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17)
“반갑습니다, 아리따운 숙녀분. 저를 찾으셨다고요?”
“후후, 반가워요. 첫날 뵈었던 멋진 검은 머리 청년의 형 되시죠?”
“이런, 동생이 제 인적사항을 팔았군요.”
가이는 넉살 좋게 반응하며 솔피시언 공작부인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그 후에도 몇 번 도박장에서 뵈었는데, 그 신사분은 도통 찾아와 주지를 않네요. 마치 상사병에 걸린 듯 가슴이 아프답니다.”
“이런, 그 녀석 보통내기가 아닌데요.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다니.”
“당신께서 새로운 사랑으로 채워 주셔도 된답니다.”
“하하, 제 약혼녀가 무서운 사람이라서요. 말씀만은 감사합니다.”
가이는 그녀의 진심이 담기지 않은 청을 적당히 거짓말로 넘기며 생글생글 웃었다.
“형제가 참 안 닮았네요.”
“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느껴지시나요?”
“생긴 것보다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요. 당신의 동생은 무척 진지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 것치고 저를 향한 에스코트는 완벽했지만 말이죠.”
가이는 트론이 공작부인을 상대하면서 본 성격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구나 짐작했다.
애초에 트론 같은 모범생 타입이 이런 들뜬 공간에서 주변 페이스에 완벽히 맞추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저를 부르신 건 제 동생을 다시 보고 싶으셔서 그런 걸까요?”
“호호, 그것도 좋겠지만……. 저는 그렇게 멋없는 만남은 추구하지 않아서요. 무엇보다 제가 매달리는 것 같아서 볼품없잖아요.”
“제 동생이 먼저 부인을 찾아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주변머리가 부족한 녀석이라 죄송합니다.”
그녀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두 분께서는 곧 이곳을 떠나신다지요.”
“네, 그렇습니다. 여름 휴가차 잠시 온 거라서요.”
“……그때까지, 방문하실 수 있으신가요? ‘특별 도박장’에.”
“…….”
가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여느 때처럼 방긋 웃었다.
“아까 저쪽 친구들한테도 들었지만, 어림도 없을 것 같더군요. 막대한 돈을 1년 동안 내야 한다면서요. 저나 동생 같은 뜨내기한테는 어려운 일이죠.”
“어머, 아쉬워라.”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도박을 정말 좋아한답니다. 낮은 확률의 이윤을 얻기 위해 대량의 리스크를 지는 이 정신 나간 행위가 사랑스러워요. 쾌락의 극치죠.”
“그렇군요. 저는 도박에는 흥미가 없지만, 인생에 있어 즐거움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사분도 도박의 매력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가방에서 하얀색의 실크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손수건에 입술을 대어 루즈 자국을 남겼다.
“저와, 내기를 하나 하시겠어요?”
“호오. 어떤 것일까요?”
“룰은 간단해요. 오늘 도박장에서는 레이스 이후 경매가 있을 예정이죠. 저는 거기에 이 손수건을 출품할 겁니다.”
그녀는 입술 자국이 묻은 쪽을 위로 하여 손수건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 손수건을 낙찰해 가는 것이 여성일지, 남성일지. 그걸 두고 내기하도록 하죠. 성별은 당신이 먼저 지정하셔도 괜찮아요. 물론, 저희 둘은 경매에 참가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요.”
“……재미있네요. 지금 이 도박장의 성별비는 남성이 훨씬 높고, 여성이 입술 자국이 묻은 손수건을 탐낼 리는 없는데 말입니다. 블러핑입니까?”
“후후. 글쎄요?”
공작부인은 즐거운 듯 부채로 팔랑팔랑 바람을 만들어 낼 따름이었다.
가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턱을 괴었다.
“그럼, 먼저 고를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히 받아서. 여성분이 이 손수건을 낙찰해 가는 것에 걸지요.”
“어머나.”
공작부인도 만면에 미소를 만들어 내며 그와 마주 보았다.
“여성 쪽에 걸었을 때 불리한 점을 본인이 말씀하시고는, 여성에 거시는 건가요?”
“이왕 하는 도박이라면, 무모한 패에 거는 것이 묘미 아니겠습니까.”
“후후. 저는 아직 내기에 뭘 걸지도 정하지 않았는데, 정말 화끈하신 분이네요.”
“이런 내기라면 서로가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게 정석이겠죠?”
가이가 윙크하며 응수하자, 그녀의 미소가 진해졌다.
“제가 당신의 목숨이라도 바라면 어쩌시려고요? 지금이라면 무르셔도 된답니다.”
“하하. 피를 보고 싶으시다니, 그건 그거대로 즐거운 도박이 될 것 같군요.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셔도 내기를 무를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가이는 느긋한 말투로 여상하게, 그 말을 입에 담았다.
“특별 도박장으로 들어갈 열쇠를 부탁하고 싶으니까요.”
***
엘피는 도박장 특유의 폐쇄된 공기 때문에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것을 느꼈다.
딜은 엘피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을 금방 눈치챘는지, 그녀를 테라스로 데려갔다.
마법으로 온도가 조절되고 있는 실내를 빠져나오자 밤공기가 오히려 조금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엘피는 딜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마음 쓰게 해 드려서.”
“아닙니다. 오히려 영애에게는 그다지 즐겁지 않은 나들이가 된 것 같아서 제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엘피는 그의 말에,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도박장의 시설들에 관심이 없는 티를 냈나 반성했다.
몇몇 보드 게임을 플레이하고 방금 오리 레이스까지 끝냈지만, 낮은 확률로 돈을 얻기 위해 안달을 내는 행위 자체에 큰 재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서 그랬어요. 평소에 올 일이 없어서 신기하기도 했고요.”
“영애께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와 다르게 내면은 무척 단아한 것 같습니다.”
“그, 그냥 촌뜨기인 것뿐입니다.”
사실 화려한 외견 자체도 평소 모습과 다르게 연출한 것뿐, 그녀의 본질과는 달랐다.
엘피는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평가가 후한 눈앞의 귀공자가 거북했다.
“……쿠일로스 영애.”
“네.”
“저와 루베인은 조만간 치롤헷을 떠날 겁니다. 그 이후에 어떻게 하실지는 정하셨나요?”
“…….”
응당한 질문이었다. 엘피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답변을 말했다.
“당분간 지낼 돈은 있으니까……. 다른 도시로 떠나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조금 무모하신 것 같군요.”
“무모하니까 다짜고짜 루베인을 찾아온 거겠죠?”
엘피가 웃으면서 응수했다. 딜은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영애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함께 지낸 건 짧은 시간이지만, 매 순간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소공작님께서는 항상 저를 너무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아니요.”
그는 단호하게 답하며 엘피의 손을 잡았다.
“……정략결혼으로 영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과 맺어지는 건 저도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벗어나시려는 마음, 이해합니다.”
“소공작님처럼 중책을 짊어지신 분이 보시기에는 무모하고 철없는 행동이겠지만요.”
“……저도, 조금 무모해져도 될까요?”
“네……?”
평소보다 노랗게 보이는 달이 테라스를 비추고 있었다. 실내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소리가 파도 소리와 섞여 들려왔다.
휴양지 특유의 들뜬 분위기를 등 뒤에 두고, 딜이 입을 열었다.
“쿠일로스 영애. 저는 당신에게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를 청하고 싶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엘피는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벌렸다. 그녀의 반응을 보고 딜이 조금 쑥스러운 듯 말했다.
“어느 정도 짐작하실 줄 알았는데, 전혀 생각도 안 하신 모양이군요.”
“그야, 그게…….”
엘피는 지금까지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런 식의 감정을 받는 대상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딜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어도 그저 농담이나 착각이겠거니 여겼다.
이성간의 교제, 연애, 데이트 같은 것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린 경험이 있긴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느꼈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장담하기 어렵긴 합니다. 그렇지만, 하븐으로 돌아가는 대로 각하께 제 마음을 밝힐 겁니다. 제가 정식으로 교제 및 약혼을 요청한다면, 쿠일로스 후작가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지 않을까요?”
이 나라에 딜보다 신분이 높은 남편감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만약 쿠일로스 후작가의 정략결혼 건이 진짜였다면, 집안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짜 쿠일로스 영애인 엘피로서는 전혀 기쁜 요청이 아니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어서.”
“저도 자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애와 함께 지낼 수 있는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만 조바심이 났습니다.”
“…….”
어차피 받아들일 수 있는 요청도 아니었고, 딜에게 그런 마음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소공작님의 청은 분수에 넘칠 정도입니다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많이 부족한가요.”
“천만의 말씀을요! 소공작님은 정말 멋진 분이세요. 다만, 저는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괜찮은 사람이 아니에요.”
애초에 자신은 엘레나 쿠일로스 후작 영애라는 거짓 신분을 댄 사람이다. 딜과 자신 사이에 제대로 된 관계는 구축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엘피 이나드라는 것을 모르고, 트론의 측근으로서 목적을 위해 접근한 것도 모르고 있다.
“분명히 소공작님은 제 본모습에 실망하실 거예요. 과분한 말씀 거두어 주세요.”
“저는 영애의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엘피는 딜이 붙잡고 있는 손을 떼어 내며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테라스에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딜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은…… 천천히 생각해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도 가벼운 마음으로 넣은 청은 아닙니다, 영애.”
“……소공작님.”
“바로 또 거절하지는 마세요. 저도 사람이라, 조금 가슴이 아프답니다. 그럼…… 잠시 바닷바람을 쐬고 계세요. 저는 마실 것 좀 가지고 오겠습니다.”
서로 분위기가 어색한 상황이라 배려해 준 모양이었다. 딜은 눈인사를 한 후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하아…….”
엘피의 머리는 복잡했다. 뜻하지 않은 기습 공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딜에게 실례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한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공중에 연분홍빛 비둘기가 나타났다.
[아, 드디어 연결됐네요. 엘피 님! 지금 혼자 계시죠?]
“……어라, 가이 님?”
[솔피시언 공작 쪽으로는 특별 도박장 관련해서 정보가 있었나요?]
“그게, 전혀요. 역시 소공작님에게는 그렇게 깊은 정보까지 오픈하지 않는 것 같아요.”
[예상대로군요. 알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엘피 님, 잠시 후 시작되는 경매에 참가해서 여성의 입술 자국이 남아 있는 손수건을 낙찰받아 주세요.]
엘피는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가이가 이유 없이 이런 말을 할 리는 없었다.
“저희 일에 필요해서 그러신 거죠?”
[네. 특별 경매장으로 갈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꼭 낙찰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후 사정은 차후에 설명 드릴게요. 그럼 나중에 뵙죠.]
“네.”
아일란이 다시 공중으로 녹아 들어갔다.
그렇잖아도 별 정보를 얻어 내지 못해 실망하던 차였는데, 역할이 생긴 것 같아 다행이었다. 조금이나마 트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했다.
엘피는 난간을 붙잡고 바깥 야경을 살폈다. 트론에 대해서 떠올리고 나니, 방금 딜과 나눈 이야기를 되씹게 되었다.
‘……내, 본모습.’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딜을 상대로 위장 신분을 썼던 것처럼, 자신은 트론을 상대로도 거짓을 쌓아오고 있었다.
후에는 진실이 되었을지언정, 라이샤라는 거짓말로 그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회귀에 대한 것도, 이 세계가 그녀가 알고 있는 소설 속 세계라는 것도 밝히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교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트론이 자신을 소중히 생각해 준다고 해도, 이런 거짓이 어디까지 용납될까.
엘피는 덜컥 겁이 났다.
모든 것을 알게 된 트론이 자신을 경멸하는 날이 온다면, 지옥에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미움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전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