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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99화 (99/132)

99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5)

“역시 그랬군요.”

“그…… 러시면 안 돼요, 루베인 님.”

“그러면 안 된다니요?”

“이렇게 되면 저는 루베인 님을, 계속 붙잡아 둘 수밖에 없어요.”

“주인님의 정보가 새어 나가니까?”

“…….”

그가 울적한 얼굴로 끄덕였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마법으로 그녀를 협박하거나 붙들 수 있는 주제에, 그의 얼굴만 보면 이 상황이 난처해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가이 님이나 트론 전하는 이미 파악하고 계시겠지.’

직접 만났던 ‘세드릭’의 외견 정보는 전달한 상태다. 세틱스의 외모를 모르는 자신과 달리 트론은 1년 전에 그의 정체를 확신했을 가능성이 컸다.

‘알려 주셨어도 되는데, 섭섭하게. 뭐, 선을 본 기분 나쁜 상대가 이 나라의 둘째 왕자라는 사실을 안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지만.’

루베인은 제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음으로 궁금한 건, 왜 당신이 처필 영지에 있는 거죠? 그리고 저를 감시한 이유도요.”

“그건…… 주인님의 명령이라서요. 당분간 루베인 님을 지켜본달까……. 보호하라고요.”

“보호요?”

“네. 정체를 눈치채셨으니 짐작하시겠지만, 이제 곧 주인님은 본격적으로 움직이실 겁니다. 주인님의 비가 되실 루베인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보호하라는 명이었습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저 그 사람이랑 결혼 안 할 건데요.”

“어, 어째서요? 그분은 곧 왕이 되실 분이에요.”

“애초에 그 사람이 왕이 되든 황제가 되든 결혼할 생각 따위는 없고.”

루베인은 샌드위치의 종이 포장을 주스 잔 안에 욱여넣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 나라의 왕이 되실 분은 트론 전하인걸요.”

“그건 당치도 않은 생각이세요. 루베인 님.”

“당치도 않다뇨?”

“……저는, 태어난 이후부터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혼이 텅 비어 있는 백치 같은 상태였는데요.”

제시드는 표면에 물이 맺힌 잔을 꾹 쥐며 설명했다.

“세틱스 님이 저희 가문에 오셨을 때, 제 정신이 온전히 돌아왔어요. 마치 그때 몸에 혼백이 깃든 것처럼요. 저는 백지장 같은 상태에서도 딱 두 가지를 알 수 있었어요.”

“두 가지……?”

“하나는, 제가 전생에 제시드라는 이름이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그는 망설이며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전생에, 라이샤였다는 것.”

루베인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확신할 수는 없어요. 그 외에는 제가 전생에 무얼 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어요. 제가 누군가를 선택해서, 그 사람을 꼭 왕으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걸.”

“……그리고 그 사람이 세틱스 스레데니옴이라는 거예요?”

“그분이 저희 가문에 오셨을 때 제가 각성했으니, 아마도 그렇겠죠.”

“지금도 미래를 읽을 수 있어요? 신이 세틱스 전하를 도우라고 지시라도 내렸나요?”

루베인이 라이샤 설화에 대한 지식을 떠올리며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전혀 그런 힘이 없어요. 그러니 제 망상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주인님은 그게 뭔 상관이냐며 웃어넘기셨어요. 제 마법과 주술만으로도 도움은 충분히 된다고. 감사한 말씀이죠, 저 같은 반푼이한테.”

“…….”

“저는 그래서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루베인 님 역시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세틱스 님과 행복해지기를 바라고요.”

루베인은 제시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웬만해서는 미친 소리라고 비웃어 넘길 말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감도는 긴장된 공기가, 그녀 안에서 꿈틀대는 감이, 제시드의 말이 사실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라이샤…….’

“죄송하지만, 루베인 님. 앞으로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감시…… 라고 하기는 죄송하지만. 외부에 연락하시는 건 막을 거예요.”

“…….”

세틱스의 정체를 알게 된 자신은 당분간 제시드의 감시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뛰어난 마법사의 일면을 가진 그는 능력적으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혼란, 스럽지만.’

제시드에게 벗어날 수 없는 이상, 우호적이고 허술한 그의 분위기를 이용하여 정보를 빼내는 것이 좋을 듯했다. 나중에라도 트론이나 가이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사람, 정말로 전생에 라이샤였던 거라면, 뭐 때문에 이번 생에 그따위 주인을 고른 건지 모르겠어. 운명이라느니 하지만, 결국 우연이잖아. 본인도 확신하지 못하는 거 같고.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할 방법은 없을까?’

무엇이 되었든,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당분간 그와 행동을 같이하며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알겠어요. 그렇지만 제가 갑자기 외부와 연락을 끊으면 오히려 수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 그렇긴 하네요.”

“정기 연락을 할 때는 당신 앞에서 하도록 하죠. 쓸데없는 소리 하면 바로 차단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좋아요. 음, 그리고 어차피 처필의 비리를 캐는 건 댁의 주인님하고는 관계없죠?”

제시드는 그녀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서 당황하여 답했다.

“일단 제가 알기로는 관계없습니다.”

“저를 보호해야 하니까, 계속 저를 따라다녀야 하겠고요?”

“……거북하시겠지만, 그렇습니다.”

“잘됐네요. 그럼 겸사겸사, 당분간 제가 처필을 파헤치는 것을 도와주세요. 능력 좋은 마법사 겸 주술사 님?”

루베인은 바깥에서 평판이 좋은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요청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제시드는 얼굴을 붉힌 채 허둥지둥하다가,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간신히 답했다.

루베인은 만족한 듯 휘파람을 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능한 조수가 생겼으니, 오늘부터 바쁘게 써먹을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다.

***

잠이 들었던 엘피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어두웠던 주변 풍경이 서서히 바뀌어 갔다.

‘……아, 꿈인가?’

흐릿한 시야가 맑아지자, 그 너머로 언뜻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아직 앳된 얼굴의 금발 소녀, 검은 머리칼을 지닌 아름다운 소년.

어린 시절의 자신과 트론이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캄캄한 새벽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죄송해요, 왕자님. 더 일찍 출발해야 했는데 제가 쿨쿨 자는 바람에.”

“괜찮아.”

“……쓸모없는 사람이라 항상 폐만 되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거, 버리고 가지 그러셨어요.”

“자학이 취미인가?”

“그렇지 않아요.”

“하긴, 배짱 좋게 독을 들이켜는 인간이니 자기 학대의 달인이긴 하군.”

“그, 그건 오해예요!”

엘피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위화감을 느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트론과 저런 대화를 나눈 일이 없었다.

‘내가 독을 들이켰다고? 그렇다면 설마…….’

그녀가 독을 마시는 것은 원작인 <금빛 날개와 은빛 검>에서 나오는 이야기였다.

유모의 딸 엘피 이나드는 트론을 독살하기 위해 투입되었다가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트론에게 독을 주는 대신 본인이 독을 마셔 자살했다.

‘독을 마셨으니 당연히 죽은 줄 알았는데, 실은 살아났던 건가?’

어차피 꿈속의 일이니, 자신의 머리가 만들어 낸 망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라이샤인 자신이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며 보는 내용은 보통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모습을 관찰했다.

“버리고 가기를 바라는 건가?”

“바, 바라지는 않지만요. 전하께서 저를 굳이 달고 다닐 이유는 없잖아요.”

“그대는 내 비밀을 여럿 알고 있지. 버리고 가면 적에게 그 정보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럼 왕자님은 왜 저를 살리셨나요? 그것 때문에 저에게 주술사라는 사실도 들키셨잖아요. 죽이는 게 가장 깔끔했을 텐데.”

트론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금발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주군을 죽이는 것보다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는 부하는 얻기 어려우니까. 언젠가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저는 전하한테 쓸모 있는 사람인 거예요?”

“응.”

어린 엘피가 활짝 웃으며 트론을 꽉 껴안았다.

“꼭 전하한테 도움이 될게요! 지금이라도 뭔가, 암살 같은 거 공부할까요?”

“됐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할 건 없다.”

“죄송해요, 머리도 좋지 않고, 무술이나 마법 능력도 없어서……. 제가 왕자님한테 더 도움이 되는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지 마. 그대는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야.”

자신을 안고 있는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트론이 나직하게 달랬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는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는 게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을 거다.”

“안 그래요!”

“…….”

그녀는 트론의 어깨를 잡고 홱 몸을 떼며 일부러 발랄한 목소리를 냈다.

“에이, 제가 괜히 이상한 이야기 꺼냈네요. 얼른 가요, 전하! 점심까지 마을에 도착해서 맛있는 거 먹어요.”

“……응.”

자그마한 소년과 그보다 키가 큰 소녀는 손을 잡고 포장되지 않은 길을 걸어갔다. 서서히 고개를 드는 태양이 그들의 뒷모습을 비추었다.

엘피는 알지 못하는 남의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신기할 정도로 그 소녀의 마음과 트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예전에 실제로 겪었던 일처럼.

엘피가 눈물을 닦아 내는 사이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어두컴컴한 성채 같은 곳이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피투성이가 된 트론이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방금 봤던 소년 시절보다는 키가 컸지만, 아직 얼굴에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상황은?”

푸른 머리의 청년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솔피시언이 이렇게 뒤를 칠 줄은…….”

“잘잘못을 따지는 건 됐다.”

“제압은 끝났습니다. 저희 쪽의 손실도 큽니다만, 라블미 백작님의 원호도 있어서 금세 수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어서 정리를…….”

트론이 몸을 돌렸을 때, 갑자기 복도 저편에서 쾅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트론의 눈이 흔들렸다.

“와, 왕자님…….”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보랏빛 머리의 청년이 엘피를 붙든 채 목에 칼을 대고 있었다.

“여기까지입니다, 트론 전하. 당신이 이 계집을 아끼는 건 알고 있어요. 순순히 물러나시죠.”

“……렌포우 솔피시언.”

“계집의 목숨이 아까우면 군을 모두 물리세요.”

“왕자님, 이 사람 말 듣지 마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솔피시언 공작은 들고 있던 칼로 그녀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 얕은 상처였지만 금세 피가 흘렀다.

트론은 형형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쏘아보며 씹어 삼킬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다. 군을 물리지.”

“전하!”

트론은 일사불란하게 솔피시언 공작의 요구에 따랐다. 이윽고 그들의 주변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다.

“무얼 바라지?”

“당연히 세틱스 전하의 왕위 계승입니다. 지금까지 너무 과하게 설쳤어요, 트론 스레데니옴.”

“……차라리 내가 인질이 되도록 하지. 그녀를 내놔.”

“눈물겹네요. 하지만 저에게는 당신을 제압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질이 되는 척 도망가시면 그만이잖아요?”

“…….”

트론은 그 말을 듣고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묵묵히 자신의 정강이를 찔렀다.

솔피시언에게 붙들려 있는 금발의 소녀가 그러지 말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행동엔 망설임이 없었다. 옷자락에 검붉은 피가 새로 물들었다.

“됐나?”

그 목소리에 담긴 온도는 스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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