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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01화 (101/132)

101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7)

“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셔서 저를 직접 부른 것인지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외람된 말씀이지만, 왕세자 전하께서는 저보다 세틱스 형님과 더 연이 깊으실 텐데요. 어머님도 같으시고 저보다 더 오랜 기간을 함께한 형제니까요.”

트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투정을 부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소한 감각이었다. 지금까지 형제나 친척은 남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가족이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 피상적인 개념이었다. 엘피에게 비슷한 정을 느꼈으나, 그조차도 어그러졌다.

눈앞의 청년이 자신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어색하고 대처하기 힘들었다.

“전하께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왕세자 자리만 이양해 주신다면, 그 이후에는 조용하고 안전하게 생활하실 수 있도록 힘쓸 것입니다.”

“너에게 있어서 내가 가족답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 내가 못나고 부덕한 탓이겠지. 트론.”

말러는 사제복 자락을 쥐며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린 시절 네가 힘들게 자라오는 걸 알면서도 외면해서 미안했다. 그것만은 꼭 사과하고 싶었어.”

“…….”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도 꼭 그것만은 직접 사과하고 싶어서 이렇게 무리한 자리를 요청했다.”

“전하…….”

“내 용건은 그 정도다. 너의 요청에 따르도록 하지. 계속 사제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왕 같은 것보다는 훨씬 적성에 맞거든.”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농담을 건넸다. 트론은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껄끄럽고 간지러웠다.

그는 애써 그런 마음을 누르고, 딱딱하게 본론으로 돌아왔다.

“우선은 기존의 거처에서 평소대로 지내도록 하세요. 그 전에 솔피시언이나 세틱스 형님이 눈치를 채면 곤란하니까요. 데니옴 회의에 맞춰 전하를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데니옴 회의에서 내가 왕세자 자리 이양을 선언하면 되겠지?”

“네,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르터바이스 소백작이 후에 전할 겁니다.”

“그래, 알겠다.”

태양은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삼켜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었다. 약속된 포털이 말러 쪽으로 나타나, 그가 이동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트론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저기, 말러 형님.”

말러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공식적인 호칭을 뺀 동생에게 놀란 얼굴을 보였다가, 인자하게 웃었다.

“응, 트론.”

“형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형님께서 저한테 마음 써 주신 게 기뻤으니까요. 큰 위안이기도 했고요. 진심입니다.”

“……나야말로 오늘 너를 만나 큰 위안을 얻었다. 고마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말러의 인영이 빛 사이로 사라졌다. 트론은 꿈틀거리는 낯선 감정들을 목 안으로 삼켰다.

한시라도 빨리 엘피를 보고 싶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그녀를 꽉 껴안고 싶었다.

그럼 그녀 역시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마주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 줄 것이다. 그 감각이 무척 그립고도 사무쳤다.

지금껏 그녀에게 닿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곧 다다를 종막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곳에 존재하는 따스함을 실감하고 싶었다.

***

엘피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주물렀다. 평소보다 업무량이 많았지만, 어떻게든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녀는 가볍게 맨손 체조를 하며 뻣뻣해진 몸을 풀다가 책상 위에 있는 달력을 보았다. 트론이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며칠 더 있어야 했다.

어차피 같은 궁에 있어도 그의 얼굴을 못 볼 때가 많았지만, 아예 볼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허전했다.

엘피는 1년 전에 솔피시언령의 치롤헷에 머물렀을 때를 떠올렸다.

트론과 거리가 멀어져 혼자 전전긍긍했었다.

‘……전하를 내가 깨운 것도 그때쯤이 마지막이네.’

새삼 떠올리니 우울해졌다. 아무런 근심 없이 트론의 품에 꽉 안겨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어리광을 부리듯 목덜미에 얼굴을 묻을 때마다 애틋한 기분을 느꼈다.

그 모든 것이 멀고, 또한 아득했다.

왕이 된 그는 더 멀어질 것이다. 지금보다도, 더, 훨씬, 많이.

“앗…….”

엘피는 책상 위에 눈물이 뚝뚝 흐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비볐다. 원래도 눈물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겨우 이런 것으로 울다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러고 보면, 전하가 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트론은 대외적으로 만들어 내는 표정 외에는 원래도 얼굴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도 자신과 단둘이 있을 때는 솔직하게 웃는 얼굴을 자주 보였었다.

하지만 우는 얼굴은, 회귀 전 시절도 통틀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눈물을 흘리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니, 그가 울 일이 없는 건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트론은 감정을 내보내지 않고 자기 안에 갈무리하는 사람이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대신 마음 한구석이 곪아가는 건 아닐까 염려되었다.

“왕자님…….”

무척 보고 싶었다. 일에 쫓기다가도 비는 시간이면, 언제나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는 꿈속에서 본 ‘원작’의 엘피 이나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 무력함과 절망감은, 그녀 역시 회귀 전에 트론의 시체 앞에서 맛보았던 감정이었다. 라이샤의 힘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피는 얼른 눈물을 닦아 내고 뺨을 두드렸다. 트론에게 도움이 되려면 이렇게 바보같이 굴 때가 아니었다. 맡은 일을 하나라도 더 해내야 했다.

그녀가 다시 서류와 씨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사먼이었다.

엘피는 얼른 다가가 창을 열었다.

“사먼! 갑자기 무슨 일인가요?”

자신이 부르기 전에 그가 이런 식으로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엘피 님.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가다니, 어디를요?”

“주군이…… 계신 곳으로요.”

사먼의 표정이 어딘지 우울해 보여서, 엘피는 트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저, 전하께 무슨 일 생겼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상황이 엄중하다 보니 함께 행동하시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랬군요. 왕자님이나 가이 님한테는 따로 연락이 없었는데, 갑작스럽네요.”

“두, 두 분께서도 이래저래 바쁘시니까요. 개별적으로 연락을 할 여유가 없으신 것 아닐까요.”

“……그렇지요.”

당연한 일이었지만, 직접 지시를 받지 못한 것이 조금 씁쓸했다.

‘바보. 특별 취급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자신을 꾸짖으며 엘피는 이어서 질문했다.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할까요?”

“가능하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럼 인수인계만 마치고 바로 출발 준비를 할게요. 전하께서 지시하신 일도 있으니까, 조금 늦는 건 왕자님께서도 이해하실 거예요.”

“……네. 그럼 준비되는 대로 불러 주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그나저나 사먼, 기운이 없어 보여요. 무슨 일 있나요?”

사먼은 잠시 허둥지둥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거사가 다가오니 저도 긴장이 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하긴, 저도 그래요.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실 때까지 참 길었죠. 얼마 안 남았네요.”

“……네.”

“그간 이래저래 감사했어요. 사먼.”

“과분한…… 말씀입니다.”

“전혀요! 르터바이스 협곡 때도 그렇고, 사먼은 항상 왕자님을 위해 몸을 바쳤잖아요. 저는 그런 일은 못 하니까……. 사먼이 부럽고, 감사하기도 하고 그래요.”

“저는…….”

사먼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네. 빨리 준비할게요!”

사먼은 소리 없이 금세 사라졌다. 엘피는 다시 창문을 닫으며 책상 위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우는 것을 생각하면 최대한 빠르게 중요한 일을 끝내 둬야 할 듯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하루라도 빨리 트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 마음을 원동력으로, 엘피는 쌓여 있는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

깊은 밤, 루베인은 제시드와 함께 처필의 사유지에 잠입 중이었다.

처필과 관련하여 무성한 소문 중 하나는 최근 처필이 상업적 가치가 없는 토지를 사들여서 사유지를 계속 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루베인은 그 사유지가 아마도 마약 재배와 이어져 있으리라 추측해서 뒤를 캐고 있었다.

이전에는 사유지에 들어가고 싶어도 특별 감찰관의 권한과 수하들의 능력 범위로는 어려워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천재 마법사이자 주술사인 제시드가 동행하게 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써먹으라는 신의 계시로 느껴졌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제시드가 루베인을 감시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경계망, 풀었습니다. ……그런데 루베인 님, 멋대로 사유지에 들어가도 되나요?”

“그야 물론 안 되지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약간의 편법쯤이야.”

루베인이 밝게 웃으며 법을 무시하는 소리를 했다. 그녀는 제시드가 자신보다 연하라는 이유로 말을 놓고 있었다.

“편법이 아니라 불법 같아요…….”

“거참, 왕위 찬탈 예정자 밑에서 일하면서 간도 작네.”

“그거, 주인님도 가끔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와 행동을 함께하게 되고 얼마간 시간이 흘렀지만, 역시 어딜 봐도 그 재수 없는 세틱스 왕자의 수하로는 어울리지 않는 청년이었다.

“넌 정말 세틱스 스레데니옴하고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루베인 님은 주인님을 잘 모르잖아요.”

“어휴, 잠깐 봐도 재수 없는 인격이 뚝뚝 떨어지던데 그걸 꼭 오래 봐야 알겠어?”

루베인은 1년 전에 만났던 세틱스를 떠올리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과장된 반응에 제시드가 쓰게 웃었다.

“라이샤라고 해도, 전생의 일이라면서. 그 사람이 너희 집안에 방문했을 때 공교롭게 네가 각성했다고는 하지만, 그냥 우연이잖아.”

“…….”

“굳이 그 사람을 따를 이유가 있어?”

“저희 가문은 솔피시언가의 종속 주술사니까……. 솔피시언 공이 밀고 있는 세틱스 전하를 돕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뭐랄까, 근본적으로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영 마음에 안 들면 도망쳐서 다른 가문에 몸이라도 의탁하면 그만이잖아. 너 정도의 실력이면 도망쯤이야 쉬웠을 텐데.”

“…….”

제시드는 대답 없이 주변의 이상을 탐지하는 마법 종달새를 공중에 불러내서 날려 보냈다.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었기에, 루베인은 답을 재촉하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강박관념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강박관념?”

“전생에 라이샤라고는 했지만. 역사상의 라이샤들은 모두 왕을 보필해서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했고, 좋은 결말을 맞이했죠.”

“응, 그랬지.”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실감이 없어요. 끊임없이 이번에는 꼭 주인님을 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죠. 그래서 생각해요. 저는 전생에 라이샤로서 실패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어쩌면, 승리하지 못해서 역사상에서는 묻힌 라이샤가 있을지도요.”

제시드의 목소리는 어딘지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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