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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97화 (97/132)

97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3)

루베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제시드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어, 어떻게 제 이름을……?”

“사람 이름이랑 얼굴은 잘 외우는 편이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베인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크헤룬이 있으니 여차하면 마법을 써서 시야를 차단한 후 도망가거나, 밖으로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1년 만이네요, 제시드 님. 솔피시언 공작저에서 뵈었던 이후 처음인가요.”

“그게, 그렇긴 한데……. 어, 어째서 저를 기억하시는 거죠?”

방금 사람 이름을 잘 외운다고 말했는데, 그 대답으로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일까. 혹은, 자신의 신경을 흩어 놓기 위한 연막일까. 루베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때보다 더 자라신 거 같긴 하지만, 인상은 바뀌지 않았는걸요. 그야 기억하죠.”

“그럴, 수가. 제가 건 주술은 완벽했는데…….”

제시드가 망연자실하여 중얼거렸다가 아차 하고 입을 가렸다. 루베인이 눈을 찡그렸다.

“주술이요?”

“…….”

“아아, 이제야 알겠네요. 주술사는 사람 기억을 지울 수 있던가, 그런 힘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때 제 기억을 지우려고 했나 보죠?”

“그건…….”

“소용없어요. 전 주술이 안 듣는 체질이라는 모양이거든요. 각하께서는 극비로 하라고 하셨지만.”

루베인은 뒷머리를 긁었다.

“그것 때문에 병에 걸려 아플 때도 주술이 안 들으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아무튼, 댁이 나한테 걸었다는 거죠? 그 주술이란 거.”

“그렇다면, 당신은 세……드릭 님도 기억하고 계신 건가요?”

“네, 뭐 그야.”

보안상의 문제로 트론은 루베인에게 세드릭 율페이든이 세틱스 스레데니옴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있어서 ‘세드릭’이라는 사람은 여전히 재수 없고 불쾌한 사람 정도의 인상이었다.

루베인의 대답을 들은 제시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표범 위에서 뛰어내린 후 루베인을 향해 달려가며 손을 휘저었다. 마법을 발동하는 신호였다.

그녀는 몸을 물리고 검을 빼 들었다. 제시드는 깜짝 놀라며 침을 삼켰다.

그가 다시 손을 들자, 하얀색의 반짝이는 그물 같은 것이 루베인을 향해 날아왔다.

“크헤룬, 가이 님한테……!”

연락을 이어달라는 요청을 하려 했으나, 제시드의 손이 움직이는 것이 먼저였다.

크헤룬이 투명 상태를 풀고 비틀거리며 공중에서 떨어졌다.

[대응, 불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앵무새는 바닥에 축 늘어졌다. 루베인은 바로 크헤룬을 향해 손을 뻗어 붙들려 했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시드는 그녀를 하얗게 빛나는 그물로 속박했다. 루베인이 인상을 쓰며 몸부림을 쳤지만, 그물은 그럴수록 몸을 꽉 죄었다.

“빌어먹을…….”

그녀가 외마디 욕설을 내뱉자 제시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방금 완벽한 솜씨로 적의 마법 물체를 무력화하고 속박에 성공한 사람의 태도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반응이었다. 루베인은 어이없는 마음 반, 짜증 나는 마음 반으로 외쳤다.

“죄송하면 이거나 풀어요!”

“그, 그게. 일단,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라서…….”

“사람을 이렇게 묶어 놓고 잘도 이야기가 되겠네요.”

그의 분위기는 놀라울 정도로 허술했지만, 그 솜씨만은 진짜였다. 그녀는 언젠가 가이가 제시드의 마법 실력에 대해 언급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잠깐, 저 사람은 마법사잖아. 그런데 주술도 걸었다고?’

여러 가지 정보가 마구 뒤엉켰다.

루베인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가 자신을 붙들어 놓긴 했지만, 딱히 해칠 의사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지.’

루베인은 머릿속으로 그에게서 캐낼 수 있는 정보들에 대해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우선 이야기를 하자는 건 저도 찬성이에요.”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꼴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으니 풀어주세요.”

“……검은 거둬 주실 거죠?”

아무래도 자신을 속박한 이유가 검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루베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명예를 걸고 그건 맹세하죠. 어차피 당신 같은 고위 마법사한테 상대도 되지 않을 거고요.”

“고위 마법사라니 당치도 않아요!”

그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손을 마구 저었다. 정말로 사람의 긴장감을 빼앗아 가는 청년이었다. 그러는 사이, 루베인은 자신의 몸을 묶고 있던 속박이 풀린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얼른 바닥에 떨어진 앵무새를 안아 들었다.

“그, 그 아이는. 아마 내일쯤에는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죄송해요, 아무래도 외부에 연락이 가는 건 피하고 싶어서.”

“……솔직히 무척 불쾌했지만, 일단은 알겠어요.”

“네…….”

“후우. 아침 먹었나요?”

“아…… 아니요.”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저, 어제 저녁도 부실하게 먹어서 지금 엄청나게 배고프거든요.”

“그럼 제가 살게요!”

제시드가 눈을 빛내며 루베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보면 볼수록 생김새와 태도만은 해가 없어 보였다. 어쩌면 가이즈카 르터바이스처럼 그런 얼빠진 태도가 의도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냥 타고나기를 긴장감이 없는 것 같단 말이지.’

루베인은 어떻게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

녹음이 짙은 정원에 사제복으로 몸을 감싼 청년 한 명이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밝은 색깔의 주홍빛 머리에 어딘지 소심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청년의 앞으로 푸른색의 광선이 흩어졌다. 푸른빛이 만들어 낸 포털 사이로, 안경을 쓴 은발의 청년이 폴짝 뛰어내렸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렇게 만남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이는 청년을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르터바이스 소백작.”

“듣는 이가 없으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말러 왕세자 전하.”

선왕 세틱스의 장자이자 현재 행방불명으로 알려진 이 나라의 정통 왕세자, 말러 스레데니옴이 불안한 눈빛으로 가이를 보았다.

그는 세틱스와 마찬가지로 솔피시언의 중계하에 교단의 견습 사제로서 정체를 숨기고 보호받고 있었다.

“실은…… 그쪽에서 이런 식의 만남을 청한 것이 뜻밖이었네.”

“그러셨습니까?”

“솔피시언의 눈을 피해 나와 접촉을 꾀할 수 있다면, 바로 죽이는 것이 더 간단했을 테니까.”

“아하.”

가이는 쓴웃음을 보였다. 확실히 만났을 당시의 트론이라면 더 효율적인 방도를 추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트론 전하께서는 합리적인 분이시지만, 온후한 편이니까요.”

“…….”

말러는 두 손을 모은 채 표정을 흐렸다. 여전히 어딘가 슬퍼 보이는 얼굴이었다. 사제복을 입고 있어서 그 모습은 더욱이 처연한 인상을 주었다.

“그 아이는…… 나를 원망하지 않나?”

“글쎄요. 트론 전하께서는 사적인 감정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분이라서요. 왕세자 전하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

“다만,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말러 전하의 목숨과 안전은 보장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런 거래에 있어서 철저한 분이시고, 거짓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네.”

말러는 사제복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살아갈 수 있으면 그만이네. 하지만 두려워. ……나같이 못난 자가 왕세자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을.”

“…….”

“……청을 받아들이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네, 말씀해 주십시오.”

“마음을 결정하기 전에 그 아이와…… 트론과 단둘이서 만나고 싶네.”

가이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했다.

“그건……. 자리를 다시 마련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요. 솔피시언 쪽의 마법 방비는 꽤 철저한 편입니다. 오늘 제가 전하를 만나러 온 것도 정말 간신히 만들어 낸 기회였고요. 하물며, 트론 전하는 현재 은밀하게 움직이기 어려우신 위치입니다.”

“그건 알고 있다. 그대가 힘써 준 것도 알지만……. 그래도 역시 당사자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구나.”

“그렇습니까…….”

가이는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슬슬 여기에 더 머무르기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책임지고 트론 전하께 왕세자 전하의 의향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두 분께서 직접 대면하실 수 있도록.”

“고맙다.”

말러의 답례에 가볍게 인사를 돌려주고, 가이는 다시 푸른 포털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말러는 푸른색의 잔상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자그마한 복사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사제님! 슬슬 기도실에 가실 시간입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지요.”

왕세자로서의 면모는 온데간데없이, 온화한 사제의 모습으로 돌아간 말러는 복사의 뒤를 따라갔다.

***

새카만 어둠 속에서, 엘피는 꿈을 자각했다.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뜨거움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견디기 힘들 정도의 열기에 땀을 흘리며 겨우 눈을 떴다.

불꽃이 왕궁을 불사르고 있었다. 그녀가 상황을 이해할 틈도 없이, 눈앞에 있던 굵은 기둥이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비싼 비단으로 휘감은 벽, 산양의 털로 만든 양탄자. 주변의 타기 쉬운 물체들은 불꽃에 사로잡혀 금세 재로 변해 갔다.

“큰일입니다, 아직 헤럴드 전하가 안쪽에 계세요!”

“하지만 이런 불길을 헤치고 들어가는 건…….”

“주술사나 마법사를 불러와!”

엄청난 기세로 타오르는 그 모습은, 주술사나 마법사 한둘의 힘으로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왕궁의 정원에 있는 늪이나 하수지의 물을 끌어다 뿌려도 불길을 잡기는 힘들어 보였다.

‘……왕자님!’

왕궁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자마자 엘피가 떠올린 것은 트론이었다. 꿈인데도 온몸이 뜨거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트론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전하! ……트론 전하!”

그녀는 삼 왕자궁으로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주변에서 고함을 치거나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사람들은 투명한 상태인 엘피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왕자님! 대답해 주세요!”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를 방해했다. 붉고 푸른색으로 어른거리는 불꽃이 눈물에 비쳐 마치 비현실적인 추상화 같았다.

“……론, 어디 있어!”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어 그렇게 외친 후, 엘피는 풀썩 쓰러졌다.

그녀는 정신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트론의 안위를 걱정했다.

“엘피. 너는 살아 줘. 내가 그걸…….”

먼 옛날 들었던 그의 유언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생생한 죽음의 감촉은 언제나 가장 깊은 곳에 감춰 둔 상처를 헤집었다.

‘……왕자님. 그렇지만 저 혼자 살아남는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엘피는 들어줄 사람이 없는 대답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순간, 삼 왕자궁 근처에 있던 근위병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트론 전하께서는 무사하시다고 합니다! 본궁 밖에 계셔서 화를 면했다는군요!”

“알겠다! 헤럴드 전하의 안위를 확보하도록!”

엘피는 크게 안도했다. 트론은 무사하다는 모양이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다시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꿈의 그림자가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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