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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02화 (102/132)

102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8)

“저는 반푼이에, 얼치기 같은 존재니까. 확신할 수 없는 망상 같은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세틱스 님이 부족한 저를 필요로 해 주는 게 기쁘기도 했고요. 음, 별것도 아닌데 거창하게 이야기했네요. 죄송해요.”

“아냐. 그리고 반푼이에 얼치기라니, 무슨 그런 소리를 해. 너같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아, 아녜요. 저는 정말 얼간이인걸요.”

“…….”

루베인은 수풀을 검으로 베어 내며 잠시 제시드의 말을 생각했다.

그녀의 사고방식으로는 어딘지 묘하게 뒤틀려 있는 제시드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과거에 백치 같은 상태였다고 해도, 지금은 기량이 뛰어난 그가 이렇게까지 자존감이 낮은 것도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틱스 같은 인간에게 기대어 스스로를 채우는 것은 그다지 건강한 행위는 아닌 것 같았다.

“너도 세틱스 전하가 만들어 갈 세상에 찬성하는 거야? 개인적으로는 재수 없어도, 왕으로서는 훌륭해 보여?”

최대한 양보하자면, 세틱스 개인의 인격은 차치하더라도 왕으로서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루베인은 그 가능성을 생각해서 말을 꺼내 보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무척 충동적인 분이시니까요. 사실은 저, 한참 동안 폭주가 심해서 주술을 제어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다가 한 1년 전쯤에, 겨우 제어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응.”

“그런데 성과를 보이자마자, 세틱스 님이 르터바이스 협곡에 마수를 잔뜩 소환하라는 명을 내리셨어요.”

루베인은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때 트론이 위험에 빠졌던 일에 자신의 부친이나 솔피시언 공작이 관여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실행자가 제시드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꽤 대규모의 주술이라, 무언가 큰 의미를 지니는 건가 싶었는데……. 그냥 그분의 동생이 뜻밖의 위기에 처해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뿐이더라고요. 저도 조금 진이 빠져서, 대규모 주술은 힘드니까 그런 일에는 쓰지 말아 주십사 말씀드렸죠.”

“…….”

“그 후에는, 뭐라고 해야 하나……. 의도적으로 지저분한 일들에서 저를 떨어뜨려 두시는 것 같아요. 저번에 치롤헷에서 있었던 특별 경매장 인신매매 건도 나중에 알았고……. 아마 제가 모르는 곳에서 더 추악하고 끔찍한 일을 벌이고 계실지도 모르죠.”

“그걸 알면서도 곁에 있겠다고?”

루베인이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묻자, 제시드는 손을 펼쳐 마법으로 시야를 더 밝혔다.

“무언가 역할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불안해요. 저는 쓸모없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어째서일까요, 저는 루베인 님을 보면……. 더 불안해져요.”

“……?”

“쓸데없는 말이 길었네요. 슬슬 도착한 것 같아요.”

제시드가 손을 내밀자 아까 날아갔던 종달새가 돌아와서 그 위에 사뿐히 앉았다.

루베인은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숲 속의 나무를 모두 베어서 일부러 만든 듯한, 굉장히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 옆에는 투박한 가설 건물이 여럿 서 있었다.

“뭔가 재배하는 밭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요. 옆에 있는 가설 건물도 온실은 아닌 것 같고요.”

“잠깐 살펴보자. 그리고 제시드.”

“네.”

루베인은 짤막한 머리를 쓸어올리며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너는 스스로를 자꾸 비하하지만, 그걸 떠나서 말이야. 어차피 크든 작든 사람은 누구나 불안함을 안고 있다고 생각해. 그걸 해소하는 방법을, 굳이 세틱스 스레데니옴에게서 찾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

“어차피 신이 뭔가 지시를 내린 것도 아니라며. 그러니까 한 번, 생각이라도 해 봐. 세틱스가 아니라, 트론 전하를 왕으로 세우는 미래를 말이야.”

제시드는 맹목적으로 세틱스에게서 삶의 의미를 구하면서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제대로 사고 능력을 갖추게 된 게 5년 전의 일이라고 했으니 보기보다 더 정신연령이 낮은 것일지도 모른다.

더 강요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루베인은 제시드를 딱하게 생각했다.

그만큼 세틱스 스레데니옴이라는 존재가 불길하고 기분 나빴다. 그런 자의 밑에 이런 인재가 굳이 붙어 있을 이유는 없었다.

루베인은 생각을 갈무리하며 주변을 살피다가 특정한 흔적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공터 위에 남은 수많은 발자국의 형태와 흔적.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옆을 보자, 제시드도 심각한 얼굴로 탐색 결과를 말했다.

“건물 내에 다수의 인체 반응. 그리고…… 무기가 있네요.”

“인원수는?”

“……중대 단위 정도로 보입니다.”

“…….”

특수한 위치에 있는 변경령 백작을 제외하고, 각 귀족이 사병을 조직하는 것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된다.

그러나 처필령에서 사병이 조직되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뿐만 아니라, 사들이고 있다는 다른 사유지에서도 같은 일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더 엄중한 사태에, 루베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

엘피는 인수인계를 끝나자마자 대강 짐을 챙겨 궁을 나섰다.

사먼과 미리 약속해 둔 장소에 도착한 후, 그가 수배해 온 마차에 몸을 실었다.

‘……뭔가, 이상해.’

그녀가 처음 위화감을 느낀 것은 사먼의 어두운 분위기였다. 엘피가 말을 붙이면 짧게 답은 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우울한 얼굴이었다.

그다음으로는, 마차의 진로가 이상했다. 데니옴 시가지를 빠져나간 후에 카라스가 있는 동쪽으로 달려가기에 처음에는 별 의문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마차의 진로가 그녀가 알고 있는 카라스 방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카라스는 트론과 함께 왕궁을 탈출하여 가장 처음 방문했던 도시이기도 했기에, 가는 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엘피는 마차를 끌고 있는 마부가 실수한 건가 싶어서 사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사먼.”

“네, 엘피 님.”

“제가 알기로 지금 달리는 방향은 카라스 쪽이 아닌데요……. 카라스는 더 동쪽에 위치하지 않나요? 지금 남쪽에 가깝게 달리는 것 같아서요.”

“…….”

“혹시 마부가 길을 잘못 알고 있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정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엘피의 말을 듣고 사먼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긴장하고 있는 듯 그의 목울대가 불안정하게 움찔거렸다. 이윽고 그가 음울하게 답했다.

“아뇨. 지금 저희가 가는 방향이 맞습니다. 저희는 데이센느에 들러서 열차를 탈 예정입니다.”

데이센느는 카라스의 남서쪽에 있는 도시였다. 엘피는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데이센느에는 왜요……? 전하께서는 카라스에 계실 텐데요.”

“……죄송합니다, 엘피 님. 왕자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네?”

“엘피 님을 부르신 건……. 저희 웰칸의 장로, 할리케 님입니다.”

엘피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사먼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담담하게 고했다.

“장로님을 뵐 때까지 신병을 구속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반항하신다면……. 주술로 엘피 님을 잠재워 둘 수밖에 없습니다.”

“어, 어째서인가요! 웰칸은 왕자님을 배신할 생각인 거예요? 저, 저는 왕자님한테 불리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배신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사먼은 씁쓸한 얼굴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저는, 웰칸 연합의 도구니까요.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장로님을 뵙고 나서 말씀하시죠.”

“…….”

엘피는 혼란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머리에 가장 먼저 스쳐 지나간 것은 얼마 전에 봤던 꿈이었다.

자신이 인질이 되고, 트론이 다치는 원작의 내용이 떠올랐다.

혹시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은 아닌지 오싹해졌다.

웰칸 연합은 원작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는 사먼을 통해서 얻은 단편적인 내용뿐이었다.

주술사의 권익을 되찾기 위해 트론과 손을 잡고 있는 단체라거나. 그 장로라는 사람이 트론의 이모라거나. 암살을 막기 위해 트론에게 독을 쓰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거나.

그래도 궁극적으로는 트론의 편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런 사태를 예상치 못했다.

엘피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탄했다.

‘……자학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정신 똑바로 차려.’

우선은 괜히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서 주술에 당하는 것보다는, 계속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것 이 좋을 듯했다.

기회가 있으면 아일란을 써서 연락을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자신에게는 라이샤로서의 힘이 있다. 리스크가 걱정되긴 하지만, 르터바이스 협곡에서 발동했던 ‘완전 예지’의 힘을 써서 트론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그나마 마음이 침착해졌다.

“알겠습니다. 반항하지 않고 따라갈 테니, 잠재우거나 폭력을 쓰지는 말아 주세요.”

“다, 당연한 말씀을요! 절대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장로님께서도, 왕자님과 척을 지실 생각은 없을 거예요.”

“…….”

할리케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는 이상 사먼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엘피는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뭐가 되었든, 가장 중요한 건 트론에게 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만을 마음의 버팀목으로 삼으며 그녀는 눈을 꽉 감았다.

***

트론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거추장스러운 망토와 겉옷을 떼어 내고 아나이테를 불렀다.

엘피를 보고 싶은 마음에, 목소리라도 들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서구는 트론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다가 정수리에 앉았다.

“……반응이 없나?”

아나이테는 꾸르륵 우는 소리로 답했다.

트론은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엘피가 피곤한 나머지 일찍 곯아떨어졌었다.

그때는 직접 방에 가서 자는 얼굴을 확인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답답했다.

그는 아나이테를 돌려보내고, 대신 주술식을 발동했다.

“사먼.”

하지만 사먼도 답하지 않았다. 엘피는 몰라도, 사먼이 임무를 맡은 상황에서 트론의 호출을 무시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트론은 방 밖으로 나가 가이에게 왕궁의 상태를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궁에 남아 있는 수하와 연락을 한 가이가 심각한 얼굴로 상황을 알렸다.

“……엘피 님께서는, 왕자님한테 호출을 받았다며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궁에서 떠나셨다고 합니다.”

“…….”

“협박을 받았다거나 납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전후 상황이 깔끔해서…….”

“……아니, 됐다. 짐작 가는 바가 있으니까.”

트론은 되도록 침착하게 답하려 노력했으나, 그 목소리에는 스산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사먼이 답하지 않는 것, 엘피가 의심 없이 트론의 명이라고 생각해서 따른 정황을 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그는 가이에게 설명하지 않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흉흉한 기세로 거울을 향해 주술식을 그려냈다.

[어머, 주군. 생각보다 늦었네요. 이제야 아셨나 봐요?]

“……할리케.”

거울 너머로 나타난 여인을 부르며, 트론은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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