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14)
트론은 한달음에 할리케를 향해 검을 뻗었다.
엘피의 안위를 가지고 협박했는데도 그가 망설이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뜻밖이었던 것인지, 할리케가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트론은 전서구의 이름을 불렀다.
“아나이테, 시야를 가려!”
눈부신 마법의 빛이 할리케의 시야를 방해했다.
할리케는 혀를 차며 몸을 물리려 했으나 트론이 그녀를 제압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가 목에 차고 있는 체인을 단칼에 끊어 냈다.
체인에 매달려 있던 큰 덩어리의 푸른 보석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석을 확보한 트론은 할리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주술을 쓰지 못하도록 팔을 속박했다.
아나이테가 구구 소리를 내며 트론의 어깨에 앉았다.
무력화된 할리케가 큭큭 웃음을 뱉었다. 트론은 그녀를 무시하고 엘피에게 걸려 있는 주술식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이것 참, 주군께 주술을 가르친 보람이 있네요.”
“…….”
“제가 졌군요. 하하, 이렇게 깔끔한 패배도 오랜만이라 오히려 후련하네요.”
술식을 해제한 트론은 푸른 보석을 가루로 만들었다. 보석이었던 재가 공중으로 흩어 사라져 갔다.
“저를 죽이실 건가요?”
“아니. 지금 상황에서 장로인 그대가 죽으면 웰칸은 폭주할 거다. 나한테도 좋은 일은 아니야.”
“그럼 어쩌시려고요? 아가씨는 무사히 구해 냈고, 배신한 과거의 동지는 눈앞에 있는데. 저희를 처단하고 영광스러운 스레데니옴 왕국의 왕이 되시는 길만 남았잖아요?”
“솔직히 그대를 죽일까 생각했었어.”
“네, 그러시겠죠.”
“그전에도…… 많은 생각을 했어. 내 목숨을 살려 준 거래의 대가로서 이 나라를 없애는 것을 처음에는 당연히 여겼는데. 어느 순간부터 버거워졌지.”
“…….”
할리케는 붉은 눈으로 자신의 조카를 올려다보았다.
“그대의 말대로 성군 놀이에 심취한 것일지도 몰라.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야. 나 때문에 죽었던 웰칸의 인간들이…… 내 선택을 긍정해 주지도 않겠지.”
“시시한 자기 고백은 적당히 하세요. 주군.”
트론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차라리 그녀가 이렇게 쓴소리를 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할리케. 사실은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어떤 거죠?”
“……이 나라를 없애 달라는 건, 어머님의 유언이었나?”
그녀는 때때로 도발하듯이 트론이 잘 자란 걸 보면 언니가 기뻐할 거라느니 하는 소리를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모친이 이 나라의 멸망을 바랐다는 말을 입에 담은 적은 없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래, 중요하지 않지. 나는 이제 어머님에 대한 기억조차 거의 없다. 유언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그 말을 실행할 의리도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
“…….”
“하지만 그대는 어떤가? 그대에게는 어머님의 말이…… 중요한가?”
할리케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그녀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요염하게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주군. 배신자와 과거의 일을 논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주군을 제어하려고 발버둥 쳤다가 실패한 거고요. 그것뿐인 이야기잖아요?”
“할리케, 왜 우리는 이렇게 남들의 눈을 피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언니의 시체는 땅에 묻히지 못했다. 재만 남은 그녀는 수많은 항아리 중 하나가 되었다.
두더지 땅굴 같은 이곳이 싫다며 푸른 하늘이 있는 곳으로 나간 그녀는 결국 땅굴로 돌아왔다.
그 심정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그녀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남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 산 사람들은 제물이 되어 갔다.
거기에는 어떤 명분도 애정도 실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변명할 생각은 없었고, 이해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트론 스레데니옴은, 영원히 제 이모를 증오하는 것이 마땅한 종말이었을 터였다.
“할리케.”
하지만 그는, 평온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트론은 바닥에 속박당해 있는 할리케와 시선을 맞추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눈앞의 혈육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복잡했다. 좋아한다고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미워한다고 하기도 모호했다. 엘피를 납치한 일은 평생 용서할 수 없겠지만, 할리케가 자신의 은인인 것도 사실이었다.
“전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저는 전하 편이에요.”
수없이 고민해 왔다. 망국의 왕으로서 죽기를 각오하면서도 계속 방황하고 흔들렸다.
사실은 그런 끝을 원하지 않았다.
이 나라는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넘쳐 나지만, 그 이상으로 아름답고 선한 것들이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트론은 오래도록 덮어 두고 있었던 본심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 나라를 부수고 싶지 않아.”
“…….”
“하지만 지금의 이 나라가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왕이 되면 주술사라는 사실을 공표할 생각이야.”
뜻밖의 선언에 할리케가 눈을 크게 떴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 어쩌면 주술사인 왕을 인정하지 못한 자들이 모여 나를 처단하려 할지도 몰라. 내가 하는 모든 실패는 주술사의 실패가 되겠지.”
“트론, 너…….”
“……좋은 방향으로 끝나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그대들 연합이 바라는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어. 어쩌면, ‘나’라는 개인 때문에 주술사에 대한 인식이 더 땅에 떨어질지도 모르지.”
“…….”
“그래도 그 길을 선택해 볼까 해. ……나 역시, 내가 주술사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은 없다. 그걸 부정하려고 하는 건 아니야.”
어둠이 깔린 방 안에서 마치 그가 홀로 빛나는 것 같았다. 할리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익숙하지 않은 푸른 하늘을 접하는 것처럼 그 모습이 낯설었다.
고고한 사상은 더럽혀졌고, 절실한 소원은 닿지 않았다. 그도 언젠가 낡고 초라해진 채 재만 남아 땅굴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다시 속아 보고 싶은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현명하고 아름다웠던 언니의 아들이, 어쩌면 두더지들을 땅 위로 끌어올려 줄지도 모른다고.
“주군은 착해 빠진 것도 모자라서, 머저리였군요.”
“글쎄, 그대도 그따위 숫자를 보안 번호로 거는 건 바보 같았는데.”
“……착각하지 않았으면 해요, 주군. 어차피 저희는 서로에게 도구예요.”
“안다.”
트론은 머나먼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세틱스에게 얻어맞고 울고 있던 어느 날, 궁으로 몰래 침입한 할리케와 거래했었다.
“그럼 이제부터 당신은 저의 주군이 되는 거예요.”
“……이모인데?”
“우리 사이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주군. 기억하세요. 저희는 서로에게 도구예요.”
“도구…….”
“도구에게 감정은 필요 없답니다. 주군도…… 그리고 저도.”
추억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떤 기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기억들이 있기에 이곳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이번 한 번은 엘피 본인이 그대를 죽이지 말라고 한 말을 봐서 넘어가도록 하지. 하지만 두 번은 없다. 할리케. 다음에 또 배신한다면, 그때는 그대의 목에 검을 박아 넣을 수밖에 없어.”
“하하. 그래서 주군이 무르다는 거예요. 바로 죽여야죠.”
“……다음에 고려하도록 하지.”
트론은 할리케의 속박을 풀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비웃는 듯한 얼굴을 했다.
“제가 순순히 그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들어야지. 나는 내 이모가 원로회들 정도는 휘어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는데.”
“주군. 당신의 머저리 같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 저는 역시 당신이라는 도구를 버릴 거예요. 아시겠나요?”
“응.”
“……알겠어요. 어디 한번 잘 해 보세요. 우리 귀여운 조카님.”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그녀의 방을 나갔다. 뒤에서 할리케가 실성이라도 한 듯 즐겁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
“주군……!”
트론이 엘피의 방 앞에 도착하자마자, 사먼이 땅에 엎드렸다. 트론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 보았다.
“……이번 일은 실망이 크다, 사먼.”
“주, 죽여 주십시오…….”
사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트론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원흉이었던 할리케를 죽이지 않은 이상, 사먼을 해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할리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트론은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었다.
“사먼. 그대가 이번 일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이지?”
“……장로님의 명령에 따랐습니다.”
“그대는 그 명령이 옳다고 생각했나?”
“……읏.”
“아니라면, 그런데도 그 명령을 지킨 이유는 뭐지?”
사먼은 몸을 떨며 트론에게 눈을 맞추지 못하고 답했다.
“도구에게 의문은 필요 없다고 장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랬군…….”
트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먼을 일으켰다.
“사먼. 그대가 웰칸에 몸을 바치기로 한 건 그대 나름대로 의지가 있어서겠지. 억울하게 죽은 동생의 원념을 풀어주고 싶었던 것이든, 개인적인 가치관이든.”
“주군…….”
“가장 근원적인 것을 생각해. 그대의 여동생도 기뻐하지 않을 거다.”
“윽…….”
사먼의 푸른 눈동자에 이슬이 맺혔다. 트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의문을 가지도록 해. 자신의 행동에 책임진다는 건 그런 거다. 내 명령에 무조건 따르라는 의미가 아니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질문하고, 스스로 납득한 다음 행동하도록.”
“……네, 주군.”
“이번 일은 빚으로 달아 두도록 하지. 문을 열어 줘.”
“아, 엘피 님에게 걸린 주술은…….”
“해결하고 왔다. 할리케와 담판 짓고 왔으니, 그대가 몸을 바쳐 데니옴 왕궁을 태울 일도 없을 거야.”
“……아.”
결국 사먼은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트론은 그가 우는 걸 책망하지 않으며 지켜보았다.
단번에 많은 것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변화가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엘피…….’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
트론은 엘피의 방에 들어가 바로 불을 켰다. 그녀는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엘피에게 다가갔다.
“……엘피. 나 왔어. 돌아가자.”
머리맡에서 그가 속삭였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사이에 피곤해서 깊이 잠이라도 든 건가 싶어, 트론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엘피. 이곳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바로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피곤할 텐데, 미안해. 일어나 줄래?”
그렇게 해도 그녀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트론은 불길한 예감에 엘피를 품에 안아 들었다.
“……엘피?”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