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4)
“……헉!”
엘피는 몸을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마치 정말로 뜨거운 화재 현장에 다녀온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얼굴도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방금 이건…… 예지몽.’
얼마 남지 않은 데니옴 회의 때까지 트론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오랜만에 열심히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 이후 보게 된 꿈이니, 십중팔구 라이샤로서 읽어 낸 미래가 맞을 것이다.
꿈의 내용을 신뢰하자면 트론은 무사한 모양이었고, 오히려 안위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헤럴드 쪽이었다.
지금까지 꾸었던 예지몽들도 트론 본인이 위험한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트론에게 영향이 있는 내용이 맞았다.
지금 이 꿈도 왕궁이 전소할 정도의 엄청난 화재이니, 사전에 막아야 했다. 트론의 목숨이 무사하다고는 하나,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엘피는 아직도 쿵쾅대는 가슴을 꾹 부여잡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1년 전에 르터바이스 마수 토벌 행사와 관련하여 루베인이 다치는 미래를 바꾸었다가 오히려 트론이 위험했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이 일로 인해 트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다.
전에는 친구인 루베인이 위험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원수인 헤럴드 일 아닌가. 그냥 모르는 척 넘기는 것은…….
‘정말,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야.’
화재에 휘말려서 죽는 사람이 헤럴드 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왕궁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 왕궁 내에 쌓여 있는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소실된다. 트론 한 사람을 위해 그 모든 것에서 눈을 돌리면, 결국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던 헤럴드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 아닌가.
그리고 자신은 그저 트론의 도구였다. 모든 정보를 쥔 채 판단하는 건 어디까지나 트론의 몫이었다. 그녀가 멋대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트론을 걱정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순간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로 결정적인 순간에 전하 한 사람과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해야 한다면…….’
아마도 자신은 트론을 택할 것이다. 죄책감에 평생 짓눌린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만약 저울질해야 하는 것이 자신의 목숨이라 해도, 얼마든지 바칠 수 있었다.
그 마음은 그가 자신 앞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졌던 그날부터 변하지 않았다.
***
엘피는 아일란을 통해 트론에게 연락을 넣어서 약속을 잡았다. 트론은 긴 국무 회의 끝에 늦은 밤에야 집무실로 돌아왔다.
“엘피.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왕자님! 저야말로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을 빼앗아 죄송해요.”
“라이샤로서 꿈을 꾸었다면서. 중요한 일인데, 당연히 들어야지.”
엘피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신이 본 내용을 설명했다.
사방이 불타는 궁전, 불투명한 헤럴드의 안위, 그리고 트론은 무사하다는 연락이 있었다는 것.
“……숙부가 화재에 휘말려 사망이라.”
“네. 솔직히 저희 가족을 생각하면 동정심조차 들지 않지만요. 그래도 데니옴 왕궁이 불타서 사라지는 건 큰일이니까요.”
“응. 그리고 숙부가 물러나더라도 화재로 죽는 건 딱히 좋은 구도는 아니야.”
“그런가요?”
“헤럴드 스레데니옴이 죽었을 때 가장 이득을 볼 건 바로 나니까. 왕위에 올라도 보는 눈이 좋진 않겠지.”
“아, 그건 그렇겠어요.”
‘……하지만 어차피 이 나라를 망치기 위해 보좌에 오르는 왕이니, 그 시작으로는 알맞은 것 아닌가.’
트론은 속으로 자조하며 엘피에게 물었다.
“화재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건?”
“제가 본 꿈에서는 거기까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단순한 사고인지, 방화인지……. 일단 헤럴드 대공이 위험에 처했으니, 방화라고 해도 주체가 그쪽은 아니겠지만요. 혹시 세틱스 전하일까요?”
“글쎄. 리스크가 크긴 하지만, 극단적인 성격이니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당장 1년 전에 르터바이스 협곡에서 대량 마수 소환 주술이라는 무모한 방법을 쓴 것도 세틱스가 뒤에 있는 솔피시언 측의 일이었다.
왕궁을 불태워 버리더라도 트론과 헤럴드를 한꺼번에 없애자고 획책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우선은 화재 예방책에 힘을 쏟기로 하고, 마법이나 주술에 의한 테러 대책도 세워야 할 것 같군. 궁내부를 책임지는 그대에게 큰 짐이 될 듯하지만, 부탁하겠다. 솔피시언 측의 움직임은 내 쪽에서 조사를 지시하도록 하지.”
“네, 전하. 저어…… 무엇보다 전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엘피가 치맛자락 앞으로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말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엘. 누나한테 무슨 일 생기는 거 싫어.”
“론…….”
“그리고 르터바이스 소백작에게 받은 소식인데. 말러 형님이 내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셨다나 봐. 그 일 때문에 조만간 며칠 궁을 비울까 해. 명목상으로는 그 근처의 시찰이 되겠지만.”
“호,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방금 세틱스에 의한 방화가 의심된다는 소리를 들은 상황이라, 엘피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럴 일이 없도록 소백작과 내가 철저하게 움직일 거니까. 말러 형님이랑 이야기 잘 하고 올게. 화재 대책으로 궁내부에서 할 일이 많겠지만, 부탁해.”
“…….”
실은 자신도 따라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트론에게 새로운 업무까지 받은 마당에,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은 철없는 짓이었다.
“용건은 이쯤일 것 같네. 그럼, 들어가 봐.”
“네…….”
엘피는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이미 미래의 꿈은 보았고, 트론에게 말하여 대책도 마련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며 불안한 까닭을 스스로도 알기 어려웠다.
***
트론은 엘피가 나간 후 잠시 한참 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상 뒤에 있는 창문을 열고 나직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사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푸른색 머리의 청년이 소리 없이 창문 앞에 나타나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응. ……그런데 그대, 안색이 좋지 않군. 어디 안 좋은 것 아닌가?”
“아, 아닙니다!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알겠다. 혹시라도 무리하지는 말고.”
“주군의 배려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그와 알고 지낸 지 벌써 7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지만, 충직하고 순박한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왕좌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하여, 웰칸의 연락책으로 자신의 곁에 있었던 자 중 가장 오랜 기간을 함께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대에게는 여동생이 있다고 했던가.”
“아, 네, 넵!”
왜 그런 화제가 나오는 것인지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사먼은 바로 긍정했다.
“거사가 모두 끝나면……. 그대의 고향 근처에 넓게 쓸 땅을 주겠다. 여동생의 주검은 그쪽으로 옮기도록 해. 가장 볕이 좋은 곳으로.”
“그, 그렇게까지 해 주실 건…….”
“그대가 해 준 것에 비하면 알량한 체면치레 정도밖에 안 된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주군…….”
트론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시한부 환자가 주변을 정리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리 다를 것은 없지만 말이다. 감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트론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며칠 내로 카라스 부근에 시찰을 갈 예정이다. 내가 왕궁을 비우는 동안, 평소처럼 엘피를 보호해 주기 바란다.”
“그, 그렇습니까.”
어째서인지 사먼의 반응이 평소와는 달랐다. 보통 자신이 부재중일 때 사먼에게 엘피의 호위를 맡기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트론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걸리는 게 있나?”
“아, 아닙니다! 요즘에는 보통 멀리 가시면 엘피 님과 함께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뜻밖이었습니다.”
“잠깐이기도 하고, 그녀도 바쁘니까. 그럼 부탁하겠다.”
“……네.”
“추가적으로 솔피시언의 움직임을…….”
엘피의 예지몽을 바탕으로 지시를 내리면서, 트론은 사먼에게 느껴지는 위화감을 무시하고 말았다.
얼마 후, 그 일을 후회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
루베인은 제시드와 함께 아침의 세오미 거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원래 가려던 식당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방향을 선회하여 아침 시장으로 갔다. 새벽부터 일하는 마부들을 위한 식당을 제외하고는 이른 아침부터 단둘이 대화를 할 만한 가게가 열려 있을 리는 없었다.
“생선 싫어해요?”
“아, 아뇨.”
“그럼 구운 연어 샌드위치로.”
루베인은 노점에서 연어 샌드위치와 샐러드, 과일즙을 짠 주스를 두 개씩 챙겨서는 성큼성큼 시장을 빠져나갔다.
제시드는 평민들의 시장 거래에 능숙한 그녀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사람이 없는 공원으로 향했다. 벤치에 아침 이슬이 깔려 있어서 루베인은 투덜대며 소매로 대강 물기를 슥슥 닦았다.
“아, 말씀하셨으면 제가 주술로…….”
“됐어요, 앉아요.”
제시드가 우물쭈물하며 옆에 앉자, 루베인이 먹을 것을 내밀었다.
그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역시 제시드 님은 마법사면서 주술도 쓸 수 있었군요.”
“……네.”
샌드위치를 깨작깨작 씹으며 제시드가 작게 답했다.
“그런 경우가 있다니 신기하네요.”
“그게, 율페이든 가문은 주술사의 피가 섞인 가문이라서요.”
“……귀족 아니었어요?”
스레데니옴 왕국에서 주술사는 불가촉 천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귀족가인 율페이든 가문에 주술사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숨기고 있어요. 대대로 솔피시언의 종속 주술사를 하고 있거든요.”
“아아……. 원래 주술사 소양이 있는데, 거기에 더해 엄청난 마법 재능도 발견되었나 보군요.”
“어, 엄청난 건 아니고요. 과찬이세요.”
훈훈하게 이런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닌데도 맥 빠진 대화가 이어지는 것은 제시드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루베인은 화가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뭔가 진심으로 화를 낼 기분이 안 들어.’
루베인은 재빨리 샌드위치를 삼킨 후 주스로 입가심을 했다. 그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갈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저한테 하실 이야기라는 건?”
“아…….”
제시드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루베인 님에게 주술이, 통하지 않은 거요. 비밀로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음……. 원래 비밀로 하고 있는데요?”
“그게, 세…… 드릭 님을 만났을 때도요. 처음 만나는 것처럼 대하세요.”
“……그 사람 다시 만날 생각 없는데요.”
루베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하자 제시드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
“아무튼, 루베인 님이 자신을 기억한다는 걸 알게 되면 주인님의 성격상 무척 즐거워하실 텐데요. 별로…… 루베인 님에게 좋은 방향은 아닐 것 같아요.”
‘……주인님?’
루베인은 잠시 생각했다. 가이에게 들은 정보로 그녀가 만난 세드릭 율페이든이 ‘진짜’ 세드릭 율페이든과 외견 특징이 다른 사람이라는 소리는 들었다.
대리인지, 혹은 솔피시언 쪽에서 신분을 숨기고 루베인과 선을 보이고 싶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선 상대에 대한 불쾌한 기억 때문에 그 사실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지만, 지금 떠올려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시드 님은. 솔피시언의 수하라기보다는 그 세드릭이라는 사람의 수하 같네요. 형제라면서.”
“아…… 그게, 저기, 네. 엄격한 집안이라서요.”
“아무리 그래도 자기 형을 주인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
그가 당황해서 눈을 굴리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루베인은 가늘게 눈을 떴다.
‘솔피시언의 가신이면서도, 공작보다 더 주인으로 모시는 상대. 그리고 그 나이대…….’
“저, 저기, 세드릭 님에 대한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세틱스 스레데니옴?”
루베인이 추리의 결과를 입에 담자 제시드의 얼굴이 완전히 새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