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9)
엘피는 혹시 그녀가 무언가 알고 있을까 싶어 루베인 쪽을 돌아보았다.
루베인은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어, 글쎄요. 일단 저한테 장치를 한 사람은 저희 가문 직속 마법사가 맞긴 한데요.”
[올페마에서 방어벽을 구축한 것도 그 사람입니까?]
“전 실무 쪽은 잘 모르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으음, 그러고 보니 그때 언뜻 외부에서 온 마법사가 있다고 듣긴 했어요.”
[외부라고 하면?]
“솔피시언 공이 아끼는 소년이 올페마에 있는 동안 저희 각하께서 잠시 맡아 두었다던가. 저도 직접 얼굴을 본 건 아니지만요. 공작이 아낄 정도로 우수한 인재인가 보다, 그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확증은 없지만, 십중팔구 정답일 것 같군요. 그 의문은 솔피시언 본저 쪽을 조사해 보면 답이 나오겠지요. 고맙습니다, 루베인 님.]
“아뇨, 저야말로 마법 장치를 해제해 주셔서 감사해요. 스스로는 달라진 걸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은 산뜻하네요! 왕자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네, 물론이죠. 어차피 지금 옆에 계시지만요.]
“어, 그랬군요? 감사해요, 전하.”
[……아니. 한 달만이군, 마그달리사 영애.]
“그러게요. 하여간 전하께서도 약은 척은 다 하면서 물러 빠지셨어요. 사이가 틀어진 가문의 여식 따위 무시하시면 그만인데.”
그 말에는 뼈가 있었지만, 루베인의 말투 자체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엘피는 루베인이 무척 기뻐하고 감동한 것이리라 짐작했다.
[그대를 통해서 두 가문의 사이를 갈라놓는 계기를 만들려고 한 것뿐이다. 착각하지 말도록.]
“예이, 예이. 그래서 저는 구체적으로 무얼 하면 되나요?”
[우선은…….]
트론이 이어서 설명을 하려는 순간, 아일란이 날갯짓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엘피는 깜짝 놀라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루베인. 영애랑 이야기 잘 나누고 있니? 간식을 가져왔는데 잠깐 들어가도 될까.”
루베인이 엘피를 향해 어찌할지를 묻는 듯 눈짓을 했다. 엘피가 천천히 끄덕이자, 그녀는 바로 대답했다.
“들어와도 돼, 오라버니.”
딜이 왜건을 끄는 시종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왜건 위에는 5단으로 된 트레이에 각종 디저트가 옹기종기 장식되어 있었다.
티팟에는 무척 질 좋은 홍차가 담겨 있는지, 은은한 향이 멀리 전해질 정도였다.
“손님이 오셨는데 변변한 대접도 못 해 드려서야 쓰나 싶어서. 루베인 너도 좀 듬뿍 먹고.”
아무래도 부친에게 반항하느라 입이 짧아진 동생을 걱정하는 의미도 담겨 있는 모양이었다.
“고마워. 그런데 오라버니는 바쁜 거 아니야? 그냥 티세트만 보내면 될걸, 뭣 하러 왔어.”
“섭섭하네. 어렸을 때는 뭐만 하면 오빠만 찾던 녀석이.”
“그건 어릴 때 일이지! 나이 먹어서 어떻게 오라버니한테 붙어 다녀, 징그럽게.”
“징그럽다니, 욘석이.”
훈훈하게 티파티를 즐길 상황은 아니었지만, 엘피는 두 남매의 모습을 보며 조금 흐뭇함을 느꼈다.
부친과는 이런저런 갈등이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오빠하고는 무척 사이가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역시, 일반적인 남매는 나이를 먹으면 거리가 멀어지나 보네.’
자신과 트론이 친남매였다면 어느 순간 멀리 떨어졌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차라리 친남매가 아닌 게 다행인 것 같았다. 시녀라는 자리에 있을 수 있는 한, 언제까지고 그의 뒤치다꺼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엘피는 시종이 따라 주는 홍차를 입에 대며 그런 감상에 빠졌다.
“어머, 무척 향이 좋네요.”
무심결에 솔직한 감상을 뱉자, 딜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솔피시언은 차 생산지로도 유명하죠. 이곳에 온 김에 현지의 차로 요청해 보았답니다.”
티파티다운 느긋하고도 알맹이 없는 대화가 몇 마디 흘러갔다. 실례되지만 딜이 언제쯤 방에서 나갈까 생각하며 엘피가 휘낭시에를 조각냈을 때, 그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트론 전하께서 솔피시언에 와 계신다고 합니다. 혹시 들으셨나요?”
엘피는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한 뻔한 것을 참았다. 슬쩍 루베인의 얼굴을 보니 별 동요는 없었다. 눈치를 보니 엘피의 정체를 알아서 한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잡담이었던 모양이다.
엘피는 손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겨우 대답했다.
“어, 어머. 촌뜨기라 소식이 늦어서요. 그건 몰랐습니다.”
“하긴, 전하께서 아직 공식적으로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 같으니까요. 아마 휴양하고 계신 거겠죠. 며칠 내로 솔피시언 공작가를 방문하고 관공서를 시찰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렇군요. 훌륭한 일이네요.”
엘피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트론의 스케줄을 남의 입으로 듣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 후에 르터바이스를 통해 자선 파티를 개최하신다고 합니다. 실은, 저와 루베인도 그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치롤헷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셨군요. 휴양차 오신 줄 알았어요.”
“여러 유력 귀족가에도 초대장을 보낸 것으로 압니다만, 영애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시나요?”
엘피는 숨을 죽이며 최대한 평온을 가장했다. 어차피 얼굴을 마주친 딜 때문에라도 파티에 직접 참석할 생각은 없었다.
“글쎄요, 아버님께는 초대장이 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야 가문의 자랑도 아닌 평범한 여식이니까요. 언니나 오라버니가 참석하지 않을까요.”
적당히 둘러대자, 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셨군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에스코트할 테니 함께 파티에 참석하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엘피는 순간적으로 딜이 자신에게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한 박자 늦게 파트너로서 초청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 루베인 쪽을 돌아보았다.
엘피가 난처해하는 것을 느꼈는지, 그녀가 말을 거들었다.
“오, 오라버니. 그 파티에서는 내 파트너를 하는 것 아니었어?”
“아아, 그거 말인데. 솔피시언 공작이 자기 가문의 방계 영식을 파티에 참석시킬 모양이던데, 파트너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흘렸거든. 루베인 네가 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어.”
“난 싫은데……. 오라버니가 좋아.”
“아까는 징그럽다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남매간의 대화를 들으며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엘피가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정말 분에 넘치는 청이십니다만……. 저는 사교계와 담을 쌓고 살던 사람이라서요. 소공작님께 큰 폐를 저지르게 될까 두렵습니다. 말씀 거두어 주세요.”
엘피의 대답을 듣고 딜이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을 했다.
“……오늘 처음 뵌 분에게 너무 무례했던 걸까요?”
“아뇨, 무슨 말씀을요! 과분한 청을 넣어주신 것, 일생에 잊지 못할 영광일 겁니다.”
“그렇다면 부디 저에게 일생에 잊지 못할 추억을 주십시오.”
점점 더 난처해졌다. 정식으로 에스코트를 한다면 가문을 통해 청을 넣는 등의 절차가 있다. 가짜 신분이 들통날 위기였다. 이쪽에 굽히는 듯한 자세를 보이는 딜을 거절할 만한 핑계도 찾기 어려웠다.
엘피는 짧게 고민했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자포자기하는 기분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가장 큰 목적인 루베인의 마법 장치 해제에는 성공했다. 어떻게 틀어지든 이 뒤는 가이와 트론이 수습해줄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지금, 외출하는 척 가출한 거예요. 루베인을 만나러 온 것은…… 물론 오랜만에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루베인이 치롤헷에 있는 동안에라도 신세를 질 수 없나 해서였습니다.”
딜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루베인도 아주 잠깐 놀란 듯했으나, 바로 엘피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맞아, 오라버니. 실은 그래서 엘레나의 방을 마련해 줄 수 없는지 나중에 오라버니에게 넌지시 물어보려고 했어.”
“그랬구나……. 하지만 가출이라니. 가문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엘피는 눈알을 굴렸다. 충동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있지만, 귀족 영애가 이렇게 무작정 가출을 할 일이 어디 있을까. 그때 루베인이 옆에서 얼른 거들었다.
“집에서 억지로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한대! 배 나오고 기분 나쁜 아저씨한테! 너무하지 않아?”
루베인의 입에서 나오는 정략결혼이라는 단어는 얼마 전의 일을 생각하면 그다지 웃을 수 있는 농담거리는 아니었으나, 아무튼 가출 이유로는 제법 그럴싸했다.
“……으음. 그러셨군요. 그걸 피하고 싶어서 저희 루베인을 방문하러 외출하는 척하면서, 가출을 결심하신 겁니까.”
“네……. 행선지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으니, 원래 치롤헷이 근거지가 아닌 마그달리사 별저로 갈 거라고 집에서 생각을 못 할 테니까요. 숨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순한 목적으로 방문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무렇게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드는 것치고는 아무튼 앞뒤가 이어졌다. 엘피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서 부모님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파티는 조금 곤란했어요. 하지만 제 의도가 불쾌하실 것도 압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대충 둘러대며 이제 퇴장할 생각이었다. 루베인 쪽의 마법 보안을 풀어 두었으니 이후에는 떨어져 있어도 서로 연락할 수 있을 테고, 한 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상한 목적으로 방문한 낯선 영애 따위, 딜 역시 쫓아내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엘피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시다면, 편히 지내다 가세요. 바로 영애가 지낼 곳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지요.”
“네?”
엘피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딜은 귀족다운 우아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마주보았다.
“저희 가문의 명예를 걸고 불편하게 지내는 일 없으시도록 모시겠습니다. 루베인도 계속 혼자 있기는 심심할 테고요.”
“마,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폐가 아닌지…….”
“괜찮습니다. 저의 기쁨입니다.”
엘피가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딜은 시종에게 티세트를 물리도록 지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빈손으로 오신 것 같은데, 필요한 물품은 빠짐없이 조달하도록 지시할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편안한 시간 되시길.”
이쪽의 가부를 묻지 않고 잘라 말한 후 딜은 방에서 물러났다.
엘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루베인을 돌아보았다.
“……어쩌지?”
“어쩌기는. 언니도 나랑 같이 우아한 저택 감금 신세겠네. 오라버니 없을 때 몰래 빠져나가도 되긴 하지만, 수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야.”
“…….”
엘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세상의 우울을 짊어진 듯한 엘피의 반응을 보고 루베인이 쓰게 웃었다.
“내가 보기에는 으음……. 우리 오라버니, 언니가 마음에 든 거 아닌가 싶은데.”
“……동생의 가출한 친구를?”
“오라버니는 얼굴을 밝히니까. 언니 예쁘잖아.”
엘피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베인은 푸, 하고 웃었다.
“언니가 새언니가 된다면 나야 환영이지만. 우리 집안 자체는 권할 수가 없어서 남편감으로 별로이긴 하네.”
“노, 농담 그만해. 루베인. 나는 결혼 같은 거 안 해.”
“……아, 하긴. 응. 트론 전하가 있었지. 미안, 괜한 소리를 했다.”
트론의 이름을 듣자마자 더욱 우울해졌다. 치롤헷에 있는 동안 트론과 가까이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들떴는데, 오히려 데니옴에서보다 거리가 멀어졌다.
‘……매일매일 전하를 깨우는 게 얼마나 즐거웠는데.’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을 삭이며 엘피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