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6)
“……미안, 하다. 뭔가 내가 불쾌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나?”
“아녜요, 전혀 그런 거 없었어요. 그냥 평소처럼 전하께서 잠이 덜 깨셨던 것뿐인걸요.”
엘피가 후후 웃으며 말했지만, 트론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뭔가 걸리는 점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내일부터 깨우러 오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알아서 일어나겠다.”
트론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내뱉은 소리에, 이번에는 엘피가 동요했다.
“제, 제가 뭔가 실수했나요?”
“아니. 이제 나도 어린아이가 아니니 언제까지 그대의 손을 빌려 일어날 수는 없지 않은가.”
트론은 그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엘피 본인은 자각이 없었지만, 트론에게 안겨 있던 탓에 머리칼이며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는 엘피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제가 전하의 명을 어기고 멋대로 깨우러 와서 화나신 건가요?”
“전혀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엘피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솔직하게 말했다.
“실은, 조금 들떴거든요. 오랜만에 전하를 내가 깨울 수 있겠구나, 하고.”
뜻밖의 말에 트론이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무얼 염려하시는 건지는 알아요. 그래도 왕궁이랑 다르게 이곳에서는 남들의 오해를 받을 일이 없으니까 괜찮겠지 하고……. 멋대로 깨우러 왔어요. 죄송해요.”
“누나가 사과할 일 아니야. 그러지 마.”
트론은 목이 타는 것 같은 감각을 간신히 삼켰다. 그녀는 용기를 낸 듯 고개를 들었다.
“내가 론한테 뭔가 폐를 끼친 건 아니지?”
“응.”
“……치롤헷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깨우면 안 돼?”
“안 된다기보다는…….”
“그럼 론이 준 생일 선물 지금 쓸게! 매일 아침 론을 깨우게 해 줘.”
트론은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순진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피의 모습은 파괴력이 컸다.
여름용의 얇은 슈미즈 드레스가 구겨진 채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어깨와 가슴골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이렇게 무방비한 엘피가 침대에서 자신을 깨운다니, 일종의 정신 공격 아닐까.
“……알았어. 깨우러 와도 되니까, 그런 거로 생일 선물 날리지 마.”
하지만 트론에게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가 허락하자마자 엘피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활짝 피었다. 어째서 자신을 깨우는 일로 들뜨는 건지, 왜 그렇게 기뻐 보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웃음이 돌아온 건 다행이었다.
“얼른 씻고 와. 아침 준비해 달라고 본채에 연락해 둘게.”
“……응.”
내일부터 매일 아침 자신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현실에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 마음을 누르며 트론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
“전하, 저 왔어요. 보고 싶으셨죠?”
느지막하게 도착한 가이를 보고 트론이 대답 없이 도끼눈을 떴다. 엘피는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저의 배려에 감격해서 더 적극적으로 환대해 주셔도 괜찮은데요.”
“그대는 죽고 싶다는 말을 참 여러모로 돌려 잘 하는군.”
“표현의 마술사라고 불러 주세요. 마법사지만!”
트론이 더 참지 못했는지 가이의 옆구리를 쳤다. 가이가 과장되게 기침을 뱉으며 웃었다.
“에이 참, 두 분이서 오붓하게 지내셨으면 됐잖아요.”
“그런 부탁한 적 없다. 침실이 부족한 탓에 시녀장이 다른 방에서 불편하게 지내고 있다고.”
“어라라. 다른 방에 잘 곳 없지 않아요?”
가이의 질문에 엘피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카우치에서 자고 있어요. 왕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사실 저는 별로 안 불편해요.”
애초에 가난뱅이 생활로 단련된 엘피에게 그 정도는 고생 축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중간에 착오가 있었나 봐요, 가이 님. 아무튼, 일부러 침대를 옮겨 오는 것도 큰일이다 싶어서 그냥 지내고 있으니까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으음.”
엘피의 반응이 너무나 해맑아서 가이는 짧게 신음을 냈다. 그가 바랐던 방향의 진전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가이는 측은한 눈으로 트론을 바라보았다.
“아예 호텔 방을 따로 잡을까요? 스위트룸으로.”
“한마디만 더 하면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다.”
이 이상 건드렸다가는 정말로 폭발하겠다 싶어서, 가이는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생글 웃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갈 길은 아직도 먼 듯했다.
***
“지시하셨던 솔피시언의 지하 경제 현황 조사 말입니다만, 전하의 추측대로 합법적인 도박장 외에 지하 도박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가이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판돈을 더 불리는 형태인가?”
“그것도 그렇고요, 가장 큰 건수는 레이스라는 모양입니다. 경마랑 비슷한 거죠.”
“지하 도박장이라면 경마같이 규모가 큰 시설이 필요한 건 피할 텐데.”
“네, 경마는 아니고요. 오리 레이스래요.”
“오리요?”
경마나 개썰매처럼 대중적인 레이스가 아니라서 엘피가 고개를 갸웃했다.
“말처럼 달리기 위한 생물이 아니니 변수가 무척 크지요. 아예 골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고요. 그렇게 유동성이 큰 점이 오히려 도박꾼들에게는 매력으로 느껴진다는 모양입니다.”
“도박에 중독된 이들의 사고방식이야 이해하기 어려운 법이니. 다만, 승부를 조작하기도 쉬울 것 같은데.”
“아마도요. 항의를 받지 않을 만큼 승부를 조작하며 꽤 두둑하게 이윤을 빼먹고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군.”
트론은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번 계획은 솔피시언에서 불법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지하 산업과 관련된 일들을 공개적으로 고발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 고발을 루베인에게 맡겨 그 공으로 그녀에게 명예직을 내릴 생각이었다.
루베인의 개입으로 마그달리사와 솔피시언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만, 그녀를 공작가에서 독립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언론이 대대적으로 루베인의 명예직 이야기를 싣게 되면, 체면을 중요시하는 마그달리사 공작이 그녀를 계속 연금해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겨우 오리 레이스 정도로는 화제성이 부족하다는 거로군.”
“그게 문제란 말이죠.”
가이가 트론의 말에 동의하며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음성적인 도박판을 고발한다고 하면 듣기에는 그럴싸합니다만, 모두가 공분할 건수는 아니거든요. 언론들이 즐거워하면서 물 떡밥은 아닙니다.”
“오가는 금액을 강조한다면?”
“으음, 서민들이야 화가 나겠지만요. 솔직히 귀족들의 반응은 별로일 거 같네요. 오히려 별일도 아닌데 들쑤셨다고 왕자님의 인상이 나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엘피는 불안한 눈으로 트론을 보았다. 그는 별로 동요하는 기색 없이 턱을 괴었다.
“그 외에는 더 없나?”
“확실한 건 저 정도고요. 더 있을 것 같지만, 보안이 꽤 철저한 편이라서요. 우선은 계속 캐 봐야겠죠.”
“그래. 세탁을 잘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솔피시언의 자금 순환은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분명히 그것 말고도 건드리면 치명상이 될 만한 돈줄이 있을 거다.”
“네. 그리고 지시하신 자선 파티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상대로 루베인 님은 딜 소공작과 함께 온다는 것 같아요.”
루베인의 이름을 듣고 엘피는 안심하며 가이를 돌아보았다.
“용케 마그달리사 공이 루베인을 보내 주었네요? 사이가 틀어졌으니 파티에 초대해도 거절할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마그달리사 공은 체면을 중시하고, 자존심이 센 사람이라서요.”
가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일부러 마그달리사 공이 귀족들과 회동하는 자리에 공개적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지난번 마수 토벌 때 파티가 중지되어 결례가 많았다, 이번에 트론 전하의 솔피시언 방문에 맞춰 자선 파티를 열 예정인데 루베인 님이 다시 자리를 빛내 줬으면 좋겠다, 바로 답변 주실 수 있겠느냐 하는 말을 전했죠.”
“……아아, 자선 파티라서 더욱 거절하기 어려웠겠군요.”
“그렇죠. 사실 3년 전에 루베인 님이 대대적으로 사건을 일으켰을 때면 모를까, 지금은 연금해 둘 이유도 약해서 주변 시선 때문에 슬슬 곤란해지기 시작했을 거고요.”
“아마 도발로도 받아들였을 거다. 혼담을 거절한 후에 굳이 내가 르터바이스를 통해 제 딸을 초대했다는 점에서. 그 도발을 피하는 것도 자존심상 어려웠겠지.”
“그러게요. 루베인 님 옆에 보란 듯이 어마어마한 귀공자라도 붙여서 파티에 참가시키지 않을까요.”
“……저희 왕자님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귀공자라는 게 존재하나요?”
엘피의 순수한 의문에 가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파 등받이에 얼굴을 묻었다. 트론이 가이 쪽을 보고 뚱한 얼굴을 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다만, 영애가 온다고 해도 경계가 삼엄할 거다. 우리 쪽에서 접근하기 편치 않겠군.”
“지난번 마법 방해 건이나 주술 건을 생각하면 저쪽에 꽤 솜씨 좋은 마법사랑 주술사가 붙었다는 건 자명하니까 말이죠. 으음, 루베인 님하고 접촉할 방법이 있으면 해제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만.”
“하지만 공적인 자리 말고는 루베인과 만나기 힘들겠네요…….”
엘피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어, 저번처럼 혹시 제가 따로 루베인을 만나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치롤헷에는 연줄이 없으니 저번처럼 하녀로 잠입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친구라서 만나러 왔다는 핑계 정도는 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마그달리사 공작이라면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지 모르지만, 소공작인 딜과는 면식이 없었다.
그는 부친과 달리 다소 유한 성격이니, 여동생의 친구라고 하면 문전박대는 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가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아, 그거라면. 흠. 괜찮겠네요.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루베인 님과 둘이 있을 때, 아일란을 호출해 주시겠어요? 제가 아일란을 매개체로 마법 장치를 내부에서 조작해 놓지요. 장치해 둔 쪽에서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지난번에 당했던 걸 갚아 줄 수 있는 것이 기쁜지 가이는 들떠 보였다.
“아, 그런데 왕자님. 마법 장치는 그렇게 해결한다고 해도. 루베인 님에게 무언가 주술을 걸어 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암시 정도는 가능하지 않은가 하고요.”
“그건 괜찮다.”
트론이 단언하며 턱을 괴었다.
“루베인 마그달리사는 주술이 듣지 않는 특이 체질이니까.”
“그걸 어떻게……. 아, 저희가 모르는 새에 루베인 님에게 주술 걸어 보셨어요?”
“응. 예전에 좀 귀찮아질까 봐.”
“전하께서 보증하신다면 그건 문제없겠군요. 그럼 엘피 님,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네, 맡겨 주세요!”
엘피는 굳게 끄덕였다. 트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무언가 해내지 않으면, 그의 옆에 있을 자격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럼 저와 왕자님은 솔피시언 쪽을 더 캐 보기로 하고, 엘피 님은 루베인 님이 치롤헷에 오는 대로 접촉하는 것으로. 그렇게 진행하시죠.”
가이가 연기가 나지 않는 마법의 불꽃으로 비밀 서류를 불사르며 마무리했다.
“그럼 조금 늦었지만, 엘피 님의 생일을 기념해서 한잔 해요!”
“그러지. 당분간 바빠질 테니 한가한 저녁 식사는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챙겨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전하, 가이 님.”
“저희 사이에 당연한 일인걸요. 일부러 테이블을 바닷가로 세팅했습니다. 가시죠.”
휴양지다운 목가적인 나날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