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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77화 (77/132)

77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5)

‘르터바이스 소백작을 벌하는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트론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짜증을 뒤로 미루고 먼저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엘피. 아무래도 저쪽에서 착오로 우리 방을 하나만 준비한 것 같다. 이 방은 그대가 쓰도록 해. 나는 다른 방을 쓰겠다.”

“침대가 이 방에밖에 없는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세요! 제가 다른 방을 쓰면 됩니다. 카우치를 침대 대용으로 써도 되고요.”

예상했던 반응에 트론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따뜻한 지방이긴 하지만, 그래선 감기에 걸릴 거다.”

“제가 할 말을 가로채지 마세요.”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트론의 건강과 안위 문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엘피다웠다.

“그럼, 그대는 본채 쪽으로 가도록 해.”

“너무 멀어서 마음이 안 좋아요. 전하 곁에서 시중들고 싶어요.”

“나는 누나가 고생을 자처하는 게 마음이 안 좋아.”

“카우치에서 자는 정도로 뭐가 고생이라고. 여분 담요는 있는 거 같으니까, 감기도 걱정할 것 없어!”

엘피가 수납장을 살피며 씩씩하게 팔을 걷어붙였다.

“아니면, 생일 선물로 준 소원 거기에 쓸래. 론은 방에서 자기!”

“제발, 그런 거에 쓰지 마.”

하지만 엘피는 트론의 말에도 물러서지 않고 고집스러운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알았어. 누나 말 들을게.”

트론은 결국 엘피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그녀는 티룸을 거처 삼아 몇 가지 개인적인 짐을 그쪽으로 옮겼다.

그 모습을 보는 트론의 마음은 좋지 않았지만, 엘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지트라도 만드는 양 즐거워 보였다. 카우치 위에 담요를 올려 마무리하고는 만족한 얼굴을 했다.

“지시를 잘못 내린 르터바이스 소백작은 도착하자마자 벌하겠다.”

별채에 침대가 딸린 손님방이 하나둘 있어도 이상하지 않건만,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세팅한 건 어딜 봐도 의도적이었다. 아마도 존재하던 침대를 별채에서 치웠을 가능성이 컸다.

“에이, 설마 악의가 있어서 그러셨겠어요. 중간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겠죠. 전하는 가이 님한테 너무 박하세요. 친해서 그러신 거겠지만, 가끔은 너그럽게 대해 주세요.”

트론은 반대로 그녀의 가이에 대한 평이 지나치게 후한 것 아니냐고 따지고 싶어졌지만, 꾹 참았다.

“그것보다 전하, 도착하자마자 바로 일하시는 거예요? 좀 쉬세요.”

엘피가 짐을 챙기던 사이 트론의 손에는 어느샌가 서류가 쥐여 있었다.

트론 본인은 무의식에 가까운 행동이었기에 머쓱해졌다.

“그냥 읽은 것뿐이지, 일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야.”

“머리를 쉬게 해 주세요! 아니면, 뭐라도 드실래요? 응접실에 딸린 식량 창고 봤는데, 과일이나 간식 같은 게 많더라고요.”

“딱히 시장하진 않군.”

“으음, 그럼…….”

엘피가 주변을 쭉 둘러보다가 손뼉을 쳤다.

“이왕 바다에 온 거니까, 바다 구경해요! 저, 바다 직접 보는 거 처음이에요.”

그 해맑은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어서, 트론은 어쩔 수 없이 끄덕였다.

***

별채의 테라스는 백사장으로 바로 이어져 있었다. 엘피는 테라스 위에 신발을 벗어 올려 두고, 흰 레이스 양말을 그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백사장에 내려서자 새하얀 발목과 종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노출되지 않는 맨다리를 보는 게 왠지 미안해져서, 트론은 시선을 해안 쪽으로 돌렸다.

바다를 직접 보는 것은 그도 처음이었다. 프라이빗 비치는 별채 앞쪽만 해안이 움푹하게 패이고 깎아지른 듯한 바위 벽이 양쪽을 가로막아 외부에서 진입할 수 없는 구조였다.

마치 세상에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세간과 동떨어진 분위기가 어딘지 신비로웠다.

바다는 무척 맑아 그 빛깔이 에메랄드색에 가까웠다. 구름이 간간이 섞인 푸른 하늘과 백사장이 바다와 어우러져 색채가 극명했다.

테라스 위에서 그 풍광을 보고 있으려니, 어느새 바다 가까이 달려간 엘피가 손을 흔들며 그에게 어서 오라고 재촉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그녀의 금발이 공중에 물결쳤다.

이 순간을 영원히 담아 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트론은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감상에 빠졌다.

살면서 무언가를 절실히 바란 적은 없었다. 무언가 대단한 이상을 그린 적도 없었다. 삶의 즐거움이나 감흥 역시 버석버석한 마음의 토양에서 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을 때만은 웃을 수 있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그녀가 옆에 있기를 바랐다. 그런 낯선 감정들과 마주하며 여기까지 걸어왔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어 달라고.’

어린 시절, 철없는 소망을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냉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임시 대공 체계의 시한은 이제 1년여 남짓하다.

헤럴드, 또한 솔피시언과 마그달리사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의 형들. 지루하고도 잔혹한 혈육 상잔이 끝나고 나면 피를 뒤집어쓴 왕좌에 앉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스레데니옴 왕국은 멸망한다. 이야기의 끝으로는 시시할 정도로 담백한 줄거리였다.

그 과정에서 엘피는 언제까지 곁에 머물러 줄까. 정이 많은 그녀는, 트론의 본질을 알고 실망한 후에도 한때나마 동생으로 생각했던 그를 걱정하며 울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가슴 아프면서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모두가 침을 뱉고 기뻐할 자신의 죽음을 유일하게 기려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정말 이기적이군.’

트론은 생각을 끊어 버리듯 부츠를 벗었다. 발에 닿는 부드러운 모래 감촉을 헤치고 엘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주저앉아서 바다 안을 열심히 관찰하다가 트론을 돌아보고 해사하게 웃었다.

“론, 물고기가 있어! 물이 맑아서 그대로 보여.”

“잡아 줄까?”

“에이, 그냥 신기해서 그런 거야. 있잖아, 저쪽에는 무지개색 물고기도 있었어. 희귀종 아닐까? 론도 볼래?”

오늘이라는 하루를, 또한 어제의 하루를, 엘피 이나드와 함께 보내온 순간순간을 잊고 싶지 않았다. 잃고 싶지 않았다.

“난 괜찮아. 그런데 자연계에서 색상이 화려한 동식물은 보통 독이 있게 마련인데.”

“헉!”

엘피가 바로 바닷물에서 발을 뺐다. 트론은 천진한 그녀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가 서 있는 그곳을 시작으로, 세상이 점차 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그녀가 없었던 시절 어떻게 살았었는지 이제는 희미해졌다.

***

식사는 사용인들이 별채까지 준비해 주었다. 오붓한 저녁을 마치고 엘피는 트론의 옷시중을 들었다. 어째서인지 트론의 얼굴이 좀 난처해 보였지만, 엘피는 오랜만에 그의 시중을 드는 것이 기뻤다.

“……있잖아, 론. 상처 자국은 마법이나 주술로 완전히 지우기 어려워?”

트론의 잠옷 상의를 여민 후 엘피가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마법이나 주술이 만능은 아니니까. 오래된 자국일수록 몸과 동화된 상태라 손상된 부위와 구분하기 어렵거든.”

“그렇구나……. 세틱스 전하 정말 밉다.”

트론의 몸에 주로 상처를 남겨 놓은 장본인을 원망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형님한테는 취미 같은 거였지.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건 변태라고 하는 거야!”

“워낙 업이 많은 핏줄이다 보니, 할 말이 없네.”

엘피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트론을 올려다보았다.

“……론은 론이야. 핏줄 같은 거 상관없어.”

자신을 변호하는 것처럼 필사적인 엘피의 얼굴을 보며, 트론은 그녀를 꼭 안아 주고 싶었다.

딱히 불건전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그저 그녀가 애틋하여 감싸 안고 싶을 때가 많았다. 손으로 뺨을 비비고, 그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었다.

지금은 외지에 나와 있고 별채에는 단 둘뿐이니, 잠시 닿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진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트론은 솟아 나온 욕망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여지를 주었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선을 넘게 될지 모른다.

그녀의 얼굴에 두려움이, 혹은 경멸이 서리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엘피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며 옅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잘 자, 누나.”

“……응, 잘 자. 론.”

엘피는 아쉬운 듯 만지작거리던 트론의 옷깃을 살며시 놓았다.

***

다음 날 아침, 엘피는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순간만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론을 직접 깨울 수 있어!’

카우치에서 잠들었지만 생각보다 푹 잤는지 몸이 개운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기분 좋은 파도 소리가 자장가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엘피는 서둘러 몸단장을 하고는 트론의 방으로 향했다.

트론의 방은 창문에 쳐 둔 암막 커튼 때문에 사방이 어두웠다. 엘피는 당장 그를 깨울 생각이 없었기에 발소리를 죽이며 트론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레이스 천개를 헤치고 조용히 침대에 앉았다. 공놀이를 해도 될 정도로 넓은 침대 위에, 트론이 작게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귀여워…….’

이제는 완전히 분위기가 성숙해진 트론이지만, 자는 얼굴만은 어딘지 앳된 티가 남아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자그마했던 그가 떠오르기도 해서 조금 뭉클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엘피는 트론의 얼굴을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몰래 범죄라도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이런 행동도 경솔한 건 아닐까, 절도가 부족한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차피 그를 깨워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마음속으로 변명했다.

트론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트론을 깨우기 전에 자는 얼굴을 실컷 감상하려던 목적은 이렇게 달성되었다.

생각해 보면 접촉 금지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매일같이 보고 만지던 얼굴인데 아직도 질리지 않는 게 신기했다.

‘물론 그만큼 우리 왕자님이 잘생기긴 했지만. 에헤헤.’

엘피는 자기 일처럼 괜히 자랑스러워하며 트론을 한참 바라보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깨울 시간이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치롤헷에 있는 동안 그를 깨우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운이 났다.

“전하.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엘피가 몸을 굽혀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물론 아침에 약한 그가 겨우 이 정도로 일어날 리는 없었다. 몇 번 더 큰 소리를 냈지만 트론의 반응은 없었다.

“지금 이건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믿어 주세요.”

사전에 허락이라도 받는 것처럼 외친 후 엘피는 그의 어깨에 손을 대고 흔들었다.

“왕자님. 일어나세요.”

“……으응.”

트론이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신음을 흘리더니 무의식인 듯 잠을 방해하는 엘피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홱 자신을 향해 당겼다.

“으왓!”

엘피는 그 기세에 트론의 품에 파묻히듯 안겼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엘피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뺨을 비비고는 그녀를 꽉 안았다.

“와, 왕자님…….”

아침에 깨울 때마다 트론이 이런 식으로 그녀를 안고 놓아주지 않는 일은 흔했다. 그런데도 새삼스레 가슴이 쿵쾅거렸다.

‘오랜만이라 놀랐나 봐…….’

솔직하게 말하자면 조금 기쁘기도 했다. 얼마 전 잠결에 트론을 껴안았을 때 일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고, 그녀는 계속 트론이 부족한 상태였으니까.

엘피는 슬그머니 팔을 뻗어 트론을 마주 안았다.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내 동생.’

다른 누나들도 동생을 보면 이렇게 각별한 감정을 느낄까. 외동이었던 엘피로서는 일반적인 남매의 감각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유일무이한 가족인 그가 소중했다. 가능하다면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 피가 섞인 건 아니니까 오해를 받기 쉬울 거야. 전하가 걱정하시는 것도 알 만해.’

그 생각을 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엘피는 트론의 머리칼을 쓸며 귀 뒤로 넘겨 주었다.

회귀 전에는 둘이서만 생활했기에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고, 트론의 미래 역시 바뀔 것이다. 자신은 왕좌에 오른 그의 곁에 얼마나 머무를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꽉 조였다.

그때, 트론이 작게 신음을 내며 엘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그 동작이 마치 고양이 같아서 엘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트론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엘…… 피?”

“네, 전하.”

“……!”

트론이 보기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그녀의 몸을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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