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16)
대야에 떠 놓은 물에 저녁 하늘이 비췄다.
트론은 그 앞에서 무표정하게 턱을 괸 채 물에 비친 초승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수면이 미세하게 떨리며 전혀 다른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미녀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주군.]
“응. 오랜만이군, 할리케.”
트론은 무뚝뚝하게 답한 후 일 이야기로 들어갔다. 그간 자잘하게 맡겼던 조사에 대한 결과 보고 같은 것이었다.
보통은 사먼을 통해 처리하는 일들이지만 그는 현재 르터바이스 협곡에서 있었던 사고로 요양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수 토벌 때 일을 벌인 주술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아내지 못했나?”
[네. 왕자님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웬만한 주술사 세 명 정도가 수명을 전부 바칠 정도의 생명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주술이었습니다. 역시 주술사 몇 명을 산 제물 삼은 것 아닐까요?]
트론도 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긴 했지만, 석연치가 않았다.
확실하게 트론의 목숨을 끝장낼 만한 방법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어정쩡하게 위협하기 위해 낭비하기에는 주술사 세 명은 아까운 인력이었다.
“너무 비효율적이야. ……나는, 그만큼의 주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데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거야말로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나 가능한 일일 텐데요.]
“그래서 그대에게 조사를 의뢰한 것 아닌가.”
[유감스럽습니다만, 저희 연합은 물론이고 저희와 닿아 있는 인맥을 통해서도 그런 주술사에 대해서는 들어 본 바가 없어요.]
“…….”
[하하. 주군께서 너무 과민하신 것 아닐까요? 그 사건의 배후에 세틱스 전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면서요. 그 사람은 비효율적이더라도 주군만 괴롭힐 수 있다면 만족하는 성격 아니었나요?]
“그렇다고 해도 헤럴드 숙부처럼 아예 생각이 없는 타입은 아니다. 혹시, 솔피시언 가문에 고용된 주술사 쪽과는 인맥이 없나?”
[그 부분도 혹시나 해서 조사는 했는데요. 솔피시언 공작이 종속 주술사를 고용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습니다.]
보통 귀족이 주술사를 고용하는 형태는 두 가지다. 외부의 주술사를 초빙하여 고용하거나 혹은 특정한 가문의 주술사를 가신 삼아 대대로 고용하는 것.
종속 주술사라는 것은 이 중 후자를 가리켰다.
그들은 존재 자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고, 다른 주술사들과도 일절 교류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보안을 중시하는 가문일수록 종속 주술사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로서는 파헤치기 어렵다는 거로군.”
[네. 그쪽에 주군 말씀처럼 그런 천재가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주군도 아시다시피, 종속 주술사는 수준이 높기 어려운 법입니다.]
주술도 일종의 학문 같은 것이었다. 폐쇄적인 집단에서 다른 이와 활발한 지식 교류 없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술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저는 그래서 평범한 종속 주술사 몇 명을 소모해서 그 주술을 발동한 것이리라 추측하고 있어요. 천재 주술사가 있었다면 이전부터 솔피시언 공의 움직임에 뭔가 특별한 낌새가 있었겠지만, 저희가 수집한 정보 범위에서는 전무했고요.]
“……그래. 일단은 알겠다. 하지만 이후로도 솔피시언 쪽의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해.”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트론은 용건을 마치고 연락을 끊으려 했다. 그런데 할리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주군. 요즘 세간에 주군을 칭송하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
[다들 트론 왕자님이 보위에 오르면 슬기로운 왕이 될 것 같대요. 아하하. 성군 놀이 하시니 재미있으신가요?]
“비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아니에요. 헤럴드를 누르고 왕이 되기 위해서는 여론도 중요하죠. 저는 그저…….]
할리케가 가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주군께서 무언가 착각하고 계시지는 않나 걱정될 따름이에요.]
트론은 팔짱을 끼며 냉랭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대가 그따위 건방진 소리를 하지 않아도 내 할 일은 해. 주군에 대한 시건방짐이 이제 봐주기 어려운 수준이군.”
[주군께서 성군 놀이에 심취하신 게 아니면 됐어요. 아하하,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저희의 숙원이 이루어질 날이.]
“…….”
[그럼 편안한 밤 보내시길. 일 이야기가 아니어도 자주 소식 주세요. 이모는 쓸쓸하답니다.]
트론은 대답 없이 연락을 끊었다. 대야에는 다시 밤하늘에 노란빛으로 어른거리는 달이 담겼다. 그는 물끄러미 수면을 바라보다가 대야의 물을 개수대에 버렸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잊지 않고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도 알고 있다.
자신을 키우고 도와준 만큼, 웰칸 연합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뿐이다.
언젠가 엘피가 입에 담았던 허황된 예언이 문득 트론의 머리를 스쳤다.
“그 끝에 다다르면 당신이 불행하고 비정한 왕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성군이 되리라 믿습니다.”
트론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할리케의 말대로, 성군 놀이에 너무 오래 심취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
엘피는 와인빛 드레스에 어울리는 검은색의 우아한 가면을 썼다.
파트너인 딜은 그녀와 반대로 의상은 검은색으로 두고 포인트 컬러와 가면의 색상을 붉은색으로 맞추었다.
두 사람은 복도를 지나 홀을 거쳐 귀빈실로 안내받았다. 그곳에 들어가니, 가면을 쓴 보랏빛 머리의 청년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렌포우 솔피시언.’
가면을 쓰고 있다고는 하나 그와 대면하는 것은 긴장되었다. 엘피는 딜의 팔짱을 끼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솔피시언 공작이 팔을 벌리며 인사했다.
“이곳까지 발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만에 다시 뵙는군요.”
“저야말로 멋진 곳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이곳에서는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 거였죠?”
딜의 질문에 솔피시언 공작이 우아하게 웃었다.
“후후, 그렇습니다. 익명의 신사분.”
“네, 잘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쪽의 청초한 꽃은 신사분의 보배인가요?”
엘피를 가리켜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그런 류의 은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약혼녀 같은 것으로 오해를 받았나 보다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아닙니다. 제 동생의 친구로, 저희 가문에 머무는 손님입니다.”
딜이 어딘지 단호하게 답했다. 엘피는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솔피시언 공작에게 인사했다.
“이런 곳이어서 이름을 대지 못하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실례되는 말씀 죄송했습니다.”
“……?”
“하하, 순진한 영애군요. 제가 정말 실언했습니다.”
솔피시언 공작이 입에 담은 ‘보배’라는 말은 혼외 관계의 정부나 연인을 가리키는 속어였다.
즉, 딜에게 혼인 예정이 없는 애인을 데려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넓고 멋진 공간이군요. 저희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데 어디부터 둘러보면 될까요?”
딜이 유쾌하지 않은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이 공작에게 물었다.
“아아, 입구에 들어오실 때 브로치를 받으셨지요? 원하시는 만큼 금전을 칩으로 바꿔서 시설들을 이용하시면 자동으로 환산됩니다. 레이스가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구경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 후에 경매도 있으니, 참가하셔도 좋겠고요.”
딜은 그와 몇 마디 환담을 나눈 후 엘피를 데리고 귀빈실에서 나왔다. 그는 엘피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쿠일로스 영애. 저 때문에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해서.”
“솔피시언 공께서 하신 말씀이 실례되는 소리였나요……? 죄송해요, 그런 은어를 잘 몰라서.”
“……네, 당신을 저의 정부로 오해한 것 같군요.”
“아…….”
엘피는 티 내지 않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왕궁에서는 트론의 정부로 오해받고, 이곳에 와서는 딜의 정부로 오해받고. 애초에 이성을 옆에 데리고 다닌다고 정부인지부터 의심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소공작님이 잘못하신 것도 아닌걸요. 괜찮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영애의 기분을 풀어드릴 만큼 제가 재치 있는 사람이면 좋을 텐데,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정말 신경 쓰실 것 없으세요. 그것보다, 모처럼 이런 곳까지 왔으니 편히 즐기세요. 함께하겠습니다.”
“……영애는 정말 배려심이 깊으시군요. 루베인이 영애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진심입니다. 어디 보자……. 저쪽에 핀볼로 하는 게임이 있는 것 같군요. 가 볼까요?”
“네.”
엘피는 대답하고 그를 따라가면서도, 머릿속으로 오늘의 임무를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 도박장으로 들어가는 암구호에 대한 것이었다.
‘……과연 솔피시언 공이 특별 도박장에 대한 일까지 소공작한테 오픈할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든 트론에게 도움이 될 일을 해내고 싶었다.
***
그런 엘피를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겸사겸사이긴 하지만, 전하께서도 사람을 참 철저히 부려 먹으신다니까.’
긴 은발을 묶어 올려 모자 안으로 감춘 가면의 청년, 가이도 도박장 안으로 잠복해 있었다.
트론은 엘피에게 암구호 건을 말해 두긴 했으나, 솔피시언 공이 순순히 특별 도박장에 대한 일을 딜에게 말할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독자적으로 가이와 함께 특별 도박장으로 진입하는 방법을 조사하고 있었다.
오늘 가이는 그 조사와 더불어 엘피에게 무슨 일이 없는지 확인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간 도박장에 여러 번 들락거리며 친해진 청년들과 위화감 없이 섞이며 그는 여러 정보를 끌어냈다.
“특별 도박장, 솔직히 나도 가고 싶긴 한데. 그거 절차가 장난 아니야.”
“맞아. 도박장에 막대한 기부금을 1년 동안 달마다 빠짐없이 내야 하고, 그러고도 VIP에게 소개를 받은 후에만 들어갈 수 있다던데. 돈이 해결되어도 솔직히 그런 VIP랑 알고 지내는 게 쉽냐고.”
“어설픈 가문은 근접도 못 하겠군요. 휴가 동안 한 번 가 보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가이가 한숨을 내쉬며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자 청년 귀족들이 낄낄거리며 술잔을 내밀었다.
“우리는 미천한 인간들답게 여기에서나 놀자고. 오늘은 마법 슬롯을 해 볼까?”
“그거 좋네.”
그렇게 청년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와중, 온몸을 푸른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여성이 가장 안쪽의 테이블에 자리했다. 솔피시언 공작부인이었다.
‘……오늘 마그달리사 소공작 때문에 솔피시언 공도 도박장에 오지 않았나? 사이가 안 좋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나타나다니 의외로군.’
가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청년들을 따라가려니, 급사가 다가와서 소곤거렸다.
“저쪽의 숙녀분께서 잠시 시간을 내주시길 바란다고 합니다.”
“……흐음, 네.”
다름 아닌 솔피시언 공작부인이 자신을 지명한 것이었다. 그녀가 굳이 자신을 부를 이유로는 트론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있다 해도,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첫날 트론의 일행이었던 자신의 외견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가이는 급사의 안내에 따라 조심스럽게 솔피시언 공작부인이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