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유령 공작가
내 이름은 테레지아 오블렌.
애칭은 테리, 나이는 여덟 살.
나는 유령을 본다.
* * *
내겐 태어난 순간부터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보이기만 할쏘냐. 만질 수도 있다.
물론 유령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만지거나 부딪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유는 잘 모르겠다. 마치 숨을 쉬고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이 당연하다는 양 살아왔으니까.
물론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유령을 보았다는 사실은 어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것이었다.
‘테리.’
내 어머니 이피아 오블렌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고, 다정하고, 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팔불출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오블렌 저택 내의 모든 유령이 온몸의 피를 걸고 -이미 죽었잖아?- 맹세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이니.
……뭐, 그래 봤자 내가 다섯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돌아가셨지만!
명색이 친애비라는 놈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숨겨 놓았던 정부와 사생아를 버젓이 저택에 들여놓고 나를 방치하지만!
그것도 모자라서 나름 이복 오빠라는 로렌스 놈은 틈만 나면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지만……!
나 테레지아 오블렌. 그따위 인간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여덟 살이 되는 올해까지 훌륭하게 살아남았다.
음, 역시 난 대단하다니까.
<너 방금 이상한 생각 했지. 표정 대박…….>
내 또래로 보이는 모습의 소년이 허공에 거꾸로 앉은 채 질색한 얼굴을 했다.
저 소년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저택에 있던 유령이자 내 하나뿐인 친구인 토미였다.
나는 토미를 밉지 않게 흘기며 입을 열었다.
“시끄러워, 토미. 다른 유령들도 다 나만큼 똑똑한 애는 처음 본댔거든?”
어릴 때부터 수백 살 먹은 유령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고대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관한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뭐.’
토미가 기겁하며 말리긴 하지만 유령들은 언제나 제멋대로 내 귀에 이런저런 지식을 흘려 넣곤 했다.
그런 그들의 도움을 받아 도서관의 책을 모두 뗀 것이 일곱 살의 일이니 가히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고 볼 수 있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토미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왠지 뿌듯한 기분으로 손에 든 사과를 와삭 베어 먹었다.
현재 내 품에는 각종 간식과 먹거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아악! 거지, 너 또 내 간식 훔쳐 먹었지!”
물론 내 거라고는 안 했다.
멀리서부터 누군가 바락바락 악을 쓰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다갈색 머리카락에 하늘색 눈을 지닌, 토실토실한 소년 하나가 씩씩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또 어디 숨었어! 당장 나와! 나오라고!”
분노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 꼴이 꽤 볼만했다.
저딴 게 나랑 같은 피를 반이나 공유하고 있다니.
“말세로다.”
나는 로렌스의 머리 꼭대기, 정확히는 정원의 높다란 나뭇가지에 앉은 채로 혀를 끌끌 차며 다리를 달랑거렸다.
내 옆에서 허공에 늘어져 있던 토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 입은 진짜…… 재앙의 주둥아리다…….>
“앗, 토미! 쟤가 간식 내놓으래! 가서 이거라도 던져 주고 와!”
나는 토미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채 그에게 사탕 한 뭉치를 건네며 싱긋 웃었다.
왜, 뭐. 어디 웃는 얼굴에 대고도 계속 욕해 보시지?
그런 속내를 담아 방글방글 웃어 보이자, 결국 거하게 한숨을 내쉰 토미가 사탕을 받아 들고는 로렌스의 위로 날아갔다.
“거지 너! 당장 내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아빠한테 다 이를……!”
험악한 얼굴의 로렌스가 아무 벽이나 노려보며 같잖은 협박을 내뱉는 찰나.
<하나요-!>
경쾌한 외침과 함께, 로렌스의 머리 위로 분홍색 사탕 하나가 뚝 떨어졌다.
“아야! 뭐, 뭐……!”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로렌스가 제 머리를 감싸 쥐며 겁에 질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둘이오-!>
그리고 곧장 연이어 날아드는 색색의 사탕들.
“아아악! 엄마아! 아빠아아아!”
셋, 넷, 다섯.
경쾌하고도 따갑게 떨어지는 사탕 비를 몸소 겪은 로렌스가 기겁하며 저택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는 어느 차원에서 악령을 쫓곤 한다는 퇴마사라도 된 것처럼 토미가 로렌스를 퇴치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사과를 한입 가득 우물거렸다.
아, 달다, 달아.
* * *
만족스럽게 식사를 끝마친 후,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저택의 별채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원래는 자작 일가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곳이지만, 나를 제외한 이들은 도서관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중이라 현재는 반쯤 버려지다시피 한 곳이다.
그래서 가끔 남들의 눈을 피해 이곳을 제 휴식처로 삼거나, 밀회 장소로 쓰려는 사용인들이 있긴 한데…….
<에비!>
“꺄, 꺄아악!”
“으악!”
저렇게 토미가 몸을 한번 통과해 지나가기만 해도 머리털을 쭈뼛 세우며 사라지니 문제없음!
<좋아. 준비됐지?>
이곳에서 노닥거리던 사용인들을 쫓아낸 토미가 돌연 눈빛을 달리하며 날 바라보았다. 나 또한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자.”
이후로 이어진 것은, 아주 아주 무지막지하고…….
<소리가 작다! 더 크게!>
“이런 조카 크레파스 18색에 쌈 싸 먹어도 모자란 놈!”
<좋아! 계속해!>
힘겨우며…….
<자작은?>
“개새끼!”
<로렌스!>
“나쁜 놈!”
<맞아! 자작이든 공작이든, 절대 굽히지 마! ‘님’자도 다 떼 버려!>
인고의 연속인 시간이었다.
토미와의 뼈를 깎는 자존감 향상 훈련을 마친 후, 노을이 질 무렵 본채로 돌아왔다.
우리는 익숙하게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서 본채의 2층, 복도 가장 끝에 있는 초상화실로 들어갔다.
“콜록.”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먼지를 손으로 휙휙 휘저으며 초상화실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걸음이 멈춘 곳은, 나와 꼭 닮은 은빛 백금발에 짙은 청록색 눈을 지닌 여인이 그려진 초상화 앞이었다.
짙은 감색의 커튼이 드리워진 배경 앞, 홀로 외롭고도 고고하게 서 있는 이피아 오블렌의 초상화.
“먼지 쌓였네…….”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그림 위에 앉은 먼지를 입바람으로 조심스럽게 털어 냈다. 그리고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말없이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자니 토미가 조용히 속삭였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응. 나도 알아.”
그래서 더 보고 싶고.
나는 뒷말을 목 안으로 밀어 넣으며 그저 침묵했다.
‘보고 싶다’라는 말을 입 밖에 냈다가는 괜히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토미는 내가 삼킨 말을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곁을 지켜 주었다.
그것이 못내 고마웠다.
우리는 묵념하듯 잠시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나는 묘하게 침체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표정을 가다듬으며 내일은 로렌스가 간식을 어디에 숨겨 둘까, 하고 입을 열려고 했다.
“야, 거지.”
그때였다. 복도의 저편, 계단 바로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이 저택에서 저 목소리, 저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것은 단 한 명뿐이다.
“로렌스.”
그리고 저 오동통한 뱃살도. 흔한 건 아니지.
“너, 너…….”
계단 앞에 버티고 서 있던 로렌스가 팔짱을 풀고 내게 다가왔다.
어깨가 크게 들썩이고, 숨이 거친 것을 보아 여간 화가 난 것이 아닌 듯했다.
‘이런.’
오늘 훔쳐 먹은 간식에 특별히 좋아하는 거라도 들어 있었나.
귀찮게 됐다는 생각에 속으로 혀를 차며 그를 바라보았다.
곧 바로 앞까지 다가와 멈춰선 로렌스가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사과해.”
“뭘?”
“거지 네가 오늘도 내 간식 훔쳐 먹었잖아!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로렌스는 두 눈을 부릅뜨며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나는 행여나 사용인들이 이 소리를 듣고 달려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계단 아래를 힐끔거렸다.
‘도망가야 하나.’
떼잉, 쯧. 귀찮게스리.
속으로 혀를 찼다. 로렌스를 상대하다가 괜히 자작이나 카를로타의 눈에 띄느니, 이대로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 듯해서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말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불쌍해서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우리 아빠가 망할 뻔한 자작가를 도와주니까, 네 외할아버지가 고맙다면서 자기 딸이랑 결혼해 달라고 했다는데! 그런 주제에 우리 아빠한테 감사하지도 않고 바락바락 대드니까 벌 받아서 죽은……!”
“뭐?”
<뭐?>
나와 토미의 입에서 동시에 차디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