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6)
“세상에, 이렇게까지 제정신이 아닌 분이었을 줄은.”
“…….”
“으음,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죠. 다음은 손가락, 어떠세요?”
트론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그 말을 따르려는 것처럼 왼손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엘피는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뭐, 하는……!”
솔피시언 공작이 당황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에게 붙들려 있던 금발 소녀가, 몸을 움직여 그가 쥐고 있던 칼날에 자신의 목을 박아 넣었다. 엄청난 피가 흘러나왔다.
소녀는 그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트론을 향해 외쳤다.
“전, 하! 지금……!”
트론이 일갈하며 단번에 달려갔다. 순간적으로 다리의 상처조차 잊은 듯한 초인적인 힘이었다.
그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엘피를 떼어 낸 후 솔피시언 공작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목을 베었다.
원래도 피투성이였던 트론의 몸에 다시 핏물이 튀었다.
“엘피!”
트론은 곧바로 쓰러진 소녀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아, 전하, 무사해서, 다행…….”
“말하지 마! 지금 바로 치료하겠다.”
그녀는 멍해진 눈을 깜빡이다가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까지, 폐만 끼쳐서…….”
“말하지 말라고!”
“죄송, 하…….”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소녀는 그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엘피. 엘피?”
트론이 어딘지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팔을 잘라 내어 그것을 제물로 주술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싸늘해진 소녀의 생명력을 되돌리려는 술식이었다.
하지만 죽은 자를 되돌리는 것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 주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헛된 발버둥이라도 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미쳐 버릴 것 같아서 그 충동을 잠재우려는 것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피는 그대로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솟구쳐서 멈추지를 않았다.
지금의 자신이 아니다. 지금의 트론도 아니다. 그저 꿈속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렇게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회귀 전에 트론이 그녀를 살리고 죽었던 일이 떠올랐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뜨거웠다.
엘피는 엉엉 울며 바닥에 엎드렸다. 무력함과 괴로움이 온몸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왕자님…….’
원작에 나와 있는 묘사들은 단편적이었다.
솔피시언 공작은 세틱스의 뒤에 있다가 트론에게 일찍 처단당했다거나. 베일에 싸인 과거 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가 몸을 다치게 되었다거나.
짤막한 문장 안에 담겨 있는 무게와 비극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울고, 또 울었다.
***
침대에서 일어난 엘피는 축축해진 눈가를 쓸었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마치 직접 겪었던 일인 양 아직도 생생했다.
그녀는 눈물 때문에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찬물로 세수하며 꿈의 내용을 되씹었다.
‘이미 한 번 회귀했어. 그전에도 같은 일이 없으리라는 법은…….’
어쩌면 ‘원작’이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 실제로 있었던 일 아닐까.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직접 겪은 기억도 없는 과거의 일을 꿈으로 보게 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미 화재가 일어난다는 미래의 일은 꿈으로 보았다. 그걸 막기 위한 일들도 진행하고 있다.
‘혹시 내가 인질이 되는 일이 생기는 걸까……?’
꿈속에서는 솔피시언 공작이었고, 지금 상황이라면 악에 받친 헤럴드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적들이 보기에 자신이 가치 있는 인질은 아닐 것 같지만, 사람 일은 장담할 수 없는 법이었다.
트론은 엘피를 누나이자 신하로서 아껴주고 있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리스크를 질지도 모른다. 그에게 폐가 되는 일만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누나이자, 신하.”
트론에게 있어서 자신의 위치를 새삼스럽게 되뇌자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엘피는 심장 부근을 문질렀다. 이제 트론이 왕이 되고 나면 태평하게 누나라고 자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울적한 건가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한번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엘피는 아침 업무를 진행하며 어제의 꿈을 트론에게 말할까 말까 망설였다.
트론이 궁에 있다면 지나가는 말로 전달하겠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말러를 만나기 위해 며칠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아일란을 통해서 구태여 전하기에는, 명확한 미래 예지가 아니라서 말할 거리가 못 되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트론이 자신에게 사먼을 붙이고 갔으리라고 짐작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한참 사먼의 얼굴을 못 보기도 했다.
엘피는 오전 업무를 해치운 후,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테라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사먼, 거기 있나요?”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푸른 머리의 청년이 소리 없이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엘피는 손을 저으며 그를 일으켰다.
“저는 왕자님이 아니니까 그러실 필요 없대도요.”
“……아뇨. 당연한 것을요.”
“이번에도 전하께서 떠나면서 제 호위를 부탁하신 거죠?”
“그렇습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이래저래 뒤숭숭한 시기라서요. 일부러 말할 것까지도 없겠지만, 제 주변의 안전에 더 신경 써 주셨으면 해요. 제가 약한 사람이라 폐를 끼치게 되는 것 같아요. 항상 감사하고 죄송해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더 신경 쓰겠습니다.”
“네! 그리고 온 김에 오랜만에 저랑 차 마셔요. 사먼은 꽃잎 차를 좋아했죠?”
엘피의 제안을 듣고 사먼이 약간 당황한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저는 바로 주변을 경계하러 가겠습니다.”
“엇…….”
사먼은 그녀가 만류할 새도 없이 테라스 창 저편으로 사라졌다.
엘피는 그에게 어렴풋이 위화감을 느꼈다.
사먼과 알고 지내온 지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트론을 함께 모시는 신하로서 동지 의식이 있었다. 단순하고 순박한 성격이라 대할 때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어딘지 태도가 딱딱하고 표정이 굳어 있었다.
“하긴, 2차 데니옴 회의가 얼마 남지 않아서 저쪽도 바쁠 텐데. 괜히 내가 신경 쓸 일을 늘린 것 같네.”
자리를 비운 트론에게 별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엘피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
트론은 카라스에서 공식 일정을 마치고 가이의 포털을 통해 구릉지로 이동했다. 관청을 방문하는 공식 일정과 저녁 식사 사이의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구릉지의 북쪽으로 카라스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저물어 가는 태양이 도심을 붉게 비췄다.
트론은 예전에 엘피와 함께 갓 도망치기 시작했던 때를 떠올렸다. 데니옴 왕궁의 비밀 통로를 지나 한참을 걸어 카라스에 도착했었다.
‘피곤했는지 엘피는 금세 잠들었었지.’
위기의식이 없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고, 어이가 없었다. 순진한 그녀의 사고방식을 조소하기도 했고, 때로 무시했다.
그랬던 자신이 그녀를 이토록 애틋하게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열두 살의 자신은 그녀를 살려 두는 편이 즐거울 것 같아서, 엘피 이나드를 따라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무척이나 옳았다.
5년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을 돌이켜보면 즐거운 일투성이였다.
그렇게 감상에 빠져 있으려니,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트론은 쓸데없는 생각을 밀어내고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왕세자 전하.”
“오랜만이구나. 트론.”
“네, 그렇네요…….”
트론은 자신보다 여섯 살 연상인 큰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피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주 어릴 때는 이 유약해 보이는 형이 무척 크게 느껴졌었다.
세틱스가 이유도 논리도 없는 폭력을 행사하고 지나가면, 말러가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것이 기뻤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는 감정이 마모되어 그런 사소한 기쁨마저 느낄 수 없게 되었지만.
트론은 어린 시절 줄곧 공식 석상에 모습을 비추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언제나 감옥 같은 삼 왕자궁에서 갇혀 지냈다. 그래서 말러와 제대로 말을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말러가 삼 왕자궁으로 몰래 찾아온 적이 있었다.
일하느라 바빠서 자식과 대화를 나누는 법을 잊은 가장과 자식처럼 형식적이고 어색한 대화가 몇 번 오갔다. 딱히 그게 대단한 추억이나 위안은 아니었다.
그래도 트론은 역시, 말러가 밉지 않았다.
만약 상황이 순리대로 풀리고 사건이 없어서 말러가 왕이 되었다고 해도, 신하들에게 휘둘리기는 하겠지만 암군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는 가정이지만.’
트론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와 직접 얘기를 나누고 싶으셨다고요.”
“그래. 르터바이스 소백작이 애써 주었다지. 내 고집을 들어주어서 고맙다.”
“아닙니다. 전하께 무리한 청을 넣은 건 이쪽인 것을요. 오히려 저희의 말에 귀 기울여 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트론의 예의 바른 응대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허울만 좋은 왕세자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사람이 상대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 많이 컸구나.”
“왕세자 전하께서도 제가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보다 장성하셔서,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트론. 이곳은 공식 석상이 아니니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도 된단다.”
“…….”
완벽했던 트론의 얼굴에 처음으로 살짝 금이 갔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가 시선을 돌렸다.
“……우애 좋게 형제의 정을 논할 자리는 아닌 것으로 압니다.”
“안다. 내가 뻔뻔하게 이런 소리를 할 자격이 없는 것도 알아.”
“…….”
“그래도 트론. 어차피 이양해야 할 왕세자 자리라면, 주위 상황이나 제 목숨 보전하려 발버둥 치다가 그랬다는 것보다는, 그래도 형제의 정으로 자신보다 뛰어난 동생에게 기꺼이 넘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말러는 조금 씁쓸한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