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10)
“그건 그렇고, 전하랑 이야기하다가 중간에 뚝 끊겼잖아. 다시 연락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 그러게. 응.”
엘피는 다시 아일란을 불렀다. 소소한 즐거움이 사라져서 의기소침해진 것과 별개로, 할일은 제대로 해내야 했다.
마그달리사 별저에서 지내며 새로운 정보를 캐낼 수 있을지 모르고, 루베인이 움직여야 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전화위복이라 여기기로 했다.
***
“…….”
엘피와 연락을 끝낸 트론은 척 보기에도 저기압이었다. 표정의 변화 폭이 크지 않아서 항상 무뚝뚝해 보이긴 하지만,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이 옆에서 바로 느껴질 정도였다.
“……으음. 전하. 별채에서 혼자 지내기 외로우시면 제가 처소를 옮길까요?”
“아무도 들이지 마라.”
보통 가이가 이렇게 살짝 찔러 보면 ‘시끄럽다’ 정도로 가볍게 응수할 텐데, 싸늘한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정말로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뭐, 좋게 생각하시죠. 루베인 님 혼자 있는 것보다는 엘피 님이 같이 계시는 게 주변 움직임을 살피기도 좋으니까요. 아일란이 있기도 하고. 딱히 위험할 상황은 아니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
“아무튼, 엘피 님의 잠복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저희도 움직여야죠. 내일 저녁에 바로 지하 도박장으로 이동하실 거죠?”
“응. 오후 6시쯤 출발하도록 하지.”
표면적인 지하 도박장에 대한 조사는 진행되었으나, ‘정말로 큰 건’에 대해서는 표면 조사로는 더 파고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가이와 트론은 직접 지하 도박장에 참가하여 특수한 VIP만을 대상으로 하는 더 은밀한 꼬리를 잡을 예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엘피 님이 안 계셔서 왕자님 시중 들 사람이 없을 텐데, 시종이라도 보낼까요?”
“아니. 혼자 알아서 하겠다.”
“……으음. 필요하시면 사양 말고 부르세요. 정 안 되면 저라도 포털로 바로 달려올 테니까.”
“가서 일이나 해.”
말을 더 보태 봤자 역효과라고 판단한 가이는, 예를 갖춰 인사한 후 별채에서 나갔다.
트론은 지끈지끈 아파 오는 머리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엘피가 곁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지병인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치롤헷의 별채에서 엘피와 단 둘이 보내던 시간에 너무 길들여진 모양이었다. 그녀의 해맑은 미소로 시작하던 아침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기분에 우울해졌다.
‘딜 마그달리사…….’
거기에 엘피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받아 저택에 머물게 해 주었다는 마그달리사 가문의 귀공자가 묘하게 거슬렸다.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여러 감정들을 억지로 추스르며, 트론은 집무실로 향했다.
***
엘피의 신체 사이즈를 잰 하녀들은 금세 드레스와 속옷 등을 공수해 와 주었다. 기성품이긴 하지만, 전부 고급 제품이었다.
기묘한 죄책감을 느끼며 여기저기 떠밀려 다니다 보니 어느샌가 마그달리사 별저의 널찍한 서관에 엘피가 쓸 거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딜은 솔피시언 영지 내의 귀족들과 회합이 있는 모양이라, 석찬은 루베인과 오붓하게 먹게 되었다. 그러고는 실없는 수다를 조금 떨다가,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어느샌가 오후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온 귀족 영애로서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일과였으나, 엘피의 마음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왕자님.’
부드러운 이불에 몸을 묻으면서도 떠오르는 건 트론에 대한 것뿐이었다. 저녁은 잘 챙겨 드셨을까, 옷시중은 다른 사람이 들고 있을까, 또 일하느라 밤이라도 새시는 건 아닐까.
심란한 마음에 뒤척이던 엘피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아일란을 불렀다.
아일란은 파닥거리며 침대에 누워 있는 엘피의 머리맡에 앉았다. 날개깃을 쓰다듬자 불만스러운 듯 몸을 털었다.
아일란은 아나이테와 달리 만지는 걸 싫어하는 까탈스러운 성미였다.
“전하 보고 싶다…….”
얼굴을 못 본 시간이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도 않는데,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겨우 반나절도 이런데, 루베인이 저택을 빠져나가는 디데이까지 며칠간 얼굴을 못 보다니.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마음에 아일란을 불렀으나, 트론에게 용건도 없이 말을 걸어도 괜찮은 건가 걱정이 되었다.
어쩌면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든 트론의 수면을 방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베개에 얼굴을 묻으려니, 아일란이 엘피의 뒤통수를 부리로 콕콕 찍었다.
“……미안, 아일란. 들어가도 돼.”
엘피가 얼굴을 들며 말하자, 아일란이 구르륵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야기하고 싶은 거 맞으면서 왜 안 하냐고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왕자님한테 폐 아닐까?”
회귀한 이래 줄곧 트론을 위해 살아왔다. 그에게 무엇이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트론이 자신을 단순한 신하 이상으로, 회귀 전처럼 가족으로 여겨 주었다.
무척 기뻤지만,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가 폐가 된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허락되는 거리일까. 두 사람의 사이에 그어져 있는 선은 무척 애매하고도 불분명했다.
가장 중요한 건 트론의 마음이었다. 그를 존중하고 싶었고, 그가 원하는 걸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도 자꾸 욕심이 새어 나왔다. 트론에게 있어서 자신이 더 특별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자기 전에 안부 정도는…… 물어도 되지 않을까?”
아일란에게 묻는다기보다는 자기 확인 같은 질문이었다.
엘피는 비둘기의 목을 쓰다듬었다. 아일란이 드물게 반항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그 반응이 마치 긍정적인 징조인 것처럼 느껴져서, 엘피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일란, 아나이테를 불러줄래?”
조심스럽게 입을 떼자 아일란이 활발하게 파닥거리며 엘피의 어깨에 앉았다.
[……엘피? 무슨 일 있어?]
잠깐의 간격도 없이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저, 전하.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죄송해요…….”
[죄송할 것 없어. 아니면 뭔가 다른 용건 있어, 누나?]
엘피에게 별일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심한 것인지 트론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엘피는 그 말을 들으니 귀중한 비상 연락망을 사적으로 썼다는 자각이 들어서 부끄러웠다.
“……용건도, 없어.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되어서 내가 사라지는 바람에, 론이 불편하게 지내지 않나 걱정되었거든. 미, 미안. 바로 끊을게.”
[아냐. 끊지 마.]
“용건도 없는데, 방해된 건 아니야?”
[안 그래. 누나 목소리 듣고 싶었어.]
“나, 나도.”
그의 다정한 반응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엘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떼었다.
“저녁은 잘 먹었어? 또 조금만 먹은 거 아니지?”
[…….]
“안 먹었구나!”
그녀가 마그달리사 별저에서 머무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트론이 저기압이 되었다거나, 저녁은 필요 없으니 별채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차갑게 선언했다거나 하는 뒷사정이 있었으나, 엘피로서는 알 수 없는 정보였다.
트론이 단식하게 된 원인이 자신이라는 걸 까맣게 모르는 엘피는 몇 마디 잔소리를 이었다.
그렇게 옆에 있는 양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샌가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아, 오래 붙잡아서 미안해. 잘 시간인데.”
[아냐. 누나는 안 피곤해?]
“나야 뭐……. 루베인이랑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는 노는 것밖에 안 할 거 같은걸. 오늘도 하루 종일 놀기만 했어. 론을 보좌해야 되는데, 일을 내팽개친 것 같아서 미안해.”
[누나 잘못 아니잖아.]
“그래도 내 마음이 안 좋아서. 생각해 보면 말이야, 우리 처음에 왕궁에서 도망친 이후로 이렇게 긴 시간 멀리 떨어지게 되는 거 처음이잖아.”
[……응.]
“호, 혹시 내가 없는 게 홀가분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누나야말로.]
엘피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두 손을 휘저으며 극렬하게 부정했다.
“전혀 안 그래! 쓸쓸하고……. 론이 보고 싶어.”
[…….]
조용히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가, 이윽고 온화한 답변이 돌아왔다.
[고마워. 나도 그래. ……너무 늦었네. 잘 자, 누나.]
“으, 응! 늦게까지 붙잡아서 미안해. 론도 잘 자.”
인사를 마무리하고 연락이 끊기자 아일란이 공중으로 날아가며 녹아들듯 사라졌다.
“……쓸데없는 거로 연락했다고 혼내셔도 되는데, 역시 왕자님은 너무 다정해서 탈이야.”
그래도 트론과 따로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왕이면 얼굴을 마주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엘피는 방의 불을 끄고 다시 이불을 푹 덮으며 눈을 감았다. 한시라도 빨리 제 할 일을 마치고 트론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완연한 여름 날씨인 치롤헷은 저녁에도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치롤헷의 서쪽 구석에 있는 향락가는 각종 마법 등불이 번뜩여 번잡한 분위기였다. 그런 향락가의 가게들 중, 입간판이 없이 어딘지 홀로 고상해 보이는 대리석의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 앞으로 장식 없는 검은 마차가 도착했다.
키가 헌칠한 청년 두 명이 마차에서 내렸다. 두 명은 모두 얼굴을 가면으로 덮고 있었으나, 입구를 지키던 안내원은 별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이십니까?”
은발의 청년이 금전을 여러 개 내밀었다. 그 금전은 입장료를 훨씬 웃도는 금액이었다.
안내원이 거스름돈을 찾으려 하자, 청년은 손을 저으며 팁으로 가지라고 했다. 안내원은 반색하며 두 사람에게 은색의 갈매기 모양을 본뜬 브로치를 내밀었다.
“오늘의 레이스는 오후 7시 30분부터입니다. 그때까지 관내 시설은 자유롭게 이용하십시오.”
“고맙네.”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꾸민 복도를 지나 들어간 홀은 파티 회장이었다.
두 청년 외에도 가면을 쓴 귀족으로 보이는 남녀들이 테이블의 음식을 맛보거나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잔잔히 깔리는 음악은 어딘지 느슨했고, 카우치에 앉아 있는 남녀의 모습은 어딘지 문란한 느낌을 주었다.
“별로 유쾌한 분위기는 아니군.”
“솔피시언 영지에서 불륜의 공간으로도 유명한 모양이니까요. 저 사람들한테는 여가인 거죠.”
흑발의 청년, 트론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가이는 남의 일인 양 에헤헤 웃으며 지적했다.
“우리 론이 결벽한 성격인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그렇게 붕 뜨게 굴면 눈에 띌 거라고요?”
“…….”
이런 곳에서 왕자니 전하니 공식적인 호칭을 부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만, 가이의 입으로 그 이름을 듣는 것이 무척이나 거북했다.
그런 트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이가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저희는 오늘 호기심에 향락의 도박장에 처음 발을 들인 백작가의 형제인 거잖아요. 자, 어서 저를 형이라고 불러보세요.”
“반항기라 맞먹으려 드는 설정이라고 치지.”
“……진짜 너무하셔!”
드디어 트론에게 ‘형’ 소리를 듣나 기대했던 가이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