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7)
잠시 침묵하던 트론은 결국 고민 끝에 꺾여 주었다.
“알겠다, 허가하지. 두 사람에게 접촉할 때 그대를 데려가도록 이야기해 두겠다.”
“……알겠습니다, 전하!”
성과를 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트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기뻤다.
엘피는 트론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트론은 조금 뚱한 얼굴을 했다.
“가능하면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장시간 자리를 비우기는 어렵겠군.”
“이런 상황이니 어쩔 수 없죠. 잘 다녀올게요. 전하.”
“…….”
트론은 책상에서 일어나 엘피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엘피는 생각지 못한 접촉에 몸을 굳혔다.
“……가기 전에.”
“아, 넵!”
“조만간 시찰 겸 잠행을 나갈 예정이거든. 남방군과 대치 중인 근교에 다녀올 거야.”
엘피는 숨을 훅 들이켰다. 남방군은 현재 적이 된 세틱스 진영을 일컫는 말이었다.
적군이 주둔하는 접경지 근방에 간다니, 무언가 심각한 일이 발생한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 위험한 일은 아니야. 아직 우리 군이 우세해서 형님도 섣불리 공격하진 못할 거고……. 분위기를 살피고 올까 해.”
“그 근처 도시 같은 곳 말씀이실까요?”
“응. 아무래도 접경지에서는 멀어서 안심하고 있는 데니옴과 달리 남방군과 가까운 소도시나 마을은 동요가 클 테니까. 계속 보고는 받고 있지만,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꼭 잠행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시기가 시기다 보니 내 동선은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게 좋고, 윗사람이 온다고 하면 그쪽에서도 의전이니 뭐니 난리가 날 테니까. 조용히 갔다 오는 게 낫다.”
엘피는 자신이 생각이 짧았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론은 몸을 숙여서 엘피와 눈높이를 맞춘 후 속삭였다.
“그래서 며칠 정도 다녀올 건데, 그 후에 엘피도 떠나면 한동안 얼굴을 못 보니까……. 같이 갈래?”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트론이 있다는 사실에 두근거렸다.
하지만 엘피는 애써 그런 잡념을 털어 내고 시녀장으로서 충실하게 답했다.
“당연하죠! 전하께서 멀리 가실 때 시중을 드는 게 제 일인걸요.”
하지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보람도 없이, 트론은 엘피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찍었다.
“……쉬러 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무리하지 마.”
“저, 전하야말로 무리하지 마세요.”
“후우.”
트론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 걸음 떨어졌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해.”
“네, 왕자님.”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나 걱정하며 엘피는 고개를 숙였다.
‘……예전에는 별생각 못 했는데, 전하는 정말 사람이 오해할 만큼 스킨십이 과도해.’
물론 그게 싫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힘든 것뿐이었다.
그녀는 손부채질을 하며 얼른 집무실을 나섰다.
***
현재 세틱스 휘하의 남방군이 이끄는 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은 데니옴에서도 열차를 타고 반나절 정도 이동해야 하는 도시인 데이센느 부근이었다.
본격적인 충돌은 없지만 내전 체계로 접어든 현재, 마그달리사령을 제외한 다른 곳으로 연결되는 열차는 중단된 상태였다. 데니옴에서 출발한 열차도 데이센느가 종착역이었다.
“엘, 조심해서 내려.”
트론이 먼저 플랫폼에 착지하여 손을 내밀었다. 엘피는 머뭇거리며 그 손을 잡고 열차에서 내린 후 얼른 손을 떼었다. 트론의 얼굴이 조금 불만스러운 듯 뚱해졌다.
그는 주변 시선을 피할 때 흔히 그렇듯이 깊숙이 후드를 뒤집어쓴 허름한 검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보통 왕궁에서 차려입은 모습에 익숙한 터라 조금 신선했다.
얼마 전에 웰칸 쪽으로 납치당했을 때도 이런 옷을 입었지만, 그때는 워낙 정신이 없었고 잠들어 있는 시간이 길어서 의식하지 못했다.
엘피 역시 무척 단출한 옷을 입고 있었다. 트론과 달리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옷만 평범하게 입을 예정이었지만, 트론의 반대로 차양이 있는 모자를 쓰게 되었다.
위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트론이 남들에게 엘피의 얼굴을 보여 주기 싫었기 때문이었지만, 엘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데이센느에 론이랑 이렇게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네. 저번에는 환승하느라 잠깐 들른 정도였지만…….”
“응. 두 번 다 좋은 일로 온 건 아니라서 좀 씁쓸하네.”
엘피는 납치당했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트론의 곁을 천천히 걸어갔다. 개찰구를 빠져나가니 역사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승객 자체가 드물기도 했지만, 위병들이 각을 잡고 경계를 하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트론을 수상하게 여긴 것인지, 위병 하나가 바로 신분패를 요구했다.
위장을 위해 미리 마련했던 가짜 신분패를 보여 주자, 한참을 살펴보더니 두 사람을 바깥으로 보내 주었다.
열차역 앞 광장도 한산한 편이었다. 데니옴도 내전 체제 이후 분위기가 경직된 편이었지만, 접경지에 가까운 데이센느는 확연한 온도 차가 피부로 느껴졌다.
“일단 숙소부터 잡자. 잠행으로 온 거라 사전에 안 잡아두었거든.”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우리만 따로 다녀도 괜찮아?”
“사먼이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고…… 아나이테도 있으니까. 웬만한 일에는 대처할 수 있도록 해 놨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엘피가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트론이 손을 끌어 잡았다.
꽉 잡은 손이 의식되었다. 벌써 먼 과거의 일이지만, 트론과 도망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어디를 가든 그와 손을 잡고 걸었다. 자그마한 그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어쩐지, 예전 일이 생각난다.”
그녀가 잡혀 있는 손을 꿈지럭거리며 속삭였다.
“그러게. 예전에는 손잡고 걷는 일 많았는데. 엘이 미아가 될까 봐 말이야.”
“아니야, 론이 걱정되어서 그런 거라니까!”
“하하.”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에도 트론은 딱 부러지고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어쩌면 자신의 필사적인 보호 같은 것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시,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은 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트론이 불편한 일은 없는지, 힘들지는 않은지, 더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는지 고민하며.
지금의 감정은 그때의 친애와는 또 달라져 버렸지만,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전시 상황에 문을 닫은 곳이 많아서, 숙박업소는 한정되어 있었다. 도시에서 가장 유서 깊은 호텔과 몇몇 허름한 숙소 외에는 당장 묵을 곳이 없었다.
엘피는 허름한 숙소도 괜찮다고 했지만, 트론이 인상을 쓰며 반대했다. 그녀를 불편한 곳에서 재울 수는 없다는 게 그의 변이었다.
그래서 그의 뜻대로 호텔로 가 봤더니, 예상한 일이었지만 카운터 직원이 두 사람의 옷차림 때문에 평민으로 오해했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당 호텔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좋게 포장한 문전박대였다. 트론은 생긋 웃으며 귀족패를 내밀었다.
“요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내밀하게 움직이고 있네. 청구는 이쪽 가문으로.”
그가 내민 귀족패를 보자마자 직원은 당황하여 허리를 굽혔다.
“죄, 죄송합니다! 그만 무례를……!”
“괜찮아. 눈에 띄고 싶지 않으니 조용히 처리해 주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윽고 둘이 호텔의 가장 윗층에 있는 스위트룸에 안내받을 때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간략하게 시설 사용 안내를 받고 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트론은 후드를 벗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엘피는 그의 건너편에 마주 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귀족패는 언제 준비했어? 나한테 말해 줘도 됐는데.”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필요할 거 같았는데, 나는 왕족이라 따로 신분패가 없어서. 소백작이 즐거워하며 준비해 줬어.”
엘피는 가이가 대체 무엇 때문에 즐거워한 것인지 아리송했다. ‘결혼 전에 신혼여행부터 다녀오시게요?’ 하고 깐족거리다가 한 대 얻어맞은 것은 트론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내일 아침에 데이센느를 한 바퀴 돌면서 전반적인 방위 체계를 확인하고, 접경지 근처까지 이동할 생각이야. 내일은 강행군이 되겠지만, 오늘은 푹 쉬어도 돼.”
“알았어! 그럼, 그 전에 저녁 먹어야겠다. 뭐가 좋을까…….”
그가 선호하는 음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엘피는 편히 먹을 음식이 뭐가 있을지 고민했다.
엘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음식을 챙기려 하자, 트론도 따라 일어났다.
“어, 쉬고 있어. 내가 준비할게. 룸서비스 불러도 되니까.”
그는 대답 없이 성큼성큼 엘피에게 다가가더니, 뒤에서 꽉 안았다.
“로, 론?”
“왕궁 아니니까 멀리 떨어지지 마.”
어딘지 토라진 듯한 말투로 뱉어 내고는,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턱을 얹었다.
평소에도 그녀를 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을 때도 종종 있지만, 뒤에서 숨결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허리를 두르고 있는 그의 단단한 팔이 의식되었다. 그냥 품에 안길 때와는 달리,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들린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이 묘하게 고양되고, 또한 부끄러웠다.
“떠, 떨어지려는 거 아니야.”
“그럼 계속 옆에 있어.”
“……알았어. 일단, 놓아줘. 앉을 테니까.”
“싫어. 안 놔줘.”
그는 어린아이일 때도 이렇게 투정을 부린 적이 없었다.
‘……왜 이렇게 귀엽게 구는 거람.’
어른이 다 된 그가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 것이 귀엽게 느껴지다니 아무래도 자신은 중증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붙어 있는 것은 민망했다.
엘피가 버둥거리며 벗어나려고 하자, 트론이 그것을 막는 것처럼 더 꽉 붙들었다.
“가지 마.”
“읏…….”
가슴이 다시 세차게 뛰었다. 요즘에는 심장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이럴 때가 많았다. 전부 트론 때문이었다.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가 건네는 말을 괜히 달콤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 오래 함께 있고 싶고, 닿아 있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엘은, 이렇게 있는 거 싫어?”
“서, 설마! 나도 론이랑 함께 있는 거 좋아해.”
“다행이야.”
트론은 자신의 입술을 엘피의 어깨에 살며시 댔다. 부드럽고 뜨거운 감촉이 몇 번이고 닿았다가 떨어졌다.
“자, 장난 그만 치고 저녁 먹어야지. 론.”
얼굴이 홧홧해지는 감각을 간신히 누르며 엘피가 말을 돌렸다. 그가 뒤에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트론은 잠시 입술을 떼고 고개를 저었다.
“별로 배 안 고파.”
“건강 해친다니까는.”
“한 끼 안 먹는다고 안 죽어. 그리고…….”
그의 입술이 목덜미까지 올라갔다. 엘피는 몸을 굳히며 간질간질한 감촉을 간신히 참았다.
“엘이랑 둘이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게 싫어.”
“론…….”
“……엘은 안 그래?”
“아냐……! 나도, 론이랑 있는 시간이 가장 소중해.”
트론의 말이 너무도 기뻤다. 또한 너무나 두려웠다.
그와 이렇게 가까이 있다가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때도 힘들었지만, 자신의 마음에 자각이 없었기에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없이 그를 원하고, 사모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이 거리가 익숙해진 다음, 떨어져야 하는 날이 올 때 과연 온전히 물러날 수 있을까. 온몸의 피가 밖으로 흘러나가는 듯한 참혹한 기분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엘피는 불안함을 숨기듯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가기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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