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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09화 (109/132)

109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15)

트론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의 상태를 살폈으나, 맥박은 정상이었다. 그 외에도 몸에 이상은 없었다.

그저, 눈을 뜨지 않는 것뿐.

르터바이스 변경백 때문에 연구를 거듭했기에, 의료용 주술에 있어서 트론보다 해박한 자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봤을 때는 이상이 없다는 결과만이 돌아왔다. 차라리 이상이 있다고 나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면 해결할 방법이 명확할 테니까. 생각나는 갖은 방법을 써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주군…….”

옆에서 보조하던 사먼이 걱정되는 얼굴로 트론을 바라보았다. 고민하던 트론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엘피를 데리고 떠나도록 하지. 할리케를 설득했다고는 하지만, 원로회도 그렇고 날이 밝으면 웰칸은 발칵 뒤집힐 거다. 뒷수습은 할리케에게 맡기고, 바로 데니옴으로 이동하겠다.”

“알겠습니다.”

트론은 사먼의 도움을 받아 엘피를 업고 등에 고정시켰다. 최대한 냉정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토할 것만 같았다.

‘라이샤의 힘을 쓴 것 때문에, 피로해졌다거나……. 별일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그는 빠르게 움직였다.

***

숲을 가로질러 근방 소도시에 도착한 것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깊은 새벽이었다. 데니옴 방향으로 가는 첫차를 잡아타고, 트론은 침대칸에 엘피를 눕혔다.

“……대기하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 주십시오.”

“응.”

트론은 사먼이 나간 후 무릎을 꿇은 채 엘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몸 상태를 다시 확인했지만 여전히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저 깊이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엘피. 괜찮은 거지?”

“…….”

차창 밖에 이지러진 달이 창백한 빛을 엘피 위로 뿌렸다. 그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더 수척해 보였다.

“아침에는 일어날 거지……?”

트론은 조심스럽게 엘피의 얼굴을 쓸었다. 피가 돌고 있었고, 따뜻했고, 숨을 쉬고 있었다.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이 위안이었다.

‘데니옴 왕궁에 도착하는 대로, 르터바이스 소백작에게도 보이고……. 그래도 원인을 알 수 없으면 르터바이스 부군을 불러와야겠어.’

침착하게 이후의 일들을 정리했지만 조금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트론은 엘피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핏기가 가신 자신의 손이 너무 차가워서 그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염려되었다.

‘엘피, 나는…….’

이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떠날 때가 왔다느니, 곁에 잡아둘 수는 없다느니 지껄였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엘피를 옆에 두지 않고는 제대로 숨을 쉬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길을 선택했어도, 그 역시 가시밭길이라는 것은 변함없었다.

주술사이자 왕으로서 아무도 나아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과정에서 고꾸라져서, 망국의 왕으로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전하께서 진정으로 그걸 바라신다면, 상관없어요. 저는 전하 곁에서 망국의 간신으로 같이 죽어도 괜찮아요.”

정말로 엘피의 행복을 바란다면, 달콤하기 그지없는 그 말을 밀어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깨닫고 말았다.

그녀가 옆에 있었으면 했다. 어디에도 가지 않았으면 했다.

“……마지막까지 엘피랑 함께 있고 싶어.”

간절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일어나 줘, 엘피…….”

트론은 어느샌가 자신의 뺨이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 이후 메말랐던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턱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엘피의 얼굴에 그의 눈물이 닿아 부서졌다.

그 순간, 미동도 하지 않던 엘피가 어깨를 움직였다.

서서히 그녀가 눈을 떴다.

“엘피!”

“……왕자님?”

그녀가 눈을 비비며 어딘지 멍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트론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꽉 껴안았다.

“엘피……. 다행이야, 엘피…….”

엘피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를 마주 안았다. 트론은 품속에 있는 그녀의 존재를 실감하며 울음을 삼켰다.

***

“그랬군요, 저한테는 무척 잠깐 같았는데…….”

그녀는 트론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할리케와 담판을 짓고 주술을 해제한 것, 그 후의 대화, 그리고 엘피가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

엘피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미안함을 느꼈다.

‘영혼만 빠져나간 상태 같은 걸까? 그런 의미에서는 유령이나 다름없긴 하네.’

아마도 ‘완전 예지’를 발동할 때 신체는 그곳에 남아 있는 상태로 혼만 움직이는 것 아닐까. 원작에서 봤던 제시드의 페널티와는 양상이 조금 달라 보였지만, 결론적으로는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트론에게 걱정을 끼친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그 힘 쓰지 마. 심장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아.”

“죄, 죄송해요. 그렇지만 전하한테 꼭 필요할 때는…….”

“쓰지 마.”

트론은 대체로 자신에게 무르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자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엘피는 어쩔 수 없이 끄덕였다.

그는 뚱한 얼굴로 엘피의 뺨을 쓰다듬었다가 다시 꽉 안았다.

엘피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생각 못 했지만, 그에게 이런 식으로 안기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전하한테 들키면 어떡하지.’

그는 순수하게 자신이 걱정되어서 끌어안은 것일 텐데,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 두근거리는 것이 부끄러웠다.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목덜미에 닿아 있는 체온이, 단단하게 자신을 붙들고 있는 팔이, 의식되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있잖아, 엘피.”

“네, 네에!”

그녀는 깜짝 놀라 움찔거리며 그의 부름에 답했다. 트론은 달래는 것처럼 엘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동안 속여서 미안해. 성군이 될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런 게 아니어서.”

“그런 건 상관없어요. 저는 그저, 전하께서 행복하시길 바란 것뿐인걸요.”

“처음에는 엘피를 죽이려고도 했어.”

“후후, 그건 각오했었어요. 제가 전하에게 쓸모없는 사람이면,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그녀의 반응이 뜻밖이었는지, 트론이 대꾸를 하지 못했다.

“저야말로 고백할 게 있어요, 전하.”

엘피는 그의 옷깃을 꽉 쥐었다. 아까와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저도…… 전하를 속이고 있었어요.”

“속였다니……?”

“사실 저는 처음부터…… 라이샤가 아니었어요.”

그녀는 더듬더듬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회귀 전에 트론과 살아왔던 삶과, 그의 죽음. 뜻밖에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 그때는 라이샤의 예지 따위가 없었지만 회귀 전의 기억으로 라이샤를 자처했던 것.

“……믿기 어려우시겠죠.”

트론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엘피 말이니까 믿어. 오히려 그 말을 들으니 이것저것 납득도 되고.”

“왕자님…….”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거리감이 없었던 거구나. 이미 나랑 오래 알고 지내서.”

“……네, 죄송해요.”

“아냐. 그냥, 조금 분하네.”

“분하다뇨?”

“예전의 내가 바보 같아서 일을 그르친 것도 그렇고……. 지금 나는 그때의 엘피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아까워서.”

“……그때 저는 바보 같았어요. 부끄러우니까, 모르시는 게 나아요.”

“안 그럴 거야.”

그는 엘피의 머리칼을 쓸며 속삭였다.

“엘피는 어떤 모습이든 귀엽고 사랑스러울 테니까.”

“읏…….”

그녀는 귀까지 홧홧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꽉 감았다. 트론은 별 의미 없이 던지는 말이겠지만,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엘피는 목소리가 떨리는 걸 들키지 않게 노력하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저야말로 전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속여 왔어요. 그래서 용서를 빌고 싶었어요.”

“겨우 그런 걸 가지고…….”

트론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꼭 안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를 아껴 줘서 고마워.”

“전하…….”

엘피는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울음을 참았다.

아직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굽이굽이 돌아 이곳까지 도달해서 다행이었다.

“엘피. 너는 살아 줘. 내가 그걸…….”

그때 모든 것이 끝났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다시 한번 새로이 시작된 삶도 그와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서로의 과거와 회한을 길게 풀어내고 품에 안겨 있으려니, 트론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있잖아, 엘피.”

“네, 왕자님.”

“엘피가 처음에 바랐던 것처럼 좋은 왕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어쩌면…… 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몰라.”

“……주술사라는 사실을 공표하는 것 말씀이시군요.”

“맞아. 그래도 해 보려고 해.”

“네! 저는 왕자님이 어떤 길을 선택하시든 따라갈 거예요.”

“…….”

트론은 대답 없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그 동작이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꽉 조였다.

“……응. 이제는 엘피가 어디 간다고 해도 안 놔줄 거야.”

“안 가요! 오히려 전하께서 저보고 어디 가라고 하면 울 거예요.”

그가 안도한 듯 작게 웃었다. 웃으면서 내뱉는 숨결이 닿아 간질간질했다.

‘……나는 역시 왕자님이 너무 좋아.’

솔직하게 뱉을 수 없는 마음을 담아, 그저 트론을 꽉 안았다.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면 그와 이렇게 닿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실컷 그의 체온과 향기를 실감하고 싶었다.

트론은 엘피의 손을 깍지 끼워 잡은 후 그 손등에 살며시 입술을 댔다.

마치 그 부분만 뜨거워진 것 같아서, 엘피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엘피.”

“……네, 전하.”

“혹시, 엘피만 괜찮다면…….”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데니옴 회의가 끝나고 나서. 그때 이야기할게.”

“전하 편하신 대로 하세요.”

“응. 피곤할 텐데 내가 너무 오래 붙잡은 것 같네. 쉬어.”

트론이 조심스럽게 엘피를 놓아주었다. 그의 체온이 멀어지는 느낌이 아쉬워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는 것을 보고, 엘피는 얼굴을 붉혔다.

“죄,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건 없는데. 뭐 할 말 있어?”

“그게…….”

그녀는 트론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잠시 고민했다. 아주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면 안 될까.

“……왠지, 추워서요.”

“응.”

“조금만 더 안아 주시면 안 될까요……?”

“…….”

엘피는 눈을 꽉 감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여름의 공기는 오히려 미적지근할 정도였고, 어딜 봐도 허튼수작이었다.

그러나 침묵도 잠시, 트론이 엘피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기세에 파묻히는 것처럼 그의 품 안에 안겼다.

엘피는 다시 세차게 울리는 심장 박동을 숨기듯 트론의 가슴에 뺨을 댔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엘피가 그렇게 말하면 나가기 힘들어지잖아.”

“안 나가셔도 돼요.”

트론은 깊은 한숨과 함께 “알았어, 내가 졌어.”라고 중얼거리고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자 졸음이 몰려왔다.

‘아, 자면 안 되는데…….’

결국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엘피는 잠에 빠졌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의 체온과 향에 둘러싸인 편안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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