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7)
“루베인. 이번 파티 참석 건은 각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거니까, 절대 말썽 피우면 안 돼.”
“알았어, 오라버니.”
루베인은 딜의 잔소리를 대충 넘기며 열차의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솔피시언 영지로 자신을 초대한 것은 트론과 엘피의 안배였을 것이다.
‘편지가 무사히 엘피 언니한테 도착한 건가. 그건 다행이네.’
호텔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엘피가 트론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아버지에게 한 방 먹일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베인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지금 온몸에 달고 있는 마법 장치도 그렇고……. 연락이 가능할까 싶은데.’
마그달리사 공작은 치롤헷으로 루베인을 보내면서 트론을 비웃었다. ‘제 딴에는 도발이라고 생각하겠지’라며 그의 행동을 유치하다고 치부했다. 자신이 직접 갈 것도 없다며 딜을 대리로 보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사이에 마그달리사 공작 안에서 트론의 평가가 많이 깎인 듯했다.
‘……언니는, 우리 각하가 왕자님하고 갈라선 것 같다고 했지.’
루베인이 느끼기에도 그랬다. 그렇다면 자신의 부친은 헤럴드를 밀기로 한 것일까. 혹은 또 다른 세력일까. 어느 쪽이든 트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은 아니었다.
“오라버니.”
“응, 루베인.”
“이번에 자선 파티에 참석하는 것 말고도 무언가 일정 있어?”
“솔피시언 공작저에 들를 예정이야. 각하께서 대신 인사 전하라고 말씀하셨거든.”
“……그렇구나.”
렌포우 솔피시언. 선왕비의 조카이자 속을 알 수 없는 수완가.
자신의 부친이 그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번에 솔피시언 공작저에 방문하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루베인은 엘피와 트론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
거나하게 취한 가이는 집사와 시종들의 부축을 받아 반쯤 졸면서 본채로 돌아갔다.
트론은 분위기에 맞춰서 몇 잔을 함께해 줬으나, 전혀 취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엘피의 경우에는 가이가 권하는 술을 몇 모금 마신 정도였지만, 평소에 술을 마실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그녀는 구름을 밟는 것처럼 붕 뜬 기분으로 비틀거리며 별채로 향하다가 트론 쪽을 돌아보았다.
“에헤헤.”
트론은 자신을 보고 실없이 웃는 그녀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취했군.”
“안 취했어요!”
“보통 취객들은 다 그렇게 대답하지.”
“취객 아니에요!”
주정뱅이를 상대로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질 리가 만무했다.
트론은 별채로 돌아오자마자 엘피를 바로 재우기 위해 그녀가 쓰는 방으로 들여보내려 했다. 그러나 카우치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엘피 본인이야 불편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카우치의 폭은 좁았다. 취해 있는 엘피가 뒤척이다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누나, 이쪽으로 와.”
“우웅?”
슬슬 졸음이 밀려오는지 한쪽 눈을 비비며 엘피가 힘없이 트론을 따라왔다.
트론은 엘피에게 자신의 침대를 내줄 생각이었다. 맑은 정신이라면 사양했을 테지만, 취해서 정신이 없는 상태이니 별 의문 없이 그곳에서 잠을 청할 것이다.
“옷은……. 불편할 거 같지만 일단은 자. 자고 내일 아침에 씻어.”
천개를 젖히며 올라가라고 가리키자, 엘피는 낑낑거리며 침대 위에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더듬거리는 동작이 어설퍼서 침대에 오르는 것에 실패했다.
트론은 “미안” 하고 짧게 사과하고 그녀를 가볍게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눕자마자 자신의 눈앞에 있는 트론의 얼굴을 보며 엘피가 활짝 웃었다.
“론이다!”
“응.”
트론은 바로 몸을 떼려고 했으나, 엘피는 그의 목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론도 자.”
“……잘 거니까, 놔주면 안 될까.”
“안 돼!”
“자러 가게 해 줘.”
“론은 나랑 잘 거야!”
평소의 엘피는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가끔 고집을 부릴 때는 있지만, 그건 주로 트론을 걱정할 때의 일이었다. 이렇게 논리도 뭣도 없이 굴지는 않았다.
그런 모습조차도 무척 사랑스러웠지만, 취한 사람의 말을 그대로 받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트론은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면 안 돼, 누나.”
“왜애.”
“누나도 나도 이제 성인이니까.”
“론은 내 동생인데! 내 건데! 왜 맘대로 안 돼!”
엘피가 항의하는 것처럼 트론의 뺨을 꼬집었다. 취한 상태라 힘이 제어되지 않는 것인지 생각보다 꽤 아팠다.
“그러게……. 끝까지 그러면 좋았을 텐데.”
트론은 서글프게 중얼거리며 엘피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불만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는 엘피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싫어, 가지 마. 가면 미워.”
엘피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취한 사람 특유의 널뛰는 감정 곡선이었지만, 트론은 당황하여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옆방에 자러 가는 거야. 멀리 안 가.”
“계속 그러잖아……. 이젠 안아 주지도 않고. 손도 안 잡아 주고…….”
“……미안.”
“론은 내 동생이지? 내 거지?”
울기 시작해서 새빨개진 콧등을 찡그리며 엘피가 투정을 부렸다. 트론은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계속 좋은 동생일 수 있도록 노력할게. 그리고…… 나는 누나 거 맞아.”
“에헤헤.”
엘피가 그제야 만족한 듯 그를 붙잡던 손을 놓았다. 잠시 후 그녀에게서 색색 숨소리가 들렸다. 투정을 실컷 부린 후에야 만족하고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트론은 엘피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눈가에 흘러내린 눈물을 옷깃으로 닦아 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창밖에서 달빛이 들어와 그림자가 짙게 기울어졌다. 어둠 속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흑발의 청년은 원래 그녀가 쓰던 카우치에 누웠다. 담요를 덮자 엘피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났다.
키가 한참 작던 시절 그녀의 품에 파묻히듯 안겼던 기억이 떠올라 어딘지 마음이 평안해졌다. 오랜만에 깊게 잠이 들 것 같았다.
***
‘으윽, 머리 아파…….’
엘피는 끙끙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목도 무척 탔다. 온몸이 뜨거워서 걸친 옷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던진 기억이 있는데, 잠결에 풀어서 그런지 제대로 풀리지 않아 몸을 압박하고 있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가슴 밑을 둘러싸고 있던 리본을 풀고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방 안이 어두워……. 아직 새벽인가?’
시간을 확인하려고 주변을 더듬거리다가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은 요 며칠간 신세를 졌던 카우치가 아니었다. 엘피는 그 사실에 화들짝 놀라 눈을 비볐다.
“와, 왕자님 침대?”
허겁지겁 천개를 헤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이 어두운 것은 새벽이라서가 아니라, 암막 커튼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희미하게 흘러들어오는 빛이 이미 해가 뜬 지 오래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엘피는 머리를 꾹꾹 압박하는 숙취를 어떻게든 견디며 원래 자신이 쓰던 방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저, 전하.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트론이 카우치에 기대서 서류를 보다가 엘피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완전히 굳었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일단, 옷부터 어떻게 좀 하지.”
“어, 으왓, 꺄악!”
엘피는 리본으로 고정했던 드레스가 완전히 풀어 헤쳐져서 거의 속옷이 드러난 걸 확인하고 자리에 홱 주저앉았다.
그녀가 패닉에서 벗어나 겨우 몸단장을 마치고 온 것은 그로부터도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
“죄송합니다…….”
“괜찮다니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거기까지 안 가도 돼.”
트론은 엘피가 새빨개진 얼굴로 반복하는 사과를 차근차근 넘겨주었다. 항상 트론 앞에서 지나치게 위기의식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일단 수치심은 있었구나 조금 안심하기도 했다.
“……우우, 저 같은 주정뱅이는 그냥 방 아무 데다가 던져 놓지 그러셨어요.”
“너무 자책하지 마. 르터바이스 소백작 수준으로 마신 것도 아니었고, 그냥 술에 약했던 것뿐 아닌가.”
“앞으로 조심할게요.”
“응. 엘피는 밖에서 술 안 마시는 게 좋겠어.”
“네…….”
완전히 시무룩해진 그녀의 얼굴마저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니 자신이 중증이긴 한 모양이었다.
트론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지난 일로 마음 쓰는 건 그 정도로 하지. 아마 소백작이 아침으로 해장 요리를 준비해 놨을 거 같으니까, 먹고 오늘은 푹 쉬어. 어차피 제대로 움직이는 건 내일부터다.”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 보여서 신뢰가 부족하시겠지만, 맡은 임무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엘피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트론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응, 무리하지는 말고.”
“……그건 항상 제가 전하께 드릴 말씀이에요.”
“요즘은 무리 안 하는 것 같은데.”
“제가 눈만 떼면 과로하시잖아요! ……이번에 솔피시언 건으로 조사할 때도 위험한 일은 하시면 안 돼요.”
“응.”
그녀의 뺨을 달래듯 쓰다듬고 싶었지만, 이룰 수 없는 소망이었다.
엘피가 말한 대로 위험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마수 토벌 때처럼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은 최대한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
솔피시언의 본저는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교외에 위치했다.
먼 과거에 치롤헷은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어 치안이나 방위 시설이 취약했다. 이 때문에 치롤헷에 본거지를 틀었던 당시 솔피시언 남작은 아예 치롤헷의 바깥 경계에 본인이 지낼 저택을 짓고 방어를 위한 산성을 쌓았다.
현재 산성은 방어벽 기능을 하지 않는 유명무실한 유적지에 불과하지만, 선조의 자랑스러운 일화가 담겨 있는 저택은 그 시대부터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보수에 보수를 거듭하여 땜질 자국이 가득한 저택의 모습은 좋게 봐줘도 훌륭하다고 하기는 어려웠으나, 전통의 무게가 그만큼 서려 있었다.
솔피시언 공작은 느슨한 동작으로 보좌관에게 서류철을 받았다.
“……그래요, 트론 전하께서는 별 움직임이 없다고요.”
“네, 각하.”
“흐음.”
그는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서류철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미소 지었다.
“파티에 맞춰서 무언가 일을 벌이시려나.”
“……파티 초대, 역시 거절할까요?”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르터바이스 주최지만, 실질적인 주최자는 국왕 대행인 왕자님 아니십니까. 그것도 ‘자선 파티’인걸요. 영주인 나는 아파도 기어서라도 가야 하는 게 당연하지요. 어차피 제시드가 있는 한 나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잖습니까. 독 정도만 조심하도록 하죠.”
“괜한 말씀 죄송합니다.”
보좌관이 고개를 조아리자, 솔피시언 공작은 손을 저었다.
“걱정해서 그런 것은 압니다. 내 안위보다는 트론 전하께서 세틱스 전하를 찾아내지 않을지 좀 염려되는군요. 동생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틱스 전하가 근질거려 보였거든요.”
“그쪽은 저희도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올페마에서 별일 없었으니, 설마 무모한 짓을 다시 벌이시지는 않겠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부탁합니다.”
“네.”
그는 금욕적인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요염한 미소를 얼굴에 올리며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보좌관이 다음 안건을 설명했다.
“그리고, 일부 큰손들이 최대한 빨리 다음 ‘특별 도박장’을 열어 달라고 성화입니다.”
“으음. 트론 전하가 와 계시는 동안은 피하려고 했는데요.”
“네, 다만……. 아시다시피 처필이 요즘 파산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입니다. 저희와는 좀 다른 방식의 도박장을 운영하기 시작해서 사람을 끌어모으고 있죠. 큰손들이 그쪽으로 이동해 버리면, 저희로서도 좀 타격이…….”
“……그렇습니까.”
솔피시언 공작은 턱을 매만지다가 끄덕였다.
“좋습니다. 딱 한 번만 진행하기로 하죠. 이전처럼 ‘특별 경매’와 함께.”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 넣겠습니다. 그리고…… 공작부인께서 일주일째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만.”
공작이 표정을 잠깐 굳혔다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야 자기가 알아서 처신하겠죠. 당장 문제가 일어난 것이 아니면 무시하세요.”
“……네.”
신경질적으로 만년필의 뚜껑을 닫은 후 공작은 서류를 넘겼다. 당장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들에 비하면 그런 사소한 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