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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96화 (96/132)

96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2)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엘피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항상 말하잖아. 누나는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둘러대도 소용없다고. 무슨 일인데?”

“그…… 게.”

그녀는 트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론이랑 보는 거 며칠 만인데, 일 얘기만 하고 바로 헤어지는 게 섭섭해서…….”

“…….”

트론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엘피는 고개를 숙인 채 불안해했다. 이렇게 위중한 때에 철없는 소리나 해서, 그가 실망한 것은 아닐까.

트론에 대한 것만 생각하면 불안하고, 그러면서도 가끔은 벅차고, 가슴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엘피는 자신이 정서 불안이 된 것 아닌가 생각했다.

“……같이 차 마시자. 누나. 나도 잠깐 쉬려고 했어.”

“아…….”

엘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다시 들었다. 어딘지 난처한 듯 웃는 트론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이 그를 곤란하게 만든 것인가 후회되면서도, 트론의 다정한 말에 심장이 꾹 조였다.

“미안해, 바쁜데…….”

“미안할 거 없어.”

살며시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그의 표정이 온화하게 풀렸다. 울 상황이 아닌데도, 어쩐지 울고 싶었다.

가슴을 찌르는 불안함과 달콤한 안도감이 교차하는 1년이었다.

트론과 함께해 왔던 오랜 세월 중, 가장 자신의 감정을 종잡을 수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엘피는 필사적으로 그 감정의 답을 찾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답을 찾지 않는 게 옳은 것만 같아서.

중요한 건 라이샤로서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왕좌를 향한 길까지, 그에게 고난이 없는지 확인할 차례였다.

‘르터바이스 영지의 마수 토벌 때도 간절히 기도하니까 꿈을 꿨었지.’

꽤 오랜만이지만, 꿈에서 미래를 보는 힘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러고 보니 엘은, 라이샤의 능력으로 말러 형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트론이 말러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응,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세틱스 전하보다는…… 그나마 나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

회귀 전에 트론이 복권하여 왕궁으로 돌아갔을 때 말러는 이미 고인이었고, 그 외에 알고 있는 것은 원작의 정보였다.

원작에서 그는 유약하여 남들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죽는 역할이었다. 아마 회귀 전의 진상도 비슷하지 않을까.

“론한테는 어땠어? 나쁜 사람이었어?”

“글쎄. 어느 쪽으로 잘라 말하기는 어려우려나.”

트론은 눈을 내리깔며 품위 있게 차를 목으로 넘겼다.

“세틱스 형님이 나를 종종 괴롭히러 왔다는 건 엘도 알겠지만. 말러 형님은 그걸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했거든.”

“안 한 게 아니라, 못 했다고?”

“말러 형님은 세틱스 형님을 무서워했으니까. 그래도 눈치를 보면서 나중에 도와주려고 했어. 자기라고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좀 심하게 다치고 난 다음 날 치유 마법사를 보내 준다거나, 선물 받은 귀한 간식을 보내 준다거나.”

“……그랬구나.”

트론의 12살 이전 어린 시절은 엘피로서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에게 무척 혹독한 시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나마 말러한테까지 괴롭힘을 당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그걸로 형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긴 해. 폭행을 말리지 못하고 방관하는 게 스스로 양심에 찔려서, 그냥 자기 마음 편해지자고 선심을 베푼 것일지도 모르고.”

“응.”

“그래도 난 말러 형님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아. 사람이 누구나 강할 수는 없는 거니까.”

“…….”

엘피는 때로 눈앞의 청년이 지나치게 고고해서, 울컥할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을 원망하고 증오하며 파괴해도 그만이었을 텐데.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는 ‘원작’의 트론은 그 고고함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길 만큼 고통받았던 것 아니었을까.

직접 만날 수 없으니, 그가 그 지경으로 폭군이 되었던 이유는 이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말러 전하도 론의 제안을 좋게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다.”

“거절당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또 그에 맞춰서 생각하기로 하고.”

트론은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참 길고도 짧았지. ……누나랑 만난 지도 벌써 5년 가까이 흘렀네.”

“그러게, 정말 세월 빠르다. 론이 이제 보위에 오르면…… 이렇게 같이 차를 마시는 것도 어려워지겠네.”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했지만, 엘피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조금 상처받는 기분이었다. 그 마음을 얼버무리듯 웃으면서 누나답게 말했다.

“더 많이 바빠질 테니까 그때 생각해서라도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자고, 체력 비축해야 해?”

“…….”

트론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곧 왕위에 오른다. 예정되었던 그대로다.

물론 평화롭게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었다.

악에 받친 헤럴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세틱스가 이후에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기에.

하지만 이 나라와 함께 멸망해 갈 첫걸음을 떼게 될 것이다.

그는 그런 생각을 티 내지 않으며 엘피를 향해 웃었다.

“……응, 그럴게. 그때가 되면 누나한테 제대로 작위를 내릴 수 있겠네. 참 길었지.”

“난, 작위 받지 않아도 괜찮은데.”

“누나는 공신이잖아. 그 정도는 받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해.”

엘피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공에 대해서 언급될 때 항상 이런 반응이었다.

처음에는 엘피의 진의를 줄곧 의심하던 때도 있었다. 자신에게 무언가 받아 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왕이 되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트론 스레데니옴이 좋은 왕이 되기만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모든 거래에 공정한 대가를 돌려주었지만 엘피에게만은 제대로 된 대가를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괴로웠다.

‘……아니, 사실은.’

그저, 그녀를 옆에 잡아둘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울 뿐이었다.

오래도록 고민해 왔지만, 결론은 한 가지였다.

길게 유예했던, 그녀가 자신을 떠날 때가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것.

그는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

동쪽에 위치한 처필은 전체적으로 늪지와 습한 지역이 많았다. 루베인은 처필의 중심 도시 세오미에서 멀지 않은 늪지대에 있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상태로.

“아, 진짜. 정보 잘못 준 자식 다시 만나면 족쳐 버릴 거야.”

특별 감찰관 생활 1년, 늘어난 건 험한 입담뿐이었다.

그녀는 최근 처필 공작이 파산 위기에 시달리다 결국 마약 재배를 시작했다는 정보를 듣고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특히나 중요한 정보 같아서 수하를 보내지 않고 직접 와 봤더니, 결론적으로는 늪지에서 나뒹굴어서 옷만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하아…… 크헤룬.”

루베인은 얼굴에 들러붙은 거추장스러운 진흙을 대충 털어 버리고 ‘크헤룬’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스레데니옴 역사상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아나이테에게 구혼했던 전사의 이름이었다.

공중에서 푸드덕 소리를 내며 무지개색의 반투명한 앵무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앵무새는 루베인의 주변을 빙빙 돌며 멋대로 지껄였다.

[루베인, 바보. 루베인, 멍청이.]

“죽을래?”

[나, 마법 물체. 죽음, 불가능.]

“됐다, 너랑 대화를 하는 내가 바보지.”

[루베인, 바보. 사실로 인정됨.]

“가이 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만들어 냈담.”

루베인은 지끈지끈 아파 오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크헤룬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마법 앵무새인 크헤룬은 기존의 전서구를 개량하여 연락 기능 외에도 몇 가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최첨단 마법 기술의 정수였다.

하지만 마치 진짜 앵무새라도 된 것처럼 얄미운 의사소통 기능은 대체 무슨 의미로 달아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크헤룬, 세오미로 돌아갈 거야. 길 안내해 줘.”

[예상 소요 시간 4시간 30분. 저녁에 도착.]

“하아, 저녁 식사는 뭘 먹든 맛있게 생겼네……. 알았어, 가자.”

크헤룬이 날갯짓하며 앞장섰다. 루베인은 몸에 붙은 진흙을 떨구어 내며 빠른 걸음으로 앵무새의 뒤를 따랐다.

***

세오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태양이 반쯤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도시 사람들은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는 루베인을 곁눈질하며 노골적으로 수군거렸다.

진흙이 말라붙어 본인 꼴이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루베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최근 1년간 감찰관 생활을 하며 이 이상으로 험한 꼴을 본 적도 많았다.

그녀는 머리칼에 들러붙은 진흙을 손으로 으깨어 툭툭 털며 체크인해 둔 여관으로 향했다.

감찰관 예산으로 호텔에 묵을 수도 있었지만, 이쪽이 마음 편했다. 뜻밖의 정보를 얻는 경우도 많았기에 그녀는 호텔보다는 여관을 선호했다.

루베인은 진흙투성이가 된 자신에게 난색을 표하는 여관 주인을 뒤로하며 얼른 방으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진흙으로 얼룩진 옷은 아무래도 버리는 게 좋을 듯했다.

그녀는 피곤에 절어 마른 빵으로 대충 저녁을 때운 후 푹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루베인은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그녀는 하품을 삼키며 대충 씻은 후 여느 때처럼 가벼운 남성 여행복으로 갈아입었다. 어제 엄청난 노동량에 비해 부실하게 먹어서인지 무척 배가 고팠다.

“마부들 단골 식당에 가 볼까. 맛도 있고, 뭔가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베레모를 깊이 눌러쓴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슴푸레한 거리로 나섰다.

식당으로 이동하는 도중, 루베인은 순간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거리를 오가는 것은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러 가기 바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범상한 시선은 아닌 것 같았다.

“크헤룬, 투명 상태로 주변을 살펴 줘.”

크헤룬은 아주 작은 날갯짓 소리만 남기고 투명한 상태로 날아올랐다.

[이상 감지, 마법 반응.]

“……!”

[동쪽에 위치한 골목 안. 후드를 쓴 남성.]

루베인은 크헤룬이 안내하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앵무새의 말대로, 동쪽 골목 사이에 후드를 쓴 남성이 사람 눈을 피하는 것처럼 서 있었다.

좁은 골목은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지만, 키가 커서 금세 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루베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듯 안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미행이라기에는 너무 어설픈데. 처필 공작이 보낸 끄나풀이 맞나?’

몸동작도 미숙하고 뛰는 속도도 생각보다 느렸다. 덕분에 루베인이 그를 쫓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그가 달려간 방향은 막다른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오래된 도시 특유의 복잡한 구조가 루베인에게는 도움이 된 셈이었다.

“야, 거기 서!”

청년은 루베인의 일갈에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하지만 바로 잽싸게 손을 휘저었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서 반투명한 표범이 나타나서 훌쩍 뛰어내렸다.

‘마법사!’

루베인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청년은 그 틈을 노려 얼른 표범 위에 올라탔다. 서두른 탓인지, 그의 후드가 그대로 흘러내렸다.

그가 후드를 올리는 것보다 루베인이 그의 생김새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붉은빛 머리칼, 이제는 앳된 티가 가신 그 얼굴.

“……제시드 님?”

1년 전, 솔피시언 공작저에서 만났던 율페이든 후작의 차남, 제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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