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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10화 (110/132)

110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16)

가이는 데니옴 왕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간의 자초지종을 들은 가이는, 만약을 대비하여 엘피의 몸 상태를 마법으로도 진찰했다.

이상이 없다는 게 확인되었지만, 엘피는 트론의 등쌀에 떠밀려 그 후에도 며칠간 쉬라고 엄명을 받았다.

그녀를 방으로 보내 두고 트론은 바로 업무에 돌입했다. 피곤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웰칸 쪽에 다녀오느라 생긴 공백을 메우려는 기세였다.

가이는 그런 면에서는 여전한 자신의 주군에게 혀를 내두르면서도,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대개 이럴 때 자신의 감은 맞는 편이었다.

그는 트론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지? 이번 결정에 불만 있나?”

“불만이라뇨?”

“그대의 가문은 스레데니옴 왕국이 무너지기를 바랐으니까. 불만이 있지 않을까 해서.”

“아아, 전 또 뭐라고. 괜찮아요. 어차피 대공 작위랑 자치권은 주실 거죠?”

“응.”

“그걸로 됐습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주군께서 즐거운 길을 찾으시라고요. 저는 끝까지 함께할 거예요.”

“……고마워.”

“와! 오늘 무슨 날이에요? 전하께서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시다니! 기념일로 삼아야겠어요!”

“시끄럽다.”

가이는 킬킬 웃으며 서류로 파닥파닥 부채질을 했다.

오늘도 반응이 좋은 자신의 주군을 놀려먹는 건 좋았지만,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아무튼 제 용건은 그게 아니고요,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지.”

“엘피 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바쁘게 움직이던 트론의 손이 멈칫했다.

가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즐거운 회답을 기다렸다.

“……일이라기보다는.”

“네.”

“데니옴 회의가 끝나면, 엘피를 비로 맞이할까 해.”

가이는 순간적으로 트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한 박자 늦게 헉 소리를 냈다.

“아니! 충분히 무슨 일 맞잖아요! 우와!”

그는 정말로 놀라서 진심이 우러난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는 마구 손뼉을 쳤다.

“축하드려요! 세상에, 그 잠깐 사이에 뭔가 역사가 있었나요? 대단하네요! 축하 선물 사드릴까요?”

“……시끄럽다. 그래서 그대에게 말하기 싫었던 건데.”

“엘피 님 말고는 저한테 처음 전하시는 소식인 거죠? 감동이네요!”

가이가 흥분한 기색으로 트론이 앉아 있는 책상에 몸을 들이밀며 말했다. 그 소리를 듣고 트론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아닌데.”

“어라.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먼저 말씀하셨어요? 섭섭해라.”

“아니, 그게 아니라. 아직 엘피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가이는 바로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저기, 전하. 심정은 이해하는데요. 마음이 통해서 사귀기 시작했다고 결혼 날짜부터 잡으시면 엘피 님도 당황할 거예요.”

“그런 게 아니다.”

“……?”

“……엘피가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나와 함께 있을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 내가 멋대로 생각한 거야. 그녀가 받아들여 줄지는…… 나도 모르겠다.”

“으음.”

가이는 트론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그는 농담을 하는 성미가 아닐뿐더러, 표정만 봐도 진지한 게 느껴졌다.

그가 판단하기로 이 두 사람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쌍방이었다. 감정의 문제는 예민하기도 하고 당사자들 문제라 가끔 놀리거나 등을 떠미는 것 외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순서가 뒤바뀐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뭐가 되었든, 고지식한 자신의 주군이 무려 결혼을 추진한다니 어떻게든 되겠지. 가이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괜찮아요. 엘피 님도 받아들여 주실 거예요. 내기해도 좋습니다.”

“그대가 장담하는 건 믿기 어려운데.”

“진짜 너무하셔! 그것보다, 청혼 계획은 세우셨어요?”

“계획이 필요한 일인가?”

그 말을 듣고 가이가 펄쩍 뛰었다.

“당연하죠! 일생에 한 번인데요! 장소랑 날짜랑 시간이랑 건넬 말이랑 예물이랑 다 고민하셔야 해요!”

“……그런가?”

“그럼요. 안 그러면 엘피 님도 두고두고 섭섭해하실걸요.”

“…….”

엘피 이름을 꺼내자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가이는 두 사람 사이의 낭만을 지켜 낸 자신을 속으로 칭찬했다.

“……알았다. 고려하지.”

“넵! 혹시 상담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시고요.”

그는 진심으로 두 사람을 축복하며 방글방글 웃었다. 왕으로서든, 남자로서든, 자신의 주군이 스스로 선택하여 즐거운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은 신하 된 자로서 기쁜 일이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제2차 데니옴 회의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엘피는 사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마지막 상황을 점검했다. 특히 보안에 문제가 없도록 철저히 확인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 엘피는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보고를 하던 시종관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시녀장님!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웠던 것뿐이에요. 좀 앉아 있으면 나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약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아니에요. 그것보다 지시한 내용이 바로 진행될 수 있도록 전달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시종관이 방을 나간 후에 엘피는 겨우 의자에 앉아 기댔다.

걱정을 끼칠까 봐 트론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납치 사건 이후로 쉽게 피로를 느끼는 일이 잦았다.

‘아무래도, 라이샤의 힘을 무리해서 쓴 게 영향이 있는 것 같아.’

그래도 차차 나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따로 있었다.

‘……무언가, 감이 둔해진 느낌이야.’

이 역시도 그냥 느낌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라이샤로서 예지몽을 보기 전에, 안 좋은 낌새를 느끼던 감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이번 데니옴 회의에 대해서도 예감이 좋다 나쁘다 이전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역으로 무척 불길했다.

‘내가 괜히 납치를 당해서, 힘을 낭비하는 바람에…….’

엘피는 자책했다. 트론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말라고 단단히 명했지만, 라이샤로서 힘을 쓰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다.

***

트론은 본궁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당일에 맞춰 가겠다고 연락해 온 처필과 솔피시언 공작을 제외한 다른 공작들과 르터바이스 변경백, 헤럴드 대공이 차례로 왕궁에 도착했다.

솔피시언의 진의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높은 확률로 세틱스를 대동하여 난입할 가능성이 컸다. 트론 역시 그에 대비하여 말러를 데려오도록 가이를 보낸 상태였다.

헤럴드는 5년 전과 달리 완전히 초췌해져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희번덕거리던 눈동자는 빛이 사라졌고, 풍채가 좋은 몸은 바싹 말라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숙부님. 모쪼록 회의 당일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

헤럴드는 트론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바삐 숙소를 안내하는 사용인을 따라갔다. 그런 숙부의 뒷모습을 보며 트론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모친을 죽이고, 엘피의 가족을 해친 그가 참으로 초라해 보였다. 동정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새삼스럽게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그에게 어떤 식으로 핏값을 받아 낼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살아남는다 한들, 헤럴드 본인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치욕일 것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마무리되어 가는 와중에도, 트론은 묘하게 불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직 그 윤곽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세틱스의 움직임도 그렇지만, 마지막에 발악을 하리라고 생각한 라블미 백작이 조용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대외적으로 조용히 은거하고 있는 듯했지만, 이대로 끝낼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트론은 손님을 맞이하는 그날 일정을 마무리한 후, 집무실에서 아나이테를 불렀다.

‘솔피시언은 그렇다 치고, 처필도 당일 참가라…….’

처필을 조사하고 있는 루베인에게 연락을 할 생각이었다.

그는 바로 크헤룬을 호출하도록 아나이테에게 부탁했다.

[아, 전하. 오랜만이야!]

“응. 마지막 정기 연락이 늦어진 것 같은데, 나도 챙기질 못했군. 데니옴 회의가 얼마 남지 않아서.”

[……내일이었지?]

“그래. 관련해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괜찮을까?”

[그게…….]

그녀가 무언가 우물쭈물하는 것 같아서 트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나?”

[무슨 일이 있다고 해야 할까, 하아……. 제시드, 안 되겠어!]

트론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제시드라면, 율페이든 가문의…….’

[왕자님! 잘 들어! 라블미 백작이 헤럴드에서 손을 떼고 솔피시언에 붙기로 했어. 처필에 사병들을 양성……!]

거기에서 연락이 뚝 끊겼다. 다시 연락을 이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트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들은 이야기로 대략의 상황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역시 계속 처필이나 데하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대규모의 인력 이동이라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눈에 띄지 않을 적은 인원수로 나눠서 실행한 계획이라는 의미였다.

엘피가 납치된 사건 전후로 웰칸 쪽이 뒤숭숭했다 보니, 그쪽을 살피는 전력이 느슨했던 것이 실착의 원인인 듯했다.

‘……숙부의 밑에 있는 척 세틱스 형님과 손을 잡았던 건가. 내 스승을 너무 얕봤군.’

트론은 자신의 안일함을 인정했다. 그간의 평안함에 젖어 방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나락은 목표의 바로 앞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처필을 조사하던 루베인은 세틱스의 수하인 제시드에게 붙잡혀 있는 상태라 연락이 어려울 듯했다.

가능하면 루베인을 도우면 좋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현재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그녀의 행방을 찾기로 했다. 그때까지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르터바이스 변경백에게, 사병들을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말해 놔야겠군.’

저쪽에서 사병을 양성하기 시작한 이상, 나올 결론은 하나였다.

세틱스는 내전조차 불사하여 왕위를 찬탈하려 할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라블미가 헤럴드에게서 손을 뗐다면, 그가 오늘 버젓이 데니옴 회의에 참석하러 온 것에도 뭔가 의도가 있을 터였다.

트론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헤럴드가 묵고 있는 궁 쪽으로 향했다.

헤럴드의 처소 근처로 가자 사용인들이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난 것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트론은 주변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숙부님. 숙부님! 잠깐 열어 주십시오!”

방의 주인은 대답이 없었다.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려 했으나 안에서 잠겨 있었다.

트론은 혀를 차며 사용인에게 여벌쇠를 가져오도록 명했다. 이윽고 나타난 궁정 관리인이 조심스럽게 헤럴드의 방문을 열었다.

트론은 기분 나쁜 예감과 함께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숙부님!”

그곳에 있는 것은 입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헤럴드의 모습이었다. 뒤에 있던 사용인들 몇몇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트론은 그의 목을 짚어 보고 낭패감을 느꼈다.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사용인들에게 뒤처리를 하도록 지시하고, 그는 바로 아나이테를 불러 가이를 호출했다.

나쁜 일은 몰아서 일어난다. 이걸로 끝이 아니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전하. 그렇잖아도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가이의 첫마디를 듣고 트론은 각오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멀어져 무뎌진 자신을 꾸짖듯이 입술을 짓씹었다.

[수하가 파악하고 있던 말러 전하의 행방이 오늘 오후 시점으로 묘연해졌습니다.]

스레데니옴 왕국이 둘로 갈라져 내전이 일어나게 되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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