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2)
“……시녀장이 신세를 졌다지.”
“하하, 한 방 먹었었죠. 가능하면 오랜만에 영애에게 인사라도 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불허하겠다.”
잠시 인사를 시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텐데도, 트론의 반응은 단호했다.
지극히 차분했던 그가 감정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딜은 소리 없이 웃었다.
“아쉽게 되었네요. 아무튼,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알겠다. 이후 연락이 필요한 일은 르터바이스 소백작을 통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담화를 끝내고 딜은 응접실을 나섰다. 그를 내보내고 트론은 복잡한 머리를 정돈했다.
긴급하게 전시를 맞이하게 된 행정 체계와 병력의 운용, 거기에 더해 마그달리사의 힘을 얻기 위한 움직임까지.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각오한 바였다. 오히려 딜의 오늘 제안은 트론으로서도 기꺼운 일이었다.
‘엘피…….’
하지만 딜의 입으로 그 이름을 들으니, 새삼스레 더욱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무런 근심 없이 그녀와 함께 있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이 소모적인 내전을 끝내야 했다.
***
정신없는 트론과는 반대로 엘피의 일은 내전 발발 이후 줄어든 편이었다. 전시에 맞춰 내궁의 인원을 줄이고 최소한의 관리만을 명령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피는 가능한 한 일을 만들어서 하려고 노력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다는 게 슬펐다. 이번 내전이나 루베인이 사라진 일도, 미래를 제대로 읽지 못한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인 것 같아 자책했다.
트론을 자주 볼 수 없는 것도 불안의 원인 중 하나였다. 물론 데니옴 회의 전에도 바빴지만, 갑작스러운 내전 사태에 돌입한 이후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엄중한 상황에서 트론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을 우선할 수도 없었다.
맡은 일을 충실히 하면서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보는 것으로 만족할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따라 사무치게 트론을 보고 싶었다.
‘……이제 밤인데, 집무실에 계시려나? 차라도 갖다 드릴까?’
그의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건강에 좋은 차를 가져가서, 잠깐 얼굴만 보는 것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엘피는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바로 차를 타서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노크를 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무실에 딸린 취침실을 들여다보았다.
예상대로, 간이침대 위에 트론이 지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엘피는 조용히 그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예전에는 자는 얼굴이 앳되어 보였는데, 이제는 완연한 성인의 얼굴이었다. 예리하면서도 선이 굵은 그의 얼굴은 예술품에 가까웠다.
새삼스럽게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신분도, 외견도, 그가 가진 능력이나 총명함에 이르기까지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이도 내가 많고.’
엘피는 자조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자는 것이 신경 쓰여서, 눈 사이를 꾹꾹 눌러 주름을 펴 주었다.
꽤 깊게 잠이 든 것인지, 작은 신음만 돌아올 뿐 깨어나는 기색은 없었다.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의 체온이 닿는 순간이 기뻤다. 그가 가장 마음을 여는 상대가 자신인 것에 우월감을 느꼈다. 이렇게 그를 독차지하고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그 뒤를 생각하면 까마득해졌다. 사소했던 욕심은 점점 커졌고, 불안이 겹쳐졌다.
트론은 그녀에게 더 이상 라이샤의 힘을 쓰지 말라고 명했다.
하지만 라이샤의 능력을 빼면, 자신은 그에게 유능한 부하가 아니었다. 허울 좋은 누나라는 위치 역시 허상이었다. 그다음을 이어갈 무언가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그는 왕이 될 것이고, 또한 비를 맞이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도리를 생각해서라도 그와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런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척 아팠다.
차라리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괜찮았을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전제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보며,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뱉어 낼 수도 없었다. 다정한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트론이 자신을 그런 의미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론도 누나한테 말해 줄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글쎄, 나는 아무도 좋아하게 될 것 같지 않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친누나처럼 생각하는 상대에게 그런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누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삿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목 안이 따끔거렸다.
‘절대로 전하한테 들켜서는 안 돼.’
그가 자고 있는데 이렇게 함부로 들어온 것도 선을 넘는 행동인 것 같았다.
엘피는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응…….”
그때 트론이 웅얼거리며 눈을 비볐다. 엘피는 괜히 그를 깨운 건가 싶어 깜짝 놀랐다.
트론은 멍한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엘피……?”
“아……. 죄송해요, 함부로 들어와서.”
“엘피…….”
트론이 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엘피는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엉겁결에 그에게 안겼다.
예전에 엘피가 트론을 깨우던 시절에는, 잠에 덜 깬 그가 자신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났고, 상황도 달라졌다. 미친 듯이 심장이 뛰고 있었다.
“와, 왕자님…….”
“응…….”
“노, 놓아 주세요.”
“싫어.”
트론은 단호하게 답하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엘피는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굳혔다. 자고 있던 그의 체온은 평소보다 높았고, 맞닿아 있는 몸의 탄탄한 근육과 장난치는 것처럼 목과 어깨에 닿는 입술의 감촉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주무실 거면, 침실에서 편하게 주무시는 게…….”
“응…….”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이 덜 깬 트론은 항상 이런 편이었지만, 예전에 아무렇지 않았던 자신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트론은 낮잠을 자는 고양이처럼 기분 좋은 듯한 숨소리를 내며 엘피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다가 다시 잠들었다.
졸지에 죽부인 신세가 된 엘피는 꾸물꾸물 몸을 빼내려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단단하게 자신을 안고 있는 트론의 팔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속으로 변명하며 살며시 그의 뺨을 만졌다. 다시 잠든 트론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은 여전히 쿵쾅거리고 있었다.
엘피의 입술이 트론의 뺨에 잠깐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도둑 키스라고 하기도 민망한 짧은 입맞춤을 해놓고, 그녀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죄송해요, 전하.’
견딜 수 없을 만큼 그가 좋았다. 그 마음이 미안하고, 떳떳하지도 못했다. 그의 신뢰와 친애를 배신하는 행위 같았다. 긴박한 정세에 이런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럼에도, 사랑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
트론이 눈을 뜬 것은 새벽 즈음이었다. 그는 문득 잠에서 깼다가 순간적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품 안에 무언가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있었다.
어두운 탓에 처음에 무엇인지 구분을 못 했다가, 시야에 들어온 광경을 보고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했다. 엘피가 그의 품에 묻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꿈인가?’
하지만 점차 맑아지는 머리가 그 의문을 부정했다. 그러고 보니 중간에 잠깐 깼을 때 엘피가 방에 들어왔던 것 같기도 했다. 예전 버릇대로 잠결에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트론은 한숨을 뱉고 싶어졌다. 이렇게나 자제력이 없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깨울 수도 없어서 더 편하게 잘 수 있게 몸을 틀어 준 후,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계속 곁에 있기 위해, 그녀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엘피에게 행복한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강요나 속박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고 싶은 것뿐일지도 모른다.
‘엘피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만약 청혼을 거절당한다면, 그 이후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었다.
무언가 결실이나 형태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낸다면 충분했다. 때때로 활짝 웃는 미소를 보여 준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트론은 조심스럽게 엘피를 안았다. 달콤한 향이 나는 정수리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깨지는 것을 다루는 양 그 동작은 부드러웠다.
“읏. 아…….”
“깼어?”
“저, 전하…….”
엘피가 품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트론은 팔을 풀지 않고 달래는 것처럼 등을 쓸어 주었다.
“미안. 내가 잠결에 엘피를 귀찮게 했나 봐.”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깜빡 잠이 들어 버려서, 죄송해요.”
“엘피가 사과할 일이 아닌걸.”
그녀의 몸이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싫어하는 기색이니 놓아주는 게 맞겠지만, 엘피를 떼어 놓는 것이 아쉬웠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주무세요. 저, 저는 처소로 돌아가 볼게요.”
“……더, 같이 있으면 안 돼?”
“웃…….”
엘피가 완전히 굳어 버렸다. 무리한 부탁을 했나 싶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귀 끝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왕자님한테, 폐가 될까 봐…….”
“소문 같은 거 말하는 거야?”
“네…….”
트론은 그녀의 머리칼을 쥐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의 손이 귀에 닿자, 엘피가 바르르 떨며 눈을 꽉 감았다. 그녀의 반응이 애처로웠지만, 묘하게 마음을 자극했다.
트론은 귀에서 손을 내려 턱선을 어루만졌다. 엘피가 무언가를 견디는 것처럼 트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며 트론은 얼굴처럼 빨개진 엘피의 목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 어째서…….”
“……이제는 계속 엘피랑 같이 있을 거니까. 엘피도 그러기로 했잖아?”
엘피가 트론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것이 무엇보다 긍정을 뜻하는 것 같아서, 트론은 작게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계속 있어 줄 거지?”
“무…… 물론이에요!”
“응. 그러니까 여기 더 있어 줘.”
엘피는 함정에 빠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 함정이 지나치게 달콤했다. 착각에 빠질 만큼.
그래도 잠깐이나마 이 시간을 음미하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바쁘고 긴박한 아침이 돌아올 것이다. 그때는 싫어도 그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결심하고 자신의 무게를 트론 쪽으로 더 실었다. 그는 칭찬하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계속, 옆에 있을게. 론.”
“응. 어디 멀리 가면 안 돼?”
“안 그럴게.”
그가 왕이 된 후 거리가 멀어질 미래의 일을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품에 안겨 두근거리는 이 시간이 언젠가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엘피는 욕심껏 그를 꽉 안았다.
“론, 내일도 바쁘지? 더 안 자도 돼?”
“피곤하지 않으니까 괜찮아. 더 바빠지긴 하겠지만. 마그달리사 소공작에게 부탁받은 일도 있고……. 마그달리사 영애를 찾는 일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할 것 같아.”
“아…… 맞아. 오늘 소공작님이 오시기로 했었지. 인사라도 드릴걸.”
“…….”
그녀를 쓰다듬던 손이 멈추었다. 그것을 의아하게 여긴 엘피는 고개를 들어 트론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어라. 삐쳤…… 나?’
다른 사람이라면 알아채기 어렵겠지만, 그녀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