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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11화 (111/132)

111화. 미래와 영원한 약속 (1)

가을에 접어들었으나 아직 뜨거운 햇살이 단풍을 투과하여 붉은빛을 응접실 안으로 비추었다.

응접실에는 두 명의 청년이 진지한 분위기로 마주 앉아 있었다.

백금발에 초록 눈을 한 단정한 청년이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트론 전하.”

“오랜만이군, 마그달리사 소공작.”

“……이런 일로 뵙게 되어 무척 유감입니다.”

“동감이다.”

제2차 데니옴 회의는 불발로 끝났다. 헤럴드 대공의 사망을 수습할 새도 없이, 세틱스 스레데니옴이 공개적으로 나타나 성명을 냈다.

「나와 함께 숨어 지내던 말러 왕세자가 사망하였으며, 동시기에 헤럴드 대공 역시 데니옴 왕궁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차기 왕권 다툼에서 불리한 셋째 왕자 트론 스레데니옴의 야욕으로 인한 끔찍한 사건으로 보인다.

이에, 스레데니옴 왕실의 영광된 유지를 물려받는 자로서 정의를 위해 결단하려 한다. 트론 왕자는 옥새를 반환하고 불법 점거 중인 왕궁에서 퇴거하기 바란다. 이후 절차에 따라 법의 심판을 받아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순리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력행사가 불가피하다.」

요약하자면 트론에게 살해 용의를 뒤집어씌워 단죄를 핑계로 병력에 의한 공격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트론 역시 바로 성명을 내어 ‘지금까지 나라가 가장 힘들 때 조용히 숨어 있었던 주제에 막판에 나와서 설치는 당신이 더 수상한데, 내가 뭘 믿고 옥새를 내어 주겠냐’는 말을 우아하게 포장했다.

세틱스는 트론의 성명을 무시하고 저쪽에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며 병력을 몰아 접경지를 공격했다.

전면전이라기보다는 위협전에 가까웠으나, 누가 보아도 왕위 계승권자 두 사람이 대치하는 내전의 시작이었다.

물론 사전에 대비하고 있던 트론이 그 공격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후 세틱스 역시 소모전 없이 주변을 둘러싼 채 관망세로 돌아갔기에 큰 충돌은 아직 없는 상태였다.

문제는 이후의 장기적인 전망이었다.

“역시 그대의 부친은 길을 터 줄 생각이 없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현재 트론의 세력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은 최북단의 르터바이스령, 그리고 수도 데니옴을 중심으로 한 왕실 직속령이었다.

정예 병력과 내전에 대비한 물자는 르터바이스령 쪽에 쌓여 있었다.

그 자원을 접경지에 가까운 데니옴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르터바이스와 데니옴 사이에 위치한 마그달리사령을 통과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현재 마그달리사 공작은 이번 내전에 있어서 완전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1년 전, 치롤헷에서의 일로 그대의 부친은 솔피시언과 척을 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네. 루베인이 솔피시언의 치부를 고발한 일로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그래도 표면적인 교류를 이어나갔지만, 아시다시피 세틱스 전하는 데하스와 처필의 손을 잡았죠. 마그달리사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문제없도록.”

“이번에 내전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그대들 가문에게는 알리지 않은 거군.”

“그렇습니다. 아마도 저희 가문을 괘씸하게 생각해서, 힘으로 찍어 누르려는 것이었겠지요.”

“형님의 선전포고 이후에 그쪽 가문으로 비공식적인 압박이 있었나?”

“짐작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이미 공작 가문 중 셋이나 되는 가문의 힘을 업었으니 마그달리사도 순순히 합류하는 게 현명한 일이라는, 일종의 협박이었죠.”

하지만 마그달리사는 중립을 선언했다. 협박에 굴종하지 않겠다는 자존심 문제가 컸겠지만, 정세를 봐도 영리한 판단이었다.

세틱스에게 힘을 실어준다고 해도, 압박을 받고 바로 밑으로 들어가 봤자 좋은 취급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마그달리사 쪽에 유리하도록 협상을 해서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다.

마그달리사 영지의 위치는 그만큼 중요했다.

“그 정도로 세틱스 형님 쪽과 사이가 틀어졌는데도 그대의 부친은 우리와 협력할 생각이 없는 거로군.”

“저희 각하는 그 이상으로 트론 전하께 뿌리 깊은 원망을 갖고 계시니까요.”

“…….”

“오늘 이 자리만 해도, 각하께서는 노하며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각하의 명을 어기고 무단으로 찾아온 것이지요. 아직 소공작에 불과한 저에게는 큰 힘이 없습니다. 그래도 대화 정도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왕자님의 부름에 응했습니다.”

“……고맙게 생각한다.”

“아닙니다.”

현재 상황은 트론으로서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가 처음에 계획한 대로 왕세자 자리를 이양받는 것으로 2차 데니옴 회의를 끝냈다면, 더 적극적으로 마그달리사 공작을 압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위 계승권이 높은 세틱스가 나타난 지금, 트론의 위치는 애매했다. 그건 바꾸어 말하면, 마그달리사 공작이 구태여 트론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상태를 길게 끌어서는 안 되었다. 현재는 세틱스 측에서 급조한 사병들의 훈련이 부족하여 그 공격이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 셋이 손을 잡고 데니옴을 압박하는 상황이 장기화된다면, 르터바이스와 연계할 수 없는 고립된 위치가 발목을 붙잡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저쪽에서 지리적 이점과 자원을 바탕으로 세력을 더 불리기 전에, 르터바이스의 병력으로 일망타진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전략이었다.

열쇠는 마그달리사가 쥐고 있었다. 트론은 자세를 바로 하고 딜을 응시했다.

“소공작이 내 청에 응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대 동생의 행방 때문이겠지.”

“……네, 그렇습니다.”

여유가 없어서 전력을 들이지는 못하고 있지만, 트론도 루베인의 행방을 계속 추적 중이었다.

처음에는 제시드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이 마지막 연락이었기에 세틱스가 그녀를 감금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아본 바로는, 세틱스 진영 쪽에 루베인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황상 제시드 율페이든 역시 세틱스의 곁에 없는 것으로 보였다.

“저희 각하께서는 트론 전하께서 그 아이를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셨습니다. 나중에 거래의 카드로 써먹지 않을까 하고요.”

“타당한 추론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만약 마그달리사 영애 본인이 지금 내 곁에 있었다 해도, 그녀가 그런 걸 바라지도 않았을 거고.”

“……역시, 루베인은 이쪽에도 없는 거군요.”

“그래.”

트론은 그녀와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일을 딜에게 말해야 할지, 아니면 숨겨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현재 세틱스의 곁에 있지 않다고 해도 그녀의 신병을 구속하고 있는 것은 제시드 율페이든이었고, 그렇다면 조만간 그녀가 세틱스에게 넘겨질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마그달리사 공작은 자신의 딸을 생각해서 솔피시언과의 앙금은 우선 미뤄 두고라도 그쪽과 손을 잡을 것이다.

그는 잠시 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수척했고, 눈 밑도 거뭇거뭇했다. 아끼는 동생의 행방을 알 수 없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마 오늘 부친의 명을 어기고 무리해서 자신을 만나러 온 것도 루베인의 행방과 관련하여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소중한 사람이 없어지는 아픔은 트론 역시 알고 있었다. 르터바이스 협곡에서 마그달리사 공작이 한 일을 생각하면 괘씸하긴 했지만, 그의 자식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마그달리사 영애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데니옴 회의 예정일 전날이었다.”

“아…….”

“세틱스 형님의 수하인 제시드 율페이든에게 구속된 상태라고 하더군. 갑자기 연락이 끊겨 전후 상황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현재 세틱스 형님 곁에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군요.”

“제시드라는 자는 무척 우수한 마법사고, 그런 자의 곁에 있으니 영애 역시 무사할 것이다. 세틱스 형님 역시 그녀를 해할 이유는 없고.”

“네……. 원래는 각하께서 그 아이를 세틱스 전하의 반려로 붙일 생각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군.”

그 생각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마그달리사 공작은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예이자 최상의 목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절대 바라지 않을 길임에도.

“치롤헷에서의 사건으로 틀어져서 혼담은 흐지부지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세틱스 전하께서는 루베인을 마음에 들어 하신 것으로 압니다. 계속 루베인 앞으로 선물을 보내셨거든요.”

“…….”

세틱스는 심지가 굳건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루베인이 그의 취향에 맞아 떨어졌던 모양이다.

트론은 처음에 세틱스가 제시드를 보내 루베인을 인질로 잡으려고 한 이유가 마그달리사 공작을 협박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순수하게, 마그달리사와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루베인을 비로 삼으려는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루베인 본인은 치를 떨며 싫어하겠지만.

“영애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인재다. 가능한 인력을 투입하여 계속 찾고 있으니, 소식이 닿으면 그대에게도 알리도록 하겠다.”

“저희에게 알려서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그대로 말씀을 해 주시는군요.”

“영애의 행방을 알고 있는 양 거래의 소재로 삼는 것도 가능하긴 했겠지. 그러나 그대가 혈육을 생각해서 절실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나로서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최소한의 도리 아니겠나.”

“…….”

딜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루베인이 현재 세틱스 전하 쪽에 없다는 것은 저희 가문의 정보로도 확인된 사실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째서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가능성은 적지만, 마그달리사 영애가 그 마법사를 제압하고 도망쳤거나. 혹은……. 그 제시드라는 자가 다른 연유로 그녀를 데려오라는 세틱스 형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거나.”

“역시 전하께서도 그렇게 보시는군요. 한 가지 제안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트론은 딜이 자신에게 할 만한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그대는 내가 마그달리사 영애를 찾아 구해 주기를 바라는 건가?”

“뻔히 보였나요.”

딜은 식어 버린 찻잔을 어루만졌다.

“루베인의 행방이 판가름 나는 것은 길어야 한 달이겠죠. 그 전에 루베인의 안전을 확보해 주실 수 있을까요?”

트론은 잠시 딜을 응시했다. 루베인의 안전 자체는 세틱스의 곁으로 간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의 말은 루베인이 세틱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달리 말하면, 딜이 세틱스를 지지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저희 각하를 설득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 주신다면, 마그달리사령 후계자의 명예를 걸고라도, 르터바이스까지 통하는 길을 터드리겠습니다.”

“그대에게도 리스크가 클 텐데. 우리 사이에 그다지 신뢰가 견고하지 않으니까.”

트론의 반응이 무뚝뚝했지만, 딜은 눈을 휘게 만들어 웃으며 답했다.

“전하에 대해서는 제 나름대로 충분히 해답을 얻었으니 괜찮습니다.”

“……?”

“전하께서 신뢰를 깨뜨릴 만한 분이라 의심하는 건, 이나드 영애의 안목을 의심하는 일이 되니까요.”

엘피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트론이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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