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8)
고급스러운 금붙이로 장식된 마차가 미끄러지듯 저택 앞에 도착했다.
마차의 목적지는 치롤헷에 있는 마그달리사 별저였다.
보통 해안에 별저를 두는 다른 귀족가들과 달리, 마그달리사 별저는 고급 주택지에 위치했다. 바다에서 먼 대신, 높은 위치에서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다.
마차에서 붉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금발의 여성이 내려섰다.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곱슬머리에 화려한 옷차림이 한 떨기 장미를 연상시켰다.
“혹시 선약하셨습니까.”
“아뇨, 저는 루베인의 친구예요. 그 아이가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찾아왔답니다. 저택으로 연락을 넣어도 닿지 않길래, 걱정이 되어서요.”
“아…….”
도어맨은 약간 난처한 얼굴을 하다가 본관 쪽에 연락을 넣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쿠일로스 후작의 차녀, 엘레나라고 합니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대답하자, 도어맨이 얼굴을 붉혔다가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시죠. 우선 안에서 대기하시라는 소가주님의 명이십니다.”
“감사해요.”
여상하게 답변했지만, 그녀의 심장은 두근두근 크게 뛰고 있었다.
엘피는 루베인에게 다가가는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녀가 평소에는 입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것이나, 머리칼을 인두로 지져서 곱슬곱슬하게 만든 것은 만일을 대비해서였다.
실제로 현재 그녀의 외견은 평소의 단아하고 청순한 인상은 찾아보기 힘들게 바뀌어 있었다.
완전히 바뀐 엘피의 모습을 보고 가이는 이런 분위기도 아름답다며 여느 때처럼 직설적으로 칭찬해 주었다.
트론의 경우에는 무언가 놀란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제없겠다고 짧게 답했다.
‘……별로 마음에 안 드셨나?’
엘피 본인은 화장이 너무 짙기도 하고 자기 얼굴 같지 않아서 이렇게 꾸민 모습이 괜찮은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평소와 인상을 다르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성공한 듯하니 문제는 없겠지만.
중요한 건, 위장 신분인 ‘엘레나 쿠일로스’로서 루베인에게 접촉하고, 가이가 루베인의 마법 장치를 풀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엘피는 주먹을 꾹 쥐며 다시금 각오를 새기고 사용인을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마그달리사 별저는 전체적으로 노란색과 주황색의 난색을 써서 부드러운 분위기로 내부를 꾸며 두었다.
엘피는 하녀가 내준 꽃차를 마시며 실례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주변을 살폈다.
루베인과 딜이 치롤헷의 별저에 도착한 것은 이틀 전이었기에 아직 어수선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안정된 분위기였다.
엘피가 잔을 반 정도 비웠을 무렵, 응접실 안으로 백금발에 초록 눈을 한 청년이 들어왔다. 마그달리사 공작가의 정식 후계자, 딜 마그달리사였다.
엘피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했다.
“갑작스럽게 만남을 청한 무례에 사죄드립니다, 소공작님.”
“괜찮습니다. 저희야말로 변변한 대접을 해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루베인 정도로 강렬한 미모는 아니었지만, 선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이제 루베인을 만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야 해.’
엘피는 가이와 의논하여 결정한 ‘엘레나 쿠일로스 후작 영애’의 설정을 잊지 않도록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저희 루베인의 친구시라고요.”
“네. 사는 곳이 멀다 보니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지만요.”
“그 녀석, 성격이 별나서 친구를 잘 못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영애같이 훌륭한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딜의 말은 액면 그대로 좋은 뜻이 아니었다. 정말로 자신이 루베인의 친구가 맞는지 경계하는 듯했다.
마그달리사 공작가쯤 되면 연줄을 대서 혹시 이용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엘피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후후 웃었다.
“어머, 성격이 별나긴요. 루베인과는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만났습니다만, 저처럼 형식적으로 돕는 사람과는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던걸요. 그렇게 마음씨 곱고 착한 아이는 처음 보았어요.”
“……아아, 고아원에서 만나셨군요.”
“네. 마지막으로 르터바이스 영지에 갔다는 편지는 받았는데, 그 이후로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어서요. 걱정하던 차에, 솔피시언 영지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급하게 찾아왔습니다. 선약을 잡는 게 좋았을 텐데, 저택에서 외부 연락을 받지 않으셔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저희 영지가 아니다 보니 당분간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 같아, 초대를 일괄적으로 거절하고 싶었거든요. 그 때문에 외부의 연락을 끊고 있었습니다만, 영애에게 심려를 끼친 것 같군요.”
딜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아무래도 루베인이 고아원을 방문하고 돌아다닌다는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보니, 그녀가 여동생의 친구라고 신뢰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친구인 것만 맞고, 나머지는 거짓말이지만요. 미안해요, 소공작님.’
엘피는 속으로 사과를 하며 부채를 내렸다.
“혹시 루베인은 만나기 어려울까요? 그럼 다음에 다시 날을 잡겠습니다.”
반드시 오늘 만나야 하는 것처럼 안달을 내면 저쪽이 다시 의심할지도 몰랐다. 엘피는 한 걸음 물러나는 태도를 취했다.
딜은 고개를 저으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아닙니다. 실은……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루베인 녀석이 각하의 명으로 외출 금지를 당했거든요. 먼 휴양지까지 와서도 바깥 구경을 못 하는 게 불쌍했던 차입니다. 영애께서 이야기 동무가 되어 주세요.”
“하긴, 고아원 순회도 그렇고 각하께서 루베인의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신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언젠가 마그달리사 공께서도 그녀의 고귀한 뜻에 귀를 기울여 주시면 좋겠네요.”
“루베인 녀석도 각하 눈치를 보면서 자중하면 좋겠고요. 루베인한테 한 말씀 좀 해주세요.”
“후후, 제가 말한다고 들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힘쓰겠습니다.”
“그럼 바로 사용인을 보내서 영애를 안내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드디어 루베인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흥분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알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저 때문에 일부러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어요.”
“천만의 말씀을요.”
딜이 다가와 엘피의 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름다운 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저야말로 영광이었습니다.”
“저도 소문이 자자한 마그달리사 공작의 훌륭한 후계자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딜에게서 느껴지는 어딘가 은근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엘피는 생긋 웃으며 답했다.
그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그녀를 루베인의 방으로 안내했다.
경비는 따로 세워 두지 않았으나, 문의 열쇠는 바깥에서 걸어 둔 상태였다. 시종이 문을 열고 루베인을 불렀다.
“공녀님. 말씀드린 친구분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안쪽에서 루베인이 후다닥 입구로 달려왔다. 그리고 엘피를 보고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엘레나!”
아무래도 눈치 빠르게 설정에 맞춰 주려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이야, 루베인.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
“응!”
루베인과 손을 맞잡으며 엘피는 주변을 살폈다. 방 내부에까지 감시의 눈이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미션을 무사히 수행한 것에 깊게 안도했다.
***
“루베인, 오랜만에 봐서 기뻐. 급하게 오느라 빈손으로 와서 미안해.”
엘피는 입으로 안부 인사를 건네면서 재빠르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현재 이 방에서 도청을 당하고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루베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괜찮아, 언니. 오라버니가 아무리 그래도 도청까지는 사생활이 없는 것 같다고 떼 줬어. 각하에 비해서 오라버니는 무른 편이니까.”
“그건 다행이야. 마그달리사 공이 직접 안 오신 게 다행이었네.”
“맞아, 맞아. 그나저나 언니 무지 예쁘다! 평소에도 그렇게 차리고 다니면 좋을 텐데.”
“말도 마, 얼굴에 가면이라도 붙인 것 같아. 화장이 두꺼워서 손톱으로 긁으면 자국이 남지 않을까?”
엘피의 너스레에 루베인이 소리 내서 웃었다. 밝아 보이는 건 다행이지만, 어딘지 안색이 안 좋았다.
“……나는 그렇다 치고, 얼굴이 무척 까칠해. 루베인. 전에 봤을 때보다 마른 것 같은데, 식사는 제때 하고 있는 거야?”
“각하한테 반항하느라고 굶기도 하고 그랬거든. 결국에는 억지로 먹이셨지만.”
“…….”
엘피는 눈을 내리떴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엘피로서는 이해하고 싶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인물이었다. 딸을 아낀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결국에는 그냥 딸을 통제하고 싶은 것뿐 아닐까.
자유롭고 올곧은 루베인이 자신의 부친 때문에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무튼, 또 이렇게 언니가 찾아와 줬네. 매번 고마워. 어쩐지, 언니는 옛날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 같아. 탑에 감금된 공주를 구하러 온다거나 하는 거 말이야.”
“후후, 루베인이 공주님같이 예쁘긴 해.”
“아하하!”
루베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엘피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찾아온 건……. 늦었지만, 저번에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약속?”
“각하한테 당한 일 갚아 주고 싶다고 했잖아. 왕자님하고 의논해서, 그걸 돕기 위해 온 거야.”
엘피는 그들이 세운 계획의 개요를 그녀에게 설명했다. 루베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좋지만……. 나, 마법 장치가 몸에 설치되어 있어서 억지로 떼어 내거나 지정된 범위에서 벗어나면 경보가 울리게 되어 있거든.”
“그럴 거 같았어. 물론, 그것도 해제하려고 해. ……아일란!”
엘피의 부름에 연분홍빛의 전서구가 날개를 펼치며 나타났다. 아일란은 곧바로 루베인의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가이 님, 저 지금 루베인 앞이에요. 문제없을까요?”
[잘해 주셨어요, 엘피 님. 맡겨만 주세요. 루베인 님도 오랜만이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엇, 네에.”
아일란을 중심으로 푸르른 원을 그리는 광선이 몇 겹이고 루베인을 둘러쌌다.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푸른 선은 바쁘게 움직였다.
루베인은 신기한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고, 엘피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양손을 꾹 쥐었다.
약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선이 완전히 사라졌다.
[좋습니다. 이제 루베인 님의 마법 장치는 무력화되었어요. 물론, 신호를 받는 쪽에서는 수상하게 느끼지 못하도록 손 써 두었고요.]
“굉장해요, 가이 님!”
[겸사겸사 마그달리사 별저의 보안 같은 것도 확인을 했습니다만……. 으음, 이상하네요. 생각보다 허술해요.]
“허술하다고요……?”
[네. 올페마에서 느껴진 방어벽을 생각해서 꽤 애를 먹을 줄 알았는데, 너무 손쉽네요. 그때와 같은 사람이 보안을 맡지 않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