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로렌스에게는 토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겠지만, 그는 이까지 갈며 로렌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게 지금 누굴 욕하는…….>
‘토미, 그만.’
옆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나는 한 손으로 티 나지 않게 토미에게 물러나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토미는 예사 유령이 아니다.
그는 나와 함께 지낸 지 벌써 8년이 넘었고, 내 옆에서 오랜 기간 함께한 유령들은 보통 물질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토미가 로렌스에게 사탕을 던질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치였다.
지난 몇 년간, 내가 오블렌 자작 일가의 눈총을 무시하며 꿋꿋이 버티던 이유는 이곳이 엄마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한순간에 잃을 수는 없다.
‘멋모르는 어린애다, 어린애. 자작이 허풍 떠는 소리를 고스란히 믿는 어린애!’
나는 진실을 알고 있으니 화낼 이유도 없다.
그렇게 몇 번 되뇌며 필사적으로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소름이 돋을 만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로렌스는 내 기세가 평범한 8살 어린아이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자신이 내게 눌렸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운지 곧장 얼굴마저 붉게 물들이고는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내, 내 말이 맞잖아! 내가 뭐 잘못 말했어? 네 엄마가 그렇게 뒤진 거! 다 아빠한테 감사할 줄 모르고 벌 받아서 그런 거라고 우리 엄마가 그랬다고!”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참으려 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 말에 일말의 이성마저 뚝 끊겼다.
대체 내가 어디까지 참아야 하지? 설사 창고에 며칠 처박혀 있게 된다고 해도 지금 당장 할 말은 해야겠다.
나는 더없이 상냥하고도 고상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입 닥쳐, 로렌스.”
“……뭐?”
“나불댈 곳 아닌 곳 가리지 못하고 놀리는 그 입, 닥치라고. 내가 실이랑 바늘 가져와서 꿰매 버리기 전에.”
로렌스는 내 말에 잠시간 충격에 빠진 듯 입을 헤 벌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이게 미쳤나!”
짜악-!
그리고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고개가 홱 돌아갔다.
커다란 소음과 함께 볼에 쓰라린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실소했다.
‘잘됐네. 이러면 정당방위로 몇 대 때려도 할 말 없겠지. 제국 법전에도 다 나와 있다고, 정당방위.’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놈의 명치라도 한 대 때리고 갇혀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의지를 다지고는 눈을 번뜩이며 주먹을 내지르려던 그 순간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감히 누구한테 손을 올려!>
이 자리에서, 오직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귓전을 울렸다.
그리고 이어서, 눈을 새빨갛게 물들인 토미가 양손을 뻗어 로렌스의 어깨를 밀치는 모습이 느리게 시야에 들어왔다.
“어……?”
로렌스는 난데없이 허공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인지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한발 늦게 기함하며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로렌스! 잡아!”
하지만 로렌스의 손끝은 내 손가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고는 그대로 멀어졌다.
쾅! 콰당! 쿵!
굉음과 함께 로렌스의 몸이 계단을 몇 번 구르더니 끝내 1층에 나동그라졌다.
“무슨 소리야!”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소음에 사용인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렌스! 아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사용인들의 당황한 목소리에 카를로타와 자작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테레지아 오블렌! 당장 이리 내려오지 못해!”
아, 망했어요…….
* * *
근 며칠간 자작저는 조용할 시간이 없었다.
의사가 세 명이나 다녀갔는데도 로렌스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더라.
자작이 로렌스를 보러 갈 때마다 카를로타가 그의 옷가지를 부여잡고 나를 벌주라며 난리를 치고 있다더라…….
그날 이후, 자작에 의해 방에 반쯤 갇히다시피 한 내게 이런 소식을 전해 주는 것은 토미를 비롯한 유령들이었다.
토미는 카를로타가 며칠 내내 울다 못해 끝내 혼절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며 우물쭈물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야…….>
“뭐.”
<……화났어?>
저답지 않게 풀죽은 목소리로 물은 토미가 힐긋 눈치를 보더니 곧장 시선을 피했다.
“……에휴.”
지난 며칠간 일부러 뚱한 태도를 고수했던 나는 끝내 표정을 풀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쩔쏘냐.
달리 생각해 보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토미가 로렌스를 밀쳐 내지 않았다면, 정말 실과 바늘을 들고 돌아와 그에게 덤벼들었을지도 몰랐으니까.
‘일주일 정도 갇혀 있는 거야 뭐. 익숙하니까.’
오블렌 자작은 나를 완전히 내치지는 못할 것이다.
현 오블렌 자작은 내 어머니인 이피아 오블렌과 결혼함으로써 귀족의 신분을 획득한 사람으로, 혈통의 정통성이 턱없이 부족했다.
사생아를 호적에 올리는 귀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전과 황실의 허가를 받아 내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현재 호적상 오블렌 자작가의 적통 후계자는 나뿐이었다.
지금 당장 내가 죽거나 사라진다면, 주변 영지의 귀족들이 어떻게 해서든 자작가를 삼키기 위해 기를 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자작은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할 것이다. 그 편이 주위의 공격을 감내하는 것보다 덜 귀찮을 테니까.
……뭐, 로렌스가 호적에 올랐다면 또 모를까, 아직은 아니니까.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아직도 시무룩해 있는 토미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됐어. 화 풀렸어.”
<……진짜? 진짜로?>
“응, 진짜 진짜로. 나 대신 화내 줘서 고마워.”
<헤헤.>
언제 풀이 죽어 있었냐는 듯, 토미는 내가 웃어 주니까 또 금세 좋다고 웃었다.
참 미워할 수가 없는 애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방긋 마주 웃는 참이었다.
돌연 계단 쪽에서 쿵쿵대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방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무려 사흘여 만에 열린 문 너머로, 차디차게 굳어 있는 자작의 얼굴이 드러났다.
“테레지아 오블렌. 따라 나와라.”
……어라? 뭔가 불길한데.
* * *
나는 자작의 손에 끌려 1층의 응접실까지 내려갔다.
맞은편 소파에 앉은 그는 테이블 위로 종이 뭉치를 휙 던져 주더니 인상을 쓰며 까딱 턱짓했다.
“읽어 봐라.”
아까부터 목구멍을 간질이는 이유 모를 불길함 탓에 그 말에 따르고 싶지 않았으나 선택권은 없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을 애써 억누르고, 천천히 손을 뻗어 종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맨 앞장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는 순간.
「친권 포기 및 입양 합의서」
나는 내 눈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잠시나마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이게 뭐…….”
“네 입양 합의서다.”
눈으로 읽어 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어 있는 내게 자작은 친절히 확인 사살까지 해 주었다.
“로렌스를 호적에 올렸으니 이젠 너를 이 집에 둘 필요도 없다. 들어는 봤겠지? 에버딘 공작가에서 후계자를 구한다더군.”
그 말에, 반사적으로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멍하던 머릿속에 ‘에버딘 공작가’라는 단어가 선명히 박혀 들었다.
태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저택을 나선 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나였지만, 그 이름을 모를 수는 없었다.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밤, 토미가 상세하고도 생생히 설명해 준 이야기인 덕에 더 그러했다.
에버딘 공작가.
그곳은 다른 말로 ‘유령 공작가’라고 불렸다.
* * *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에버딘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그를 전쟁터로 내몰았던 황제는, 그가 외려 승전을 이어 가며 명성을 쌓자 그것이 무척이나 고까웠던 모양이다.
하여 황제는 고약한 명령을 내렸다.
‘모르티아 일족을 토벌하라.’
그는 에버딘 공작에게 제국의 서쪽 국경에 자리한 숲속에 살고 있는, 죽은 자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안식을 돕는다는 모르티아 일족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외적인 명분은 그들이 ‘삿된 망령’들을 이용하여 제국민들을 홀리는 사특한 악의 무리라는 것이었다.
망자와 소통하는 능력자들을 죽이라는 몹시 꺼림칙한 명령.
하지만 명령 불복종은 곧 반역이었기에 에버딘 공작과 그의 기사단은 묵묵히 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