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진심과 이지러진 달 (1)
하늘에는 반달이 걸려 있었다. 이른 저녁이라 아직 서쪽에 있는 해의 흔적이 붉었다.
밤과 낮이 섞여 자아내는 빛이 숲을 비췄다.
은녹색을 띠는 나무들이 서로 이파리를 부딪치며 기묘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처필령과 솔피시언령 경계에 걸쳐 있는 그 숲은 들어가기만 하면 행방불명된다는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발길을 끊었고, 산짐승조차 드물었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이지러진 달의 숲’이라고 불렀다.
사먼은 산짐승도 들어가기 힘든 그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나아가다가 넝쿨이 매달려 있는 높은 바위벽에 다다랐다. 무릎을 꿇고 벽을 향해 검은빛의 문양을 그려냈다.
그와 동시에 벽을 감싸던 넝쿨이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벽으로만 보였던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주술사 연합 ‘웰칸’의 본거지로 통하는 길이었다.
***
“그래, 수고했어. 사먼.”
할리케가 생긋 웃으며 그를 칭찬했다. 사먼은 고개를 조아렸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장로님.”
“아니. 너는 항상 잘해 주고 있는걸. 네 덕분에 우리 주군이 왕좌에 앉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렇지요.”
임시 대공 체계가 선언된 ‘데니옴 회의’로부터 4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2개월 정도만 있으면 왕세자 말러와 그 동생 세틱스가 실종된 지 딱 5년째가 된다. 임시 대공 체계가 끝나는 날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분명히 기쁜 일인데, 사먼의 낯빛은 어딘지 어두웠다. 할리케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너에게 내린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니?”
“아닙니다……! 다, 다만. 어차피 헤럴드는 이제 세력이 다했는데, 굳이 ‘그런’ 방법까지 써야 하는지 조금 의문이 들었습니다.”
“도구에게 의문은 필요 없단다.”
사먼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바닥에 댔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뭐, 네 말대로 헤럴드는 이제 병든 들짐승이나 다름없지만. 주군께서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끝이 아니잖니. 그 시작은 무엇보다 화려해야 한단다.”
할리케가 얼굴 가득 올려놓은 미소는 어딘지 섬뜩했다.
“장로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습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그만 고개를 들도록. 그것보다…… 주군이 마음에 두고 있다는 엘피 이나드라는 시녀 말인데.”
“네.”
“주군께서 계속 거리를 두고 계시다고 했지? 싫증이 나신 건가?”
“그게……. 그냥, 제 생각이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바쁘셔서 그런 것뿐, 여전히 그분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주군께서 그분에 대해서 말할 때의 표정이나 말투 같은 것을 보면요.”
“흐음. 그럼 ‘왕이 된 다음’을 생각해서 애틋한 계집이랑 거리를 두는 건가. 눈물 나는 애정이구나. 잘됐네.”
사먼이 불안한 얼굴로 할리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매혹적인 붉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사먼, 너에게 ‘그 임무’에 앞서 또 하나 명을 내리마. 조만간 그 엘피 이나드라는 계집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렴. 날짜는 나중에 지시하겠다.”
“그분은 주군의 시녀장인데요. 먼저 주군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나요?”
“후후, 여전히 둔하구나. 당연히 주군에게는 비밀로 해야지.”
사먼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 말은 엘피를 납치해 오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할리케는 새카만 곱슬머리를 검지로 뱅글뱅글 돌려 말았다.
“요즘 성군 놀이에 심취하신, 우리 귀여운 조카님께 좋은 선물을 드릴까 하고.”
“무, 슨…….”
“또 의문이 드는 거니? 저런, 나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도구는 싫어하는데. 뭐, 난 친절하니까 다시 말해 줄게.”
할리케가 바닥을 짚고 있는 사먼의 손등을 구두로 찍었다. 사먼은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도구에게, 의문은 필요 없단다.”
***
삼 왕자궁의 후원은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벌레 먹은 이파리 하나 없이 손질된 나무들과 각을 맞춰 줄지어 있는 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엘피는 예전의 기억과는 사뭇 달라진 후원을 둘러보았다. 큰 행사를 앞두고 궁의 모습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시종들도 주변 조경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궁내부에서 이 정도로 신경 쓸 만큼 삼 왕자의 위세가 올라갔다는 뜻이지만, 한편으로 마치 야산을 떼어 놓은 것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예전 후원의 모습이 조금 그립기도 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열두 살의 작은 소년이었던 트론은, 이제 곧 열여덟 살 생일을 맞이한다.
그는 핍박받는 천출 왕자에서 머지않아 보위에 오를 국왕 후보로 바뀌었다. 정원 역시 그런 변모의 상징 중 하나였다.
데니옴 왕궁에서는 조만간 제2차 데니옴 회의가 개최된다. 국론에 따라 왕위에 오를 사람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나라에서 다음 국왕의 자리에 트론이 오른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헤럴드의 세력은 기울었으며, 남아 있는 것은 기계적인 선고 과정일 뿐이었다.
‘문제는 세틱스 전하와 말러 전하지만.’
물론, 철저한 트론은 그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 두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데니옴 회의와 관련하여 중간 점검을 할 겸 의논할 예정이었다.
숨 가쁜 5년이었다. 이제 곧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
“시녀장님. 맡은 구역에 이상 없는 것 확인했습니다.”
“모두 수고했어요. 이어서 다른 궁도 점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지난 1년간 트론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접촉 금지령이었지만, 서로 바쁜 것도 한몫했다.
일주일에 몇 번, 짧은 시간 만날 수 있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엘피는 트론과 가깝지만 멀리 있는 듯한 이 감각이 익숙해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매일매일 그가 생각나고, 그리웠다. 물리적으로 멀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립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데니옴 회의에 대한 논의가 있으니, 가이와 함께이긴 하지만 며칠 만에 트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셈이었다.
‘……왕자님께서 왕이 되면 더 멀어지겠지.’
그가 왕이 되는 것을 계속 바라왔는데, 정작 그 시기가 다가오는 것이 조금 쓸쓸한 모순에 휩싸여 있었다. 정체 모를 감정은 계속 엘피를 괴롭혀 왔다.
엘피는 고개를 저으며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이런 곳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
세 사람은 예정대로 데니옴 회의에 대해 몇몇 논의를 했다.
헤럴드 본인에 대한 것보다는 주로 그의 참모인 라블미가 어떻게 나올지, 처필이나 데하스 쪽의 움직임에 문제는 없을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루베인 님이 감찰하러 떠나신 곳도 처필 영지 쪽이었죠.”
“그랬지. 뭔가 움직임이 있으면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 왕자님도 차암, 빈틈없으셔.”
가이가 평소처럼 익살맞게 칭찬하자, 트론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가장 위험한 인자가 세틱스 형님과 솔피시언이라고 해도, 다른 쪽의 경계를 게을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긴 하죠. 말 나온 김에, 바로 세틱스 전하와 말러 전하 쪽 이야기로 들어갈까요? 전하께서 생각하신 방안은 어떤 건가요?”
“말러 형님에게 왕세자 자리 이양을 요청할까 한다.”
현시점에서 공식적인 왕세자는 말러 스레데니옴이다.
만약 그가 그대로 죽어 버리거나 행방불명이 된다면 세틱스 쪽이 트론보다 연장자이므로 계승권 순위가 약간 더 높다.
하지만 말러가 모습을 드러내어 트론에게 공식적으로 왕세자 자리를 이양한다면, 세틱스가 물을 먹는 셈이었다.
“그래서 세틱스 전하보다 말러 전하의 소재지를 찾는 데에 집중해 달라고 저한테 요청하신 거였군요. 하지만 말러 전하가 그 요청을 수락할까요?”
“수락하게 해야지. 말러 형님은 무척 소심하신 분이다. 세틱스 형님이 변덕스럽고 잔혹한 성미라는 건 그분도 잘 알고 있고, 지금도 전전긍긍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하긴, 계승권이 가장 높은 형제란 보통 눈엣가시니까요. 세틱스 전하가 자신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계속 느낄 수도 있겠군요.”
엘피는 머릿속의 지식을 더듬었다.
실제로 회귀 전에 말러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일찍 죽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헤럴드가 죽은 후 나타난 세틱스가 왕세자가 되었다.
트론은 세틱스가 왕위에 오르기 바로 얼마 전에 주술로 암살당했다.
“……실제로, 제가 이전에 봤던 가능성의 미래에서 말러 전하는 세틱스 전하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자살로 결론이 났지만 주변 정황이 수상했거든요.”
엘피는 회귀 전의 정보를 두 사람에게 전했다.
“응. 말러 형님 본인도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다는 걸 잘 알 거다. 그러니 당신의 목숨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설득을 하는 것이 어떨까 해. 르터바이스 소백작. 그대에게 우선 교섭을 맡기지.”
“네, 알겠습니다. 모처럼 말러 전하가 지내는 교단의 거처가 수도에서 멀지 않다는 것도 알아낸 참이니까요. 기회는 지금이겠네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대만 믿겠다.”
“아이 차암, 그렇게나 왕자님께서 저 없이는 못 살 것처럼 구시니까 부끄럽잖아요.”
“…….”
트론은 대꾸하지 않고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가이가 툴툴대며 항의하는 것도 여느 때와 같았다.
평소와 같은 광경에 안심이 되어야 할 텐데도, 엘피의 불안정한 마음은 여전했다.
이렇게 친근한 풍경조차, 트론이 왕이 된 후에는 접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개 시녀장에 불과한 자신이 트론이나 가이와 함께 중요한 국사를 논할 자격은 없다.
‘……괜찮아. 라이샤인 내 역할은 거기까지였으니까. 왕자님께서, 무사히 왕위에 오르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한걸.’
엘피는 두 손을 모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이가 명령받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가고, 엘피는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도 할 일이 쌓여 있으니 바로 나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며칠 만에 얼굴을 보는 트론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무척 짧아서,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누나…… 무슨 일 있어?”
엘피가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느껴졌는지, 트론이 금세 서류에서 눈을 떼고 걱정되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엘피는 용건도 없이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아, 아무 일 없어.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론.”
“…….”
트론은 서류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엘피에게 다가가 눈을 들여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