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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32화 (132/132)

132화. 에필로그 (2)

“라이샤라는 거……. 정말 신기해요.”

“제시드의 경우에는 힘을 쓴 대가가 아예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었다고 하니……. 그나마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 아닌가 싶어.”

“……그렇긴 하네요.”

가이는 트론의 눈치를 살피다가 넌지시 말했다.

“곧, 일어나실 거예요. 약속도 하셨다면서요.”

“응.”

“이따가 보러 가실 거죠?”

“……그럴 생각이다. 서류 확인이 끝나는 대로 갈까 해.”

“제가 괜히 방해했네요. 그럼 아나이테도 전달했고 제 용건은 끝났으니, 돌아가 볼게요.”

“알겠다. 내일 다시 보지.”

“넵.”

가이는 짧게 인사를 남기고 집무실을 나갔다. 트론은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항상, 사무치게 엘피를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일 따위는 모두 집어치우고 그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 충동이 들 때마다, 엘피가 남긴 말이 그를 지탱했다.

“그래도…… 꼭 론한테 돌아올 거야. 약속할게.”

“그러니까 론도 약속해 줘.”

“오래오래 살아서……. 꼭 행복한 성군이 되어야 해.”

그녀 역시 자신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행복한 미래의 가능성을 믿고 회귀라는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엘피의 선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몫이었다.

‘하지만, 엘피. 나는…… 네가 곁에 없으면 행복하지 못해.’

칭송받는 성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황제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는 꿈같은 일은 없지만, 그래도 자신을 지지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그러나 ‘행복한’ 성군이 될 수는 없었다.

엘피 이나드가 곁에 없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엘피는 눈을 떠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

트론이 서류 검토를 끝마쳤을 때는, 어느새 서쪽 하늘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고 마지막으로 중요 서류를 점검한 후, 시종관에게 각 서류를 유관 부서에 넘기도록 지시했다.

업무를 마친 트론은 바쁜 걸음으로 서궁으로 향했다. 지금은 서궁이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삼 왕자 궁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트론이 어린 시절부터 긴 세월을 지낸 그 궁전이었다.

서궁의 모습은 예전의 흔적은 전혀 없이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과거에도 한 번 내부 장식을 싹 바꿨었지만, 현재는 트론의 명으로 아예 개축이 되었다.

지저분하고 어두워 보이던 외관은 고급 대리석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원래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해자는 흙으로 메우고 정원을 넓혔다.

정원으로 들어서자 관리인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트론은 손을 들어 신경 쓰지 말라고 한 후, 정원을 둘러보았다. 벌레에게 먹힌 이파리 하나 없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아직 초봄이지만, 어느새 여린 꽃잎들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굽혀 꽃들을 바라봤다가, 관리인에게 제비꽃을 몇 개 따달라고 요청했다.

관리인은 얼른 정원 가위를 가져와 제비꽃으로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트론에게 바쳤다.

트론은 그의 재빠른 솜씨를 칭찬한 후 궁 안으로 들어갔다. 서궁의 경비는 삼엄했고, 마법과 주술로 이중 삼중 보호되고 있었다. 트론은 몇 개의 결계를 뚫고 회랑을 조용히 가로질렀다.

트론의 목적지는 서궁의 안쪽,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방이었다. 과거에는 그의 침실로 쓰였던 곳이나, 현재는 개조하여 엘피가 편히 잠들 수 있는 방으로 만들었다.

“엘피, 나 왔어.”

밖에서 태양이 더 기울어져, 오렌지색이 방 안을 잔뜩 물들이고 있었다. 고요히 잠들어 있는 여성의 머리칼에 노을이 반사되어 붉게 반짝였다.

트론은 의자를 끌어 엘피의 머리맡에 앉았다. 습관처럼 주술로 그녀의 몸 상태를 확인했으나, 역시 바뀐 점은 없었다. 살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생체 활동이 없는 기이한 상태였다.

“어느새 봄이 왔어. 제비꽃이 잔뜩 피어 있더라. 엘피는, 꽃을 보는 걸 좋아했지. 안에만 있으면 답답할 것 같아서 가져왔어.”

트론은 자그마한 꽃다발을 엘피 옆에 놓았다.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오랜만에 루베인이 방문했어. 르터바이스 경도 와 있는 김에, 내일 같이 식사할 예정이야. 아마 예전 같았으면 엘피가 놀랐겠지? 내가 그 사람들하고 나서서 교류를 하다니, 하고.”

“…….”

“사실은 엘피에게 칭찬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너라면 분명히 기뻐해 줄 테니까. 아니다. 이렇게 계산속으로 교류하는 거 알면, 실망하려나? 말하지 말 걸 그랬네.”

그가 던지는 실없는 농담에 후후 웃어 주던 사람은 반응하지 않았다. 트론은 엘피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엘피. 나는 작년 가을에 스무 살이 되었어. 하지만 엘피는 계속 스물한 살이네.”

“…….”

“이대로 내 생일을 넘기고, 또 넘기면…… 내가 엘피보다 오빠가 되어 버릴 거야.”

함부로 만지는 것조차 아까운 듯, 트론은 그녀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그러다가 아저씨가 되면, 어쩌지? 그래도 나랑 같이 있어 줄 거야?”

“…….”

“……엘피.”

담담하게 소곤거리던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 옆에…… 있어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되고 나서라도…… 내가 죽기 전에만 꼭, 일어나 줘.”

엘피를 들여다보던 그의 검은 눈에 눈물이 맺혔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턱 끝에 머물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톡 떨어졌다.

눈물은 그녀의 코 위에 앉았다가 주르륵 옆으로 흘러내렸다.

“아, 미안…….”

트론이 사과하며 그녀의 얼굴에 떨어진 물기를 닦아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 있던 인형이 태엽을 감아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느릿하고도 어딘지 어색하게.

엘피가 서서히 눈을 떴다.

“……?”

트론은 순간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이 몇 번 깜빡였다. 흐릿해진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찾기 시작했다.

“왕…… 자님?”

맑은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트론은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녀를 부르고 싶었다.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벅차오르는 감정에 목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보다 먼저 눈이 반응하여, 뜨거운 액체가 뺨을 적시는 것만 멍하니 느낄 뿐이었다.

“저, 전하! 왜 우세요!”

“……엘, 피?”

겨우겨우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엉망이었다. 트론은 그대로 엘피를 꽉 안았다.

그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를 마주 안았다.

“아…… 혹시, 시간이 많이 지난 건가요?”

“……응. 2년 반쯤.”

엘피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를 긴 시간 혼자 둔 미안함과 괴로움이 교차하는 얼굴이었다.

“죄, 죄송해요. 더 빨리 깨어나면 좋았을 텐데…….”

“괜찮아. 괜찮아…….”

무언가 더 할 말이 있었을 텐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저 짧은 단어뿐이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트론은 그저 품 안에 있는 그녀의 체온을 확인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아냐. 엘피.”

“네.”

“이제 계속, 곁에 있어 줄 거지?”

엘피는 굳게 끄덕이며 그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물론이에요. 이제 마지막까지 쭉, 함께 있을게요. 왕자님.”

“응. 그런데…….”

트론은 엘피에게서 몸을 떼며 눈물을 닦았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제는 왕자님이 아니야.”

엘피는 뒤늦게 깨달은 얼굴로 외쳤다.

“아…… 앗! 그러게요, 2년 반이나 지났으니 이제 국왕 폐하가 되셨겠어요!”

엘피의 얼굴이 감동과 기쁨으로 물들었다.

그간 트론이 겪어 온 험난한 과정과 괴로운 일들이 떠올랐다. 그 과정을 거쳐, 그가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 왔다.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국왕 폐하!”

“아니. 아쉽게도 국왕 폐하는 아니야.”

“네……?”

엘피가 당황한 얼굴을 하자, 트론은 그녀의 뺨에 키스하며 살며시 속삭였다.

“나는 이제 황제야. 그리고 이제 엘피는, 나의 황후가 될 거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엘피가 입을 뻐끔거리는 것을 보며 트론은 장난에 성공한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두 사람의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여름을 지나, 가을을 건너, 겨울을 견디고 봄이 찾아오듯이.

***

황궁 앞 광장은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은 모두 손에 노란 꽃을 쥐고 곧 이어질 행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병들은 안전을 위해 계속 바쁘게 움직였다.

광장 가장자리에는 탐스러운 노란 금계국이 잔뜩 피어 있었다. 국혼 때문에 일부러 옮겨 심은 꽃들이었다. 여름에 어울리는 그 풍경은 생기가 넘쳤다.

금발의 여성이 창문 너머 광장에 사람 수가 늘어나는 걸 보고 있다가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으아아, 어떡해. 내가 다 긴장돼.”

평소와 다르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루베인이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연회복 차림의 제시드가 웃었다.

“루베인 님 결혼식도 아닌데 뭘 그래요.”

“내 결혼식은 이 정도로 긴장 안 할 것 같아!”

“……그건 긴장해 줬으면 좋겠는데.”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따가 꽃 던질 때 긴장해서 실수하지나 마세요.”

“……그 소리 하니까 더 긴장되잖아!”

제시드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루베인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진정하려는 모양이었다.

엘피가 깨어난 초봄으로부터 어느덧 시간은 흘러 늦여름이었다.

트론은 가능한 한 빠르게 국혼을 추진했으나, 무엇보다 엘피의 건강 상태를 우선했다. 그래서 몇 달을 기다려 그녀의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늦여름인 오늘 드디어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다.

“아, 자식 결혼시키는 기분이 이런 건가 봐. 심지어 나는 둘 다 내 자식 같잖아. 어떡해, 벌써 눈물 나.”

“……긴장하다가 이제는 두 사람의 가상 부모님이 된 건가요.”

“기분이 그렇단 거야!”

“네에, 네에.”

“제시드 너, 처음 만났을 때는 오들오들 떠는 병아리 같아서 귀여웠는데. 예전 기억 떠올리고 난 다음에는 귀염성이 없어.”

“그야, 따지자면 루베인 님보다 몇 배는 오래 살았던 셈이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요?”

“애늙은이.”

“별로 타격은 없는 욕이네요.”

그렇게 둘이서 옥신각신하고 있는 대기실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루베인 님, 제시드 님. 두 분도 신랑 신부 못지않게 멋진데요.”

은사가 장식된 남색의 슈트를 본인에게 잘 어울리게 차려입은 가이였다.

“아, 가이 님.”

“며칠 만에 뵙네요, 가이 님.”

“네에. 휴, 그간 결혼식 준비하느라 얼마나 정신없었던지. 신랑 신부 아버지 노릇을 양쪽 다 한 것 같다니까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제시드가 가이와 루베인의 발상이 똑같다며 놀렸다. 루베인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우리보다 더 부모 같은 반응 보이는 사람 저기 있네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기쁨에 넘쳐 계속 울고 있는 사먼이 있었다. 세 사람은 눈을 마주치자마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곧 식 시작합니다. 모두 준비해 주세요.”

“네!”

시종장이 왁자지껄한 대기실로 찾아와 결혼식의 시작을 알려 왔다.

이 나라에서 가장 축복받는 한 쌍의 연인이, 곧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 순간이었다.

***

국혼은 스레데니옴 왕국 시절의 교단이 주최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황제와 황후는 황궁에서 광장의 중앙까지 이어지는 긴 버진로드를 걸어갈 예정이었다.

행진 중에는 친지들과 고위 귀족, 관리들, 그리고 백성들이 노란색 꽃송이를 던지게 되어 있었다. 신랑 신부의 행복을 기원하는 축복의 의미였다.

이는 일반적인 백성들의 결혼식을 큰 규모로 옮겨놓은 듯한 형태였다.

라이아헬 제국이 과거의 왕국과는 다르며, 교단의 인정을 받던 종교적인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또한, 제국에서 치러지는 첫 국혼이라는 의미 있는 행사를 떠들썩한 축제로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다. 광장에 온 모든 이가 이 국혼의 하객인 셈이었다.

엘피는 트론과 손을 마주 쥐며,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실감이 안 나요, 폐하.”

“괜찮아. 나도 그러니까.”

“그건 안 괜찮은 거 아닌가요…….”

트론은 그저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며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깨 라인을 감싸는 섬세한 레이스에 과하지 않은 보석들이 영롱하게 빛을 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풍성한 치맛자락은 마치 한 송이의 꽃 같았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트론도 황제의 정복에 화려한 장식을 더한 우아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황궁의 정문이 열렸다. 이 나라에서 가장 축복받는 신랑 신부가 수많은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열렬한 함성과 박수를 두 사람에게 보냈다.

“축하합니다!”

“축하드려요!”

황궁 정문에서 결혼식을 치를 단상이 있는 광장 중앙까지 길게 버진로드가 깔려 있었다.

두 사람이 버진로드를 걸어가자, 하객들이 그들을 향해 노란색 꽃송이를 던졌다. 황궁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하객은 트론과 엘피에게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루베인이 반쯤 울먹이며 꽃을 던지는 것을 보고, 엘피는 그제야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있잖아, 론.”

“응.”

“처음 회귀해서 돌아왔을 때, 나는 온 세상의 여름이 모두 론의 것이 되었으면 했거든.”

“온 세상의 여름?”

“따뜻하고, 아름답고, 반짝이고, 화사한 것을 모두 론이 가졌으면 했어.”

엘피는 트론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그런데 이렇게 노란 꽃이 뿌려지는 사이에 있으니까, 정말 그렇게 된 것 같아서 기뻐.”

그녀의 말을 듣고 트론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렇다면 나의 여름은, 엘피일 거야.”

그 대답에 엘피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행복이 그곳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의 마무리를 현실로 만드는 것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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