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에필로그 (1)
5년간 비어 있던 왕좌가 주인을 찾은 가을이 지나고, 데니옴에는 어느새 봄이 찾아왔다.
이번 봄에는, 사형 집행이 결정되어 있었다.
세 명의 공작이 세틱스를 등에 업고 사병을 양성하여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것을 미리 파악하고 상황을 진압한 트론은, 그들을 법대로 처리했다.
내란 행위는 명백했고, 변호의 여지도 없었다. 재판 과정은 지루할 정도로 길었으나, 결국 가장 극형인 사형으로 결정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공작인 칼퍼 마그달리사는 딜에게 작위를 넘기고 일찍 은퇴했다.
여러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는지, 혹은 만사에 지친 것인지는 본인만 알 일이었다.
공작령이 세 곳이나 비어 버린 것은 긴 스레데니옴 역사 중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또한, 변경령 백작이었던 르터바이스에게 대공 작위를 내리고 그 영지를 공국이라는 형태로 편입하게 되면서 기존의 왕국 체계로는 급변한 상황에 맞추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에 따라, 트론은 기존의 스레데니옴이라는 성과 나라의 이름을 버렸다.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 아닌,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으로서 시작하기로 했다.
「위대한 시작에는 새로운 급류가 필요한 법이다. 우리는 더 위대한 나라의 일원이 될 것이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라이아헬’이 되었다. 고대어로 ‘빛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르터바이스 공국, 마그달리사 공작령, 그리고 영주가 비게 된 세 곳의 영지에 지방 관리를 파견하는 자치 체계.
귀족 의회와 평민 의회의 창설.
기존에 평민이나 주술사에게 차별적이었던 법률의 재창제.
새로운 나라의 시작이었다.
시행착오와 충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트론이 주술사라는 사실을 밝힌 후 큰 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트론은 인내로 견디며,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했다. 더 많은 사람이 아파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방향을 찾기 위하여.
그토록 숨 가쁘게, 2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러갔다.
***
“폐하, 오랜만.”
트론은 손을 팔랑팔랑 저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여성을 보고 무표정하게 답했다.
“3개월 만이군. 하긴, 그쪽도 바빠서 정신없으니 그럴 만한가.”
“그야 그렇지. 어휴, 삭신 쑤셔.”
그녀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번에 예산 건 때문에 한바탕했다고 들었는데.”
“아, 진짜 짜증 나! 의원 자식들, 복지 예산에 은전 하나 더 보태는 것도 싫다고 파르르 파르르. 다 암살해 버리면 안 돼, 폐하?”
“안 돼.”
“……진지하게 답하지 말고. 퇴출할 방법 없어?”
“그 부분은 제도적으로 보완해 가는 수밖에 없겠지. 활동이 불량한 의원을 소환하는 제도라거나. 행정 부서와 고민은 해 보겠다.”
“지인짜 부탁할게. 귀족 의회에도 미친놈들 많지만, 평민 의회도 만만치 않다고.”
트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루베인은 작위를 고사하고, 준귀족 신분조차 반환하여 평민이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트론이 새롭게 시도한 ‘평민 의회’라는 제도의 기틀을 제대로 잡기 위한 부분이 컸다.
물론 귀족 출신인 그녀에 대한 텃세도 있고,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루베인은 투덜대면서도 난관을 잘 헤쳐 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법률이 바뀌어 평민도 성을 가질 수 있지만, 루베인은 마그달리사라는 성을 버린 후 일부러 성을 만들지 않고 있었다. 성이 없는 평민으로서 끝까지 상징적인 위치를 유지한다는 모양이었다.
어떤 일이든 험한 길만 골라서 가는 자신의 친구이자 신하가 든든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그녀와 잡담을 섞어 업무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트론은 슬며시 떠보듯 물었다.
“……제시드는?”
“음, 숙소에 있어. 아무래도 제시드는 계속 폐하 얼굴 보기 미안해하니까.”
2년 전 제시드는 엘피가 정신을 잃으면서 힘이 공명한 영향으로 회귀 전의 일들을 모두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트론이 황제가 된 후에 루베인을 보좌하며, 때때로 트론에게 부탁받은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트론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수행했지만, 항상 그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꺼렸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는 않지.”
“오히려 나는 예전에 제시드와 그대의 원수였던 것 아닌가. 마찬가지야.”
“하하, 나나 폐하는 실감이 없으니 그게 쉽겠지만. 아무래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의 감각은 다르지 않으려나. 엘피 언니가 깨어나고 나면…… 그때 다 같이 얼굴 보자.”
“……그래.”
엘피의 이름이 나오자 트론의 표정이 흐려졌다. 루베인은 아차 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가, 수습하듯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괜찮아, 언니는 곧 일어날 거야!”
“응.”
“그때 폐하가 건강한 모습 보이지 않으면, 언니가 얼마나 놀라겠어. 그러니까 식사 꼬박 먹고, 건강 잘 챙겨.”
“……그대는 내 부모인가?”
“누나라고 쳐.”
“미안하지만, 일생에 누나는 단 한 사람이면 족해서.”
“아하하.”
루베인은 맑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있잖아, 폐하.”
“응.”
“1차 데니옴 회의 전에, 내가 가출했을 때 말이야. 전하에게 힘을 빌려주기로 하면서 이야기했었잖아. 그때 우리가 나눴던 대화, 기억해?”
“……기억하고 있다.”
“전하는 아직 괴물이 된 건 아니잖아.”
“…….”
“왕이 되면 하고 싶은 일, 없다고 했지. 그럼 앞으로 찾아보는 게 어때?”
“하고 싶은 일은 없지만, 왕이 되고 나서 내가 하게 될 일들은 있을 거다. 그리고 그건 그대가 원하는 방향은 아닐 테고.”
“그건 모르는 거잖아. 전하,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야.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
“나는 전하가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 것에 걸고 싶어. 적어도, 지금 전하는 헤럴드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인걸. 그러니까 헤럴드가 아니라 트론 전하가 왕이 되었으면 해.”
“난 폐하가 괴물이 되지 않아서 정말 기뻐.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네.”
“글쎄. 그럴싸한 인간 흉내를 내는 것뿐, 속내는 괴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엘피를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루베인은 별소리를 다 들었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폐하는 범생이라니까. 있잖아, 폐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고 있어. 나도 평민 의회 너구리 놈들을 죄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고.”
“그건…….”
“본심이 어떻든 옳은 방향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그 자체가 폐하의 인격이고 본질인 거야.”
그 말을 들은 트론이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쑥스러워서 그러는 모양이었지만, 그녀는 깊이 파고들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식사 모임 내일이었지? 가이 님은 내일 맞춰서 오나?”
“아니, 오늘 오기로 했는데 늦는 모양이군.”
“그렇구나, 나도 내일 보지 뭐. 그럼 폐하, 내일 식사 모임 때 다시 봐.”
“그래. 나는 정말 괜찮으니, 제시드도 가능하면 오라고 전하도록.”
“소용없을 것 같긴 하지만, 일단 말은 꺼내 볼게!”
그녀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남기고 집무실을 나갔다. 트론은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했다가 다시 서류에 파묻혔다. 오늘은 몰린 일을 해치워 버리고, 오후에 서궁에 들를 예정이었다.
일에 몰두하는 시간이 좋았다. 일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잡념을 떨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약속, 지키고 있어. 엘피. 그러니까…….’
잠시 약한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 없었다. 꼭 다시 만날 것이다.
그렇게 한참 업무를 해치우고 있으려니, 집무실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트론이 그쪽을 보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의 허락을 받고 문이 열리자마자, ‘구구’ 하고 새가 우는 소리가 났다.
“……아나이테?”
“아나이테 말고 저도 환영해 주세요!”
이전보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얼굴에서 전혀 세월이 느껴지지 않는 은발의 청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와 맞지 않게 날짱거리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르터바이스 경.”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부르실 거예요. 이 형은 너무나 가슴이 아파요.”
“앉기나 하지.”
트론의 어깨에 앉은 아나이테가 그의 뺨에 깃을 비볐다. 트론은 아나이테의 정수리를 톡톡 쓰다듬으며 소파에 앉았다.
“저보다 아나이테랑 더 정이 쌓이신 것 같은데, 착각인가요?”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진짜 너무하시네!”
가이는 툴툴대면서도 아나이테에게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 것을 설명했다.
7년 전쯤만 해도 단순히 메신저 기능밖에 없었던 아나이테는, 현재 웬만한 얼치기 마법사보다 유능한 존재였다.
“……뭐, 대충 이상입니다. 사실 이제는 폐하께서 그런 기능 쓰실 일 있나 싶지만요. 가끔 심심하면 가지고 놀아 주세요.”
“가지고 놀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일단은 고맙게 받아 두지.”
“내일 루베인 님한테도 기능 추가된 크헤룬을 드릴 거지만, 솔직히 그쪽도 제시드 님이 있으니 뭔 소용인가 싶고요. 어휴, 연구하는 보람 없게시리.”
가이는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대는 연구는 그만하고 신붓감을 찾는 게 좋지 않겠나? 르터바이스 대공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던데. 대공은 은퇴하고 싶은데, 그대가 받아들이지를 않는다면서.”
“으음.”
가이는 자신의 옆머리를 쭉쭉 잡아당기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 결혼 안 할 거예요.”
“……. 일단 이유는 묻도록 할까.”
“사실 저는 공국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렇지만 대공 전하의 뜻을 꺾기는 힘들 거 같아서, 조만간 물려받기는 할 건데요.”
“응.”
“저는 이후로 대공 작위를 세습으로 물리지 않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려고 해요.”
“……새로운 방식?”
“생각해 보면, 제 자식이 반드시 좋은 위정자가 될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애초에 저희 전하 밑에서 저 같은 아들이 튀어나온 걸 보면 알 수 있죠.”
“…….”
트론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가이는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래서, 영지 내의 귀족들이 선거를 해서 뽑는다거나……. 아무튼, 그 자리에 오를 만하다고 다수의 사람이 인정하는 방식을 모색할까 싶어요.”
“공국으로 독립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것인가.”
“뭐, 그렇지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한테 자식이 있으면, 다들 눈치를 봐서 그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채 세습으로 흘러갈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로군.”
“네. 어차피 한 사람과 영원을 맹세하는 일 따위, 저로서는 어려울 것 같고요. 저희 부모님이나, 아니면 폐하 같은 별종이나 가능한 일 아닐까요.”
가이가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뜻은 트론으로서도 여러 가지 생각되는 바가 있었다.
“그래. 고민하고 내린 결론이라면, 나도 지지하겠다.”
“그럼 저희 전하 잔소리 그만하시라고 말려 주세요.”
“그건 그대가 알아서 해.”
“진짜 정 없으시다니까!”
트론은 그를 상대하는 대신 아나이테를 품에 안았다. 가이는 투덜대다가 머리칼에서 손을 떼었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요.”
“응.”
“폐하야말로 빨리 혼인하셔야 할 텐데 말이에요.”
“…….”
“상대분께서 너무 폐하를 애태우시네요.”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따스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트론은 화내지 않고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저도 엘피 님의 몸 상태는 시간 나는 대로 계속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일반적인 상태가 아니라서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요.”
“주술로 봐도 마찬가지야. 일단, 생명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제시드도 그녀가 라이샤였기 때문에 특수한 상황일 거라고 추측하더군.”
엘피는 2년 전 트론에게 마지막 약속을 남기고 잠든 이후 계속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식물인간과 같지는 않았다.
비유하자면 ‘멈춰 있는’ 상태였다. 머리칼이나 손톱 발톱도 자라지 않고, 노화하지도 않는다. 영양을 공급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엘피는 스물한 살이었던 그 시절 그대로 고요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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