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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90화 (90/132)

90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18)

도박장의 밤은 무르익어 마지막 순서인 경매로 이어졌다.

레이스장의 레일은 어느샌가 치워지고, 사회자가 등장했다.

그의 앞에는 출품된 물건을 올려 두는 단상이 놓여 있었다.

레이스장의 객석은 경매장의 형태에 맞춰 의자가 재배열되어 있었다. 신사숙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오늘 올라오는 물품을 기대하는 듯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가이는 솔피시언 공작부인과 함께 귀빈석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에서는 주로 어떤 물품이 거래되나요?”

가이의 질문에, 공작부인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단순한 기호품부터 가치 있는 환금품까지. 각양각색이에요. 세상에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돈을 쓰고 싶어 하는 괴짜가 많으니까요.”

“그렇군요.”

“곧 카탈로그가 배부될 거예요. 제가 억지를 부려 손수건을 출품하는 바람에, 그 내용을 끼워 넣느라 현장 사람들이 고생했겠군요.”

그리고 그런 억지가 통할 만큼 눈앞의 여성이 이 도박장에서 가지는 위치가 어마어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윽고 그녀의 말대로 카탈로그가 두 사람 앞으로 전달되었다. 공작부인의 손수건은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그 외에 올라가는 품목은 보석, 마법 도구, 고문서 등 종류가 천차만별이었다.

공작부인이 카탈로그를 팔락이며 가이에게 권했다.

“모처럼 오신 김에 관심이 가는 물건이 있으면 입찰해 보세요.”

“제 주머니 사정으로는 어려울 것 같지만요. 구경만으로 충분할 듯합니다.”

물론 대귀족의 후계자인 가이라면 웬만한 물품을 낙찰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그가 관심 있는 건 경매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슬슬 말씀해 주셔도 되지 않나요? 숙녀께서는 이 내기에서 이기시면 저에게 어떤 걸 요구하실 겁니까?”

“후후, 보채는 남자는 인기가 없답니다.”

“이런, 인기가 없다는 걸 이렇게 들켜 버렸군요.”

“글쎄요. 하룻밤의 유희나, 당신의 목숨을 요구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녀는 검지로 가면의 윤곽을 어루만지며 입꼬리를 올렸다.

“도박장의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 신사분의 가면을 벗기는 것 또한 여흥일 것 같군요.”

“하하, 너무 리스크가 적은데요. 별 볼 일 없는 백작가의 장남이 얼굴 좀 팔린다고 무슨 큰일이 있겠습니까.”

가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답했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우리 정체를 눈치챘을 가능성이 커 보이는군.’

“어머, 그러신가요? 그래도 즐거울 것 같으니 저는 그걸 요구하겠어요.”

그녀의 생각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솔피시언 공작과 사이가 안 좋다고는 하나, 그래도 그의 부인인 이상 운명공동체다. 사적인 부분에서 충돌이 있을지언정, 공적으로는 협력하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과 트론에 대한 정보가 공작의 귀에 이미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가이즈카 르터바이스가 해야 할 일은 당장 이 도박에서 손을 떼고 트론에게 상황을 알린 후 대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냉정한 계산과 별개로, 가이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여성은 자신과 미학은 다를지언정 동류의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더욱 자극적인 판. 즐거운 과정과 결말.

설령 트론과 가이의 정체를 눈치챘다고 해도, 그녀는 이 내기에서 이기지 않는 한 공작에게 그 정보를 고해바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가이는 자신의 감으로 줄타기를 하며 활짝 웃었다.

“네, 정말로요. 즐거운 내기가 될 것 같습니다.”

트론을 주군으로 선택한 이래, 자신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

딜은 바로 돌아가지 않고 경매를 구경하고 싶다는 엘피의 청에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으나, 말리지 않고 함께해 주었다.

교제 신청을 받고 거절한 마당에 경매를 보겠다는 여성이라니, 정말 이상해 보일 것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트론을 위한 일이라면 임기응변으로 헤쳐 나가야 했다.

“……실은, 이 손수건이 마음에 걸려서요.”

“손수건이요?”

“네. 예전에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과 너무 비슷해서……. 이제는 구할 수 없거든요. 그 물건과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거라면 갖고 싶어서요.”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어이가 없는 핑계였지만, 딜은 더 묻지 않고 알겠다고 해 주었다.

타인의 경매를 보는 시간은 길고 지루했다. 출품된 물품에 대해 조예가 깊었다면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지만, 엘피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거기에 지금 당장 해내야 할 임무가 있다 보니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꽤 시간이 흐른 후, 엘피가 바라던 그 물건이 단상 위에 올라왔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꾹 쥐며 긴장했다.

사회자는 과장된 포즈로 출품된 물건을 설명했다.

“오늘의 마지막 물품입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 고급스러운 손수건을 보십시오. 섬세하게 놓여 있는 자수부터 천까지 빼놓을 데가 없습니다만…….”

그는 손수건에서 입술 자국이 묻은 면을 보여 주었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여성의 입술 자국까지! 정말 흥분되지 않습니까?”

사방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순서가 별 볼 일 없는 손수건이라 흥미를 잃었는지 회장에서 나가는 사람도 여럿 되었다.

역시 일반적으로 경매장에 나올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엘피도 임무가 아니었다면, 타인의 입술 자국이 묻은 손수건 같은 건 가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 그럼. 칩 100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엘피는 얼른 자신이 달고 있던 브로치를 꾹꾹 눌렀다. 브로치는 칩의 계산뿐만 아니라 경매 시에도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브로치를 누른 횟수에 따라 제시 금액보다 얼마를 더 얹어서 입찰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방금 엘피가 조작한 것은 금액의 1할을 얹겠다는 표식이었다.

“자, 칩 110개. 110개 나왔습니다! 이런, 아리따운 여성분께서 입찰하셨군요. 독특한 취향이 있으신걸요?”

엘피의 근처로 스포트라이트 같은 마법의 빛이 비추었다. 다른 사람들의 경매를 보면서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역시 부끄러웠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거나 부끄러워하면 더 튀어 보일 것 같아서, 애써 모르는 척했다.

“칩 110개에서 더 없습니까? ……어이쿠. 더블이 나왔군요.”

이번에는 스포트라이트가 한 청년을 비추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그쪽을 보았다. 특색 없는 양복을 입고 있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었다.

“자, 현재 칩 220개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엘피는 각오하고 자신도 더블을 넣었다. 겨우 저 정도의 손수건에 이렇게 금액이 뛸 거라고는 다들 생각하지 못했던지, 탄성이 흘렀다.

“숙녀분의 고집이 대단하군요. 현재 칩 440개입니다!”

하지만 청년 역시 입찰을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의 공방 끝에 입찰 금액이 칩 1,000개를 넘어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쩌지.’

엘피 역시 최대한 가지고 있던 돈을 끌어모아서 칩으로 바꾸었다.

현재 그녀의 예산은 칩 2,000개가량이었다. 저 정도 고급 손수건을 1,000개쯤은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딜이 친절하게 말했다.

“제가 대신 입찰해 드릴까요?”

“그게…….”

엘피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로 남의 힘을 빌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트론을 위해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자, 현재 칩 1,522개가 되었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망설이다가 1할을 올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빠른 타이밍에 입찰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런! 바로 이 순간, 더블! 더블 나왔습니다! 3,044개!”

입찰한 것은 역시 양복의 청년이었다. 엘피에게 있어서는 절망적인 선고였다.

***

“아가씨가 제법 힘써 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힘들어 보이죠?”

솔피시언 공작부인이 우아하게 부채를 흔들며 가이를 향했다.

“처음부터 승리를 자신하고 계셨나 봅니다. 하긴, 숙녀께서는 도박장을 손아귀에 쥐고 계시니 수하에게 입찰을 지시하는 건 쉬웠겠죠. 처음부터 제가 남자를 택하든, 여자를 택하든 승부는 정해져 있었던 것 아닙니까.”

“어머, 저는 그렇게 촌스러운 짓은 하지 않아요.”

그녀는 키득키득 웃었다.

“오늘 이 회장에 제 남편이 와 있는데요.”

“함께 시간을 보내지는 않으시는군요.”

“서로 무관심한 편이라서요. 하지만 그 사람, 제가 밖에서 거슬리게 구는 것만은 용납을 못 하거든요.”

그녀는 부채로 손수건이 올라가 있는 단상을 가리켰다.

“제가 형편없는 물건을 경매장에 내놨다는 사실이야 그 사람 귀에도 들어갔겠죠. 하지만 소문이 쫙 퍼진 마당에 취소를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이라면 분명히…….”

그녀의 말을 가로막는 것처럼 사회자가 외쳤다.

“자, 현재 칩 1,522개 되었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공작부인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보좌관을 시켜 그 물건을 낙찰하는 방식으로 회수하겠죠.”

“…….”

“참고로, 그이가 데리고 다니는 보좌관은 남성과 여성의 수가 같아요. 그중 누구에게 시킬지는 저도 알 수 없고요. 즉, 처음부터 공평한 내기였답니다.”

가이가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환성이 터졌다.

“……이런! 바로 이 순간, 더블! 더블 나왔습니다! 3,044개!”

입찰자는 솔피시언 공작의 보좌관이라는 청년이었다. 멀리서도 엘피가 고개를 떨구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의 예산이 떨어졌나 보네요. 오늘 이 내기는 저의 승리일 것 같군요.”

승리를 확신하며 공작부인이 가늘게 미소 지었다.

“혹시 저 아가씨가 신사분의 구명줄이었나요? 그렇다면 미안한 짓을 하게 되었네요.”

“글쎄요.”

“아무튼, 가면을 벗는 자리는 따로 마련하는 게 좋겠죠? 뭣하면 지금 이 경매가 끝나는 대로 단상에 올라가는 것도 괜찮겠고요.”

“…….”

가이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객석의 끝으로 보냈다.

공작부인은 무심결에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무언가 검은 인영이 설핏 지나갔다.

바로 그때였다.

“……아니? 세상에! 맥시멈 나왔습니다. 맥시멈! 최초 입찰 금액의 100배! 칩 1만 개!”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탄성이 울렸다. 다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 엄청난 금액을 입찰한 장본인이 누구인지 찾았다.

가이는 무표정했던 얼굴에 생글거리는 웃음을 올리며 공작부인을 돌아보았다.

“역시 승부란 건 마지막까지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사회자가 높게 부르짖었다.

“이런 뜻밖의 결과도 나오는군요! 제한 금액을 먼저 달성하여 낙찰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춘 곳에는, 마치 사신처럼 흑요석으로 장식한 새카만 드레스를 입고 있는 키 큰 여성이 서 있었다.

모자 옆으로 살짝 드러난 머리칼 역시, 검은색이었다.

“제 말 맞죠?”

가이는 공작부인을 향해 윙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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