 아이가 안타깝긴 했으나, 에버딘을 지켜야 하는 그에게 다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애써 죄책감을 죽이며 안경을 벗은 뒤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두통이 어느 정도 가신 후 다시 안경을 쓰며 입을 열었다.

“세바스찬.”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그러자 문밖에 서 있던 집사가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와 깍듯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발레리안의 눈에는 인자하면서도 단호한 인상의 노인이 보였으나, 그들의 옆에 세워진 거울에는 마찬가지로 허공에 정갈하게 떠 있는 정장과 모노클만이 비칠 뿐이었다.

발레리안은 세바스찬을 향해 덤덤하게 명을 내렸다.

“오블렌 영애는 자네가 직접 데리러 갔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곧장 채비해서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혹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 말에 세바스찬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고개만 숙였다.

발레리안의 마음 씀씀이는 감동적이었지만, 그는 에버딘 공작가의 재정 상태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것을 알기에 발레리안 또한 답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그를 채근하지 않았다.

발레리안은 머쓱함과 죄책감 섞인 얼굴을 숨기려 세바스찬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작게 덧붙였다.

“……아이가 겁먹지 않도록 잘 부탁하네.”

그 앞에서 세바스찬은 언제나 그렇듯, 정중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태도로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 * *

“다 되셨어요, 아가씨.”

나는 입을 뚜하게 내민 채로 거울을 통해 내 머리에서 손을 떼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얌전하고 차분하며 후계자 교육을 받기에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아이’처럼 보였다.

평상시의 꾀죄죄한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앙증맞았으나, 기분은 더러웠다.

‘이렇게 꾸며 놓기만 하면 다냐.’

하루 전 저녁. 나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말 그대로 ‘상품’을 때 빼고 광내는 듯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출장비까지 하여 총 45만 골드입니다, 자작님.’

‘크흠, 큼. 크흐흠.’

자작은 공작가에 내 거지꼴을 보일 수 없다며 사람들을 불러 놓고도, 나를 위해 45만 골드라는 거금을 들이는 것이 못마땅한지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촉박한 기한에 맞추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 앞에서 체면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는지, 끝내 입꼬리를 부들거리며 금화 주머니를 내밀었더랬지.

‘그거 하난 마음에 들었지만. 아유, 꼬시다.’

자작의 일그러진 얼굴을 생각하자 절로 킬킬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거두어야 했다.

“아가씨, 공작가의 마차가 도착했다고 하네요. 어서 내려가 보세요.”

하녀가 내 팔을 잡아끌어 의자에서 내려오게 하더니 방 밖으로 떠밀었다.

“……알았으니까 밀지 마.”

나는 하녀의 어깨 너머로, 지난 몇 년 동안 매일같이 잠들었던 침대와 낡은 이불 등을 미련 서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어렵사리 시선을 떼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 아래, 열린 문 너머로 들려오는 부산스러운 소리에 복도에는 한층 더 을씨년스러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복잡한 속내를 감추며 잠자코 걸음을 옮기다가 말고 복도 중간에서 우뚝 발을 멈췄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와, 토미.”

어제저녁, 내가 에버딘 공작가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이 충격적이었는지 희게 질린 얼굴로 도망쳐 버렸던 토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투명한 푸른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그 모습에 혀를 차는데, 그가 끅끅거리며 물었다.

<너, 너, 너…….>

“응.”

<너, 정, 정말로, 가……?>

“그렇다니까. 그러게 도망은 왜 치고 난리야. 나 이제 가야 한단 말이야.”

저택에서 떠나기 전까지 토미와 함께 자작의 욕이라도 실컷 하려고 했는데.

허무하게 날려 버린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저런 반응이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토미와 형제처럼 부대끼며 자랐다.

하나뿐인 가족을 잃는 기분이 드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울지 마, 바보야. 나 이제 정말 가는데 마지막까지 울기만 할 거야?”

보란 듯 혀를 쯧쯧 차며 손을 뻗어 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열심히 닦아 주었다.

그러자 토미도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한 듯 가까스로 눈물을 그쳤다. 그가 결연한 얼굴로 내게 약속했다.

<나, 나 정말 열심히 할게. 무덤까지는 내가 볼 수 없지만…… 초상화는 절대로 건드릴 수 없게 할게.>

“내가 그거 부탁하려고 했던 건 또 어떻게 알고. 기특한 자식. 너만 믿을게.”

<응, 응. 나만 믿어!>

“금방 돌아올 거니까, 그동안 사라지지도 말고, 나 보고 싶다고 울지도 말고. 알았지?”

<응……? 돌아와? 어떻게?>

“……보면 알 거야. 아무튼 내려가자.”

나는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린 후 토미를 향해 손짓했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착실히 나를 따라 저택의 정문 앞까지 날아왔다.

“아! 저기 오는군요. 딸아이가 수줍음을 많이 타서 늦잠을 잔 모양입니다. 하하.”

활짝 열린 문 바깥으로 걸음을 내딛자 자작이 헛소리를 지껄이며 비굴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자작을 무시하고 그의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나도 모르게 작게 입을 벌렸다.

‘와.’

그도 그럴 것이, 나름 태어났을 때부터 유령을 보고 자라 왔으나 저런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자작의 앞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몸은 유령처럼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반투명한 모습이지만, 옷가지만은 확실히 ‘이승’의 것이었다.

‘진짜 절반만 유령인 것 같잖아?’

그때, 인자하면서도 어딘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얼굴의 노인이 종이와 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그러자 근처에 서 있던 자작과 자작가의 사용인들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흠칫했다.

종종종 걸음을 옮겨 그들의 앞으로 다가가는 사이, 종이에서 펜을 떼어 낸 노인이 종이를 모두에게 보이게 집어 들었다.

「그럼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잠시 마차를 보고 올 테니, 두 분께서는 인사 나누시죠.」

노인은 자작과 내 시선이 종이를 끝까지 훑은 것을 확인한 후, 내게 생긋 웃어 주고는 몸을 돌려 마차 쪽으로 향했다.

그가 공작가의 사용인으로 보이는 마부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자작이 내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테리.”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다정한 태도였지만, 그가 양손에 우악스럽게 힘을 준 탓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까스로 신음을 참는 내게 고개를 바짝 숙인 그가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네 어미를 위해서라도 허튼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처박혀 있는 게 좋을 거다. 잘만 하면 네 주제에 맞지도 않는 곳에서 호강하며 살 수도 있지 않겠느냐?”

에버딘 공작가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온 제국민이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저 말은, 나를 향한 조롱이었다.

‘하여간 끝까지 비열한 사람 같으니.’

하지만 그런 당신을 위해서 제가 준비한 게 또 있죠!

나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 자작이 흠칫 당황하는 사이, 일부러 노인 쪽에도 들릴 만한 크기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빠!”

“아…… 뭐?”

“제가 어제 꿈을 꿨는데요, 꿈에서 외할아버지가 나왔어요!”

“그…… 랬느냐?”

팔까지 붕붕 휘저어 가며 꺄르륵 대자 자작은 당황한 얼굴로 손에서 힘을 풀었다.

“네! 그래서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냐면, 귀 좀 빌려주세요!”

노인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후 방긋방긋 웃으며 요청했다.

자작은 차마 노인이 보고 있는 앞에서 나를 뿌리칠 수는 없었는지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주었다.

나는 실수인 척 일부러 그의 귀를 세게 잡아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네 이놈-!”

아랫배에 힘을 주고는 웃음기를 싹 지우며 버럭 고함쳤다.

“아악!”

토미와 훈련한 보람이 있었는지, 자작은 내 손을 뿌리치더니 고통스러운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나는 그의 앞에서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리고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호통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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