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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05화 (105/132)

105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11)

[너는 네 할 일이나 잘하면 된다. 알겠나, 제시드?]

“네, 네에!”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야. 크큭. 뭐, 네놈이 알 바는 아니다만.]

“……?”

[그럼 이만 끊겠다. 이딴 거로 연락하지 마.]

세틱스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 것으로 둘의 대화는 끝났다. 루베인은 바로 크게 소리를 쳤다.

“진짜 뭐야, 저 재수 없는 새끼는!”

“루, 루베인 님…….”

“이제 알겠네! 너, 쟤가 하도 머저리니 반푼이니 하니까 진짜 그런 줄 알았구나?”

루베인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직접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이건 학대였다. 일종의 세뇌나 다름없었다.

“아, 아니에요. 세틱스 님이 아니더라도, 다들 제가 부족한 건 알고 있으니까요.”

“다들……?”

“저는 집에서 처치 곤란한 짐더미였어요. 그나마 조금이라도 쓸 만한 구석이 있어서 세틱스 님이 수하로 삼아 주신 거고……. 루베인 님이 다정하셔서 좋게 말씀해 주시는 거 알아요.”

“…….”

그녀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이를 빠드득 갈았다.

제시드는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해 주는 게 루베인밖에 없다고 했다.

그건 즉, 지금까지 그의 주변에 긍정적인 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의미였다. 그런 환경에서 사람이 멀쩡할 수는 없었다.

루베인은 제시드의 어깨를 잡고 외치듯 말했다.

“제시드. 네 주변에 지금까지 그런 사람밖에 없어서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 건 알겠어. 하지만 딱 잘라 말할게. 너희 가족도 포함해서, 저 세틱스라는 인간까지, 다 잘못됐어! 넌 그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야.”

“무, 무슨…….”

“아, 정말 화나! 내가 너보다 힘이 있었으면 강제로 끌고서라도 그딴 새끼 밑에서 데리고 나오는 건데!”

제시드는 당황하여 그녀의 얼굴과 잡혀 있는 어깨를 번갈아 보았다.

루베인은 그의 이런 반응에 더 울컥했다. 돌이켜 보면,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나치게 남의 눈치를 보곤 했다.

그게 저런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울분이 치밀었다.

“진정하세요, 루베인 님……. 제, 제가 못나서 화나신 건가요?”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다 세틱스 새끼 잘못이야!”

“…….”

“네가 트론 전하에게 협력해 주기를 바라서라거나, 그런 거 다 떠나서 하는 소리야. 트론 전하 안 도와줘도 되니까, 저딴 새끼한테 손 털어. 누군가를 꼭 왕으로 삼고 싶은 거라면, 그 새끼 말고 차라리 거리에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왕으로 만들라고! 세틱스 스레데니옴은 그 정도로 형편없는 놈이야!”

루베인은 거기까지 뱉어 내고 나서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제시드는 머뭇거리다가 작게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를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대체 뭐로 들린 거야…….”

“……가, 감사해요.”

그녀는 제시드의 얼굴을 보고 순간적으로 놀랐다. 그는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루베인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끌어서 꽉 쥐었다. 제시드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저기, 그게…….”

“응.”

“제가 나쁜 게…… 아닌 건가요?”

“당연하지!”

“그렇구나…….”

제시드는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 내려 했지만, 그의 눈물이 방해했다.

그는 루베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연신 “죄송해요, 보기 흉하죠.” 하고 사과했다.

루베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부친이나 오빠 말고는 남자를 안아 본 적이 없었지만, 뭐라도 해서 달래 주고 싶었다.

제시드는 당황한 듯 몸을 굳히다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마주 안았다.

“……죄송해요.”

“됐어. 실컷 울어.”

“울면 바보 같아서…….”

“사람은 다 우니까 그딴 말 믿지 마. 지금까지 들었던 말 다 잊어!”

루베인이 그렇게 말했지만, 제시드는 코를 훌쩍이며 최대한 울음을 참아내려 했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눈물이 잦아들자, 제시드가 작게 속삭였다.

“루베인 님이 저의 왕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자리 관심 없어.”

“아쉽네요.”

그녀는 제시드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치유되거나 변하지 않는다. 몰아세우듯이 세틱스에게서 손을 털라고 했지만, 쉽게 결정하기 힘든 문제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그를 다독이는 데에 집중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어딘지 그리운 감각이었다.

***

“제가 돕고 말고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엘피는 할리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언했다.

“어머, 어째서죠?”

“그건 전하께서 결정하실 문제니까요. 저는 전하의 신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나라를 끝장내는 것이 왕자님께서 정한 일이라면, 저는 군말 없이 따를 거예요. 하지만…….”

최대한 눈에 힘을 주어 눈앞의 미녀를 쏘아보며, 엘피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전하께서 바라시지 않는 일은 절대로 협력하지 않을 겁니다.”

“……후후. 아하하. 지금 자기가 인질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지금 내가 수틀리면 그 예쁜 목을 꺾어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고요?”

“알아요. 마음대로 하세요. 저한테 가장 중요한 건, 전하예요. 전하가 죽도록 두지 않을 겁니다.”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자진해서 죽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존재는 트론이었다. 그만을 위해 이날 이때껏 살아왔다.

‘……어차피, 왕자님이 구해 주신 목숨인걸.’

그를 위해 버린다고 해도 아까울 것은 없었다.

할리케는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저었다.

“아, 정말이지. 주군도 참, 자기랑 꼭 닮은 여자를 골랐네.”

“……?”

“글쎄, 아가씨가 죽는 걸 주군이 바랄지는 모르겠어요. 그분은 당신을 구하러 이곳으로 오고 있거든요.”

‘……이렇게 위중한 때에, 괜히 나 때문에.’

데니옴 회의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트론이 왕궁을 비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 말러를 만나러 가는 것만 해도 빽빽한 스케줄을 조절하여 겨우 시간을 낸 것이었다.

엘피의 얼굴이 자책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할리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좋아요. 교섭은 결렬이라는 것으로 오늘 대화를 끝내도록 하죠. 당신을 죽일지 말지는, 으음, 일단 지금은 유보해 두겠어요.”

“…….”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난 만족하지만요. 아하하, 주군께서 오셨을 때가 기대되네요.”

할리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빛의 포털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어서 사먼이 돌아와 엘피를 원래 있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엘피는 문이 닫히기 전, 사먼에게 말을 걸었다.

“있죠, 사먼.”

“네, 엘피 님.”

“사먼은 알고 있었나요? 전하께서 망국의 왕으로 죽기 위해서 지금까지 분투해 오셨다는 걸.”

“……과정이나 결과까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 중대한 일은 저 같은 아랫것한테까지 전해지지 않거든요.”

“그럼 이번에 아시게 된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장로님께서는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좋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사먼은, 그 계획에 동의하시나요?”

“…….”

사먼은 입을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침묵이 더할 나위 없는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주술사의 권익을 위해 연합을 짜서 움직인다고 해도, 개개인의 의견을 통일하기는 어렵다. 방법이나 방향성에서 서로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기에 웰칸 연합의 수뇌부는 구체적인 실행안은 두루뭉술하게 전달하여 반발이 생기지 않도록 제어했을지도 모른다.

“사먼,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요?”

“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왕자님이 이곳에 도착하시면, 저한테 먼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직접 뵙게 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알려 주시기만 하면 돼요.”

엘피가 간절하게 말하자, 사먼이 끄덕였다.

“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아뇨, 죄송할 따름입니다.”

사먼은 고개를 숙여 다시 사과하고 방을 나갔다.

엘피는 침대에 앉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트론이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고 데니옴 회의까지 잘 진행했다면 좋았겠지만, 그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면 그건 기회이기도 했다. ‘완전 예지’의 힘을 써서 트론에게 현재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전달할 수 있을 테니까.

‘존재가 사라지는 리스크는…… 어쩔 수 없지. 괜히 나 때문에 전하께서 피해를 보는 것보다는 나아.’

엘피는 꿈으로 보았던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전하의 목적은…….’

망국의 마지막 왕으로서 죽는 미래.

엘피는 가슴이 아파서 눈을 꽉 감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철없는 소리를 지껄였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트론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하면 괴로워졌다.

또한 그 이상으로, 트론이 걸어가는 길의 끝에 행복이 아닌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슬펐다.

자신은 신하이며, 건방진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정말로 그가 바라서 나아가는 길이라면, 자신이 그를 붙들 권리 역시 어디에도 없었다.

“론은 오래오래 살아서 행복해야 해.”

하지만 오래도록 바라왔던 그 소망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미로를 하염없이 헤매는 것 같았다.

“전하. 왕자님. ……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엘피는 침대에 몸을 묻었다. 할리케와 긴장하며 대화를 나누느라 쌓인 피로와 여러 가지 고민이 겹쳐 몸이 무거웠다.

트론을 보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를.

***

검은 머리칼의 청년이 은녹빛 나뭇잎을 헤치고 숲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때때로 마수가 그를 향해 덤볐으나, 그는 지극히 무덤덤하고 군더더기 없는 솜씨로 마수의 급소를 공격하여 떨구어 냈다.

트론이 이곳에 직접 방문한 것은 두 번 정도였다. 한 번은 모친이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또 한 번은 열 살쯤에.

두 번째로 이곳에 왔을 때, 할리케가 그의 실력을 시험해 보겠다며 숲에 혼자 버려두고 갔었다.

어린 트론은 마수들의 공격을 막아 내며 낯선 숲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웰칸의 지하 도시까지 돌아갔다. 할리케는 그런 그를 칭찬하며 만족한 얼굴을 보였다.

그때 몸으로 익힌 숲의 구조는 거의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불명확한 구역은 아나이테의 도움을 받아 나아갔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이슥한 밤이 다 되어서였다.

트론은 지하 도시로 통하는 바위 문을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잠재웠다. 엘피를 생각하며 참고 있었지만, 쌓여 있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술식을 완성한 후 웰칸의 도시에 발을 들였다. 바로 향한 곳은 도시 내에서 ‘관제탑’이라고 칭하는, 중앙 수뇌부 건물이었다.

이미 트론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입구에 있던 위병들이 그를 안내했다.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장로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할리케가 두 팔을 벌리며 트론을 맞이했다.

“주군, 오랜만이에요.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게 얼마 만이죠? 8년 만이던가요?”

“엘피는 어디 있지.”

트론은 의례적인 그녀의 인사를 깡그리 무시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이참, 그렇게 여유가 없는 걸 그대로 드러내시면 어떡해요. 상대와 거래를 하려면 여유로운 척이라도 하셔야죠.”

“그만 지껄이고 대답해.”

“말씀드리면, 주군은 저한테 뭘 주실 건가요?”

할리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혹적인 미소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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